한양천도는 이미 고려시대부터 계획해 왔다. "도선비기'에 송도는 이미 기(氣)가 빠져 버렸다는 풍수도참설에 의해 송도의 지기(地氣)를 보완한다는 뜻에서 한양에 남경(南京)을 설치하고, 왕이 수시로 순주(巡駐)하였다. 1357년(공민왕 6)에는 한양에 궁궐을 수축하는 등 천도계획을 추진하였고, 1382년(우왕 8)에는 왕과 정부요인이 6개월간 상주하기도 했으며, 1390년(공양왕 2) 9월에는 한양천도를 단행하였다가 1391년(공양왕 3) 2월에 남경으로부터 환도했던 사실이 있으니, 당시의 사회가 얼마나 풍수도참설을 믿었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도선의 비기에 "왕(王)씨를 계승하여 왕이 될 사람은 이(李)씨이고, 한양에 도읍한다"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고려 중엽에, 윤관(尹瓘)을 시켜 백악산 남쪽에 땅을 정하여 오얏(李)을 심어 자라면 이를 베어 버리고 하여 왕성한 기운을 억눌렀다고 한다. 이성계가 1392년 7월 17일 개성의 수창궁에서 왕위에 오른 다음, 중 무학을 시켜 도읍할 곳을 정하도록 하였다. 무학이 백운대에서 맥을 따라 만경대에 이르러 다시 서남쪽으로 비봉(碑峰)에 이르러 한개의 석비(石碑)를 발견하였는데, "무학이 잘못찾아 이곳까지 온다(無學誤尋到此)"라는 여섯 자가 크게 새겨져 있었다. 이것은 곧 도선대사가 세운 것이다. 무학은 길을 고쳐 만경대에서 정남쪽으로 맥을 따라 바로 백악산 아래에 당도하여, 마침내 궁성의 터를 정하게 되었는데 곧 고려 때에 오얏을 심었던 곳이다. 이상은 한양천도 이유의 풍수학적 통설로 되어 있으나 경제적 측면의 이유는 무엇이었겠느냐 하는 것은매우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경제적 측면에서 한양천도의 필요성은 조운(漕運: 배로 운송)의 이점(利点)이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고 보겠다. 이 당시의 조운(漕運)은 국가재정과 직결되어 있었으므로 송도는 고려말기부터 예성강에 모래가 쌓여 조운(漕運)에 대단한 불편을 겪어왔기 때문에 전국을 대상으로 하여 조운(漕運)이 편리한 곳이 이성계로서는 절실한 문제였을 것이다. 이성계가 성석린, 김한, 이괄 등에게 명하기를 조운(漕運)의 편부(便否), 도로의 험이(險易)를 등을 깊이 살피라고 하므로써 조운(漕運)을 도읍후보지 선정의 기준으로 삼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한 나라의 수도를 결정함에 있어 교통 문제는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그 당시 우리나리는 육운(陸運)보다 해운(海運)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었으므로 수운(水運)의 조건이 송도보다 한양이 유리했다는 것이 한양천도의 경제적 이유였다고 볼 수 있다. 이 당시 한양 시가지계획에 있어서 지배적인 사상은 풍수지리설이었다. 즉 진산(鎭山)인 백악(白岳)을 중심으로 좌청룡 우백호를 따라 성(城)을 축조하여, 이를 안산인 남산에 연결하여(약18킬로) 도성의 범위를 결정한 다음, 백악(白岳)을 배경(背景)으로 주궁(主宮)인 경복궁을 앉히고, 부주산(副主山)격인 응봉(鷹峰)을 배경으로 창덕궁을 배치한 다음, "좌묘우사(左廟右社), 전조후시(前朝後市)"의 원칙에 따라 경복궁 동쪽에 종묘를, 서쪽에는 사직(社稷)을 배치했고, 경복궁 전면에는 육조(六曹)를, 그 후면에는 시전(市廛)을 배치하게 된 것이다. 절대왕권사회에 있어 왕이 곧 국가임은 말할것도 없지만 왕의 말은 곧 법이었기 때문에 도성건설이나 시설배치에 있어서도 어디까지나 왕궁을 중심으로 한 종묘와 사직의 위치가 중요시 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수도는 곧 국가요, 국가는 수도의 성쇠에 좌우된다고 생각하여 신도(新都)의 건설을 서둘렀지만 인력의 동원 및 건설자재조달의 차질과 한발에 의한 흉년 등의 악조건이 겹쳐, 수도로서의 체모를 갖출 정도의 건설이 끝난 것은 역사(役事)를 시작한 1394년(태조3)에서 28년 후인 1422년(세종 4)의 일이었다. |
경복궁(景福宮)이란 이름은 1395년(태조 4) 정도전(鄭道傳)이 지은 것이다. 시경(詩經)의 대아편(大雅篇)에서 인용하였다. 旣醉以酒 旣飽以德 술로써 취하고 덕으로써 배부르니 君子萬年 介爾景福 군자가 영원토록 큰 복을 누리리라 경복궁은 북궐(北闕)이라고도 했다. 창덕궁과 창경궁이 동쪽에 있어 동궐(東闕)이라 했고, 경복궁은 북쪽에 있어 북궐이라 했던 것이다. 경복궁을 그린 그림으로 북궐도(北闕圖)란 것이 있다. 고종때 중건한 모습을 그린 북궐도는 경복궁의 전체적인 규모와 전각의 배치 등을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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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궐 조감도 |
서쪽에서
바라본 경복궁 근정전 일대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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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은 국왕이
거주하며 국가의 중대사를 처리하던 곳으로 국가의
상징성을 갖는다.
그래서 궁궐을 건설할 때는 국가의 최고 지식인들과 최대한의 재력과 최고의 기술을 동원하여 건물을 조성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궁궐에는 국가경영의 철학과 당대 최고의 문화수준이 반영되어있다. |
조선시대에는 5개의 궁궐이 있었다. 조선초 서울로 천도할 때 경복궁(景福宮)을 건립한 후, 태종때는 창덕궁(昌德宮)을 별궁으로 만들고, 성종때는 창경궁(昌慶宮)을 만들었다.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소실된 후에는 경희궁(慶熙宮)을 새로 만들었고, 고종초에는 경복궁을 중건하였으며, 대한제국을 선포한 때에는 경운궁(慶運宮, 德壽宮)을 황궁(皇宮)으로 조성하였다. 각각의 궁궐은 자연의 산세와 어울린 나름대로의 특징을 가지고 있지만 기본적인 공간의 기능적 구조는 비슷한데, 가장 먼저 만든 경복궁은 유교적 전범에 충실한 전형적인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경복궁은 한반도에서 가장 좋은 명당자리에 해당한다. 백두산에서 발원한 대간맥이 한북정맥(한북정맥: 광주산맥)의 간맥(간맥)으로 뻗어내려 도봉산을 이루고 북한산에 이른다. 그래서 북한산 줄기의 북악산(北岳山)은 경복궁의 주산이 되어 백두산 정기를 전한다. 또한 낙산(駱山)과 인왕산(仁王山)이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로서 경복궁을 감싸안고 남쪽에는 목멱산(木覓山 : 남산)이 살짝 가려주어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光化門)을 들어서면 홍례문(弘禮門)과 영제교(永濟橋)란 다리를 건너 여러 채의 건물이 일렬로 배열되어 중심축을 이루었다. 맨앞에 있는 근정전(勤政殿)은 경복궁의 정전이었다. 정치를 부지런히 한다는 의미를가진 근정전은 국왕이 관료의 조회를 받고 국가의 중요 의식을 거행하는 중심건물이다. 그래서 근정전은 가장 공력을 들여 만든 건물로 근엄함과 우아함이 조화된 품격을 갖추고 있다. 커다란 규모의 2층 건물이면서도 살짝 치켜올린 처마가 북악산과 어울려 우아한 자태를 갖추었고, 다양한 문양의 월대와 다포식 공포로 화려한 멋을 내었으면서도 중심건물로서의 장중한 기품을 잃지 않았다. 건물 내부도 더없이 화려한데 호사스런 닫집 아래에 임금의 자리인 용상(龍床)을 두고 용상뒤에는 왕조의 만수무강을 상징하는 일월오악병풍(日月五岳屛風)을 둘렀다. 또한 회랑으로 둘러진 앞마당에는 품계석을 두어 정1품부터 종9품까지의 문무관료들이 조회하게 하였다. 근정전 뒤로는 국왕이 평소에 집무하던 사정전(思政殿)과 국왕의 침소인 강령전(康寧殿), 왕비의 침소인 교태전(交泰殿)이 일렬로 배치되었다. 국왕과 왕비가 거주하던 이들 건물도 일제때 거의 헐렸지만, 교태전의 후원이었던 아미산(娥媚山)의 아름다운 굴뚝은 세련된 궁중문화의 멋을 지금껃 자랑하고 있다. 지금은 빈터로 남아있는 근정전의 동쪽구역은 세자를 비롯한 왕자들이 거주하던 곳이었다. 동양사상에서 해가 뜨는 동쪽은 양(陽)을 의미하기에 세자는 동쪽에 살았고, 그래서 세자를 동궁(東宮)이라 불렀던 것이다. 동쪽구역에서 바깥으로 통하는 문은 왕족과 상궁들이 드나들었는데, 동쪽은 봄을 의미하므로 건춘문(建春門)이라 이름하였다. 지금의 프랑스문화원부근에 왕에 대한 간쟁을 담당하는 사간원(司諫院)을 두었던 것은 혹시라도 외부인이 왕실과 내통하는 것을 경계하기 위함이었다.또한 근정전의 서쪽 구역에는 여러 관청이 있었다. 왕의 비서 기구인 승정원을 비롯하여 학술기관인 홍문관 등 국왕과 수시로 접하는 관청이 이곳에 있으면서 국왕을 보좌하였던 것이다. 이곳도 일제때 모두 헐렸는데, 현재 남아있는 수정전(修政殿)은 왕실 활동을 지원하고 궁궐을 유지하는 관서이다. 수정전 뒤쪽에는 연회를 베풀던 경회루(慶會樓)가 있다. 경사스런 만남이라는 이름대로 임금과 신하가 이 누각에서 연회를 베풀면서 군신간의 정을 돈독히 하였던 것이다. 임금과 신하가 공식적인 업무에서 벗어나 정감을 나누던 장소이기에, 경회루는 간결한 형태의 커다란 누각이면서도 연못에 떠있는듯한 모습이 육중한 무거움보다는 정취어린 품격을 느끼게 한다. 태종때 만든 경회루는 기둥에 용을 조각하여 물에 비쳐 꿈틀대는 용기둥이 장관이었다고 하는데, 고종때 중건할 때에는 바깥기둥은 땅을 상징하여 사각으로 만들고 안쪽기둥은 하늘을 상징하여 둥글게 만드는 등 동양의 전통적 사상을 반영하였다. 서쪽 구역에서 바깥으로 통하는 문은 영추문(迎秋門)이다. 서쪽은 가을을 뜻하기에 가을을 맞이한다는 이름을 붙인 영추문은 일반 관료들이 출입하였다. 영추문 바깥에는 궁궐의 물자를 조달하는 여러 관청이 있었다. 한편 근정전의 뒤쪽은 왕족이 거주하던 구역으로 왕족과 궁인 이외에는 출입할 수 없는 곳이었다. 지금은 몇채의 건물외에는 잔디밭이 대부분이지만 예전에는 담장으로 첩첩히 구획되어 건물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유교적 명분론이 엄격했던 조선시대에는 각각의 주거공간은 담장으로 구분되었고 활동공간도 엄격히 제한되어 있었던 것이다. 현재 남아있는 대표적인 건물은 자경전(慈慶殿)이다. 고종이 대왕대비인 조대비(翼宗妃)를 위해 지은 자경전은 경복궁에 남은 유일한 왕비의 침소여서 왕비의 주거생활을 추측할 수 있게한다. 중앙에 커다란 대청과 좌우에 넓은 온돌방을 두고 옆쪽에 누마루를 두었으며 앞뒷면에는 툇마루와 좁은 온돌방을 두었다. 자경전을 둘러싼 행랑과 담장도 아름다운 무늬로 장식하였는데, 특히 불로장생을 기원하는 십장생(十長生)문양을 장식한 굴뚝은 조선시대의 세련된 조형미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한편 경복궁의 북쪽 가장 깊숙한 자리에는 건청궁(乾淸宮)이 있었다. 고종이 대신들에게도 알리지 않고 비밀리에 지은 건청궁은 고종과 왕비의 거처로 이용되었는데, 을미사변때 명성왕후 민비가 일본 낭인들에게 무참히 살해된 곳이다. 이곳의 건물도 일제때 모두 헐리고 지금은 "명성황후조난지지"(明成皇后遭難之地)"라 새긴 표석만이 당시의 치욕을 말해주고 있다.건청궁의 남쪽에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정자로 유명한 향원정(香遠亭)이 있다. 지금은 연못의 남쪽에서 정자로 통하는 다리가 있지만 원래는 건청궁에서 건너는 북쪽에 다리가 있었다. 다리 건너 연못안 작은 섬에 함초롬히 서있는 향원정은 왕족 여인들의 정감어린 취향을 그윽히 풍기고 있다. 경복궁에서 뒤로 나가는 문은 신무문(神武門)이다. 동양사상에서 북쪽은 음습한 기운이 감도는 방향이었기에 신무문은 평상시 닫아두고 특별한 경우 외에는 열지 않았다. 신무문을 나서 지금의 청와대자리에는 경복궁의 후원에 해당하는 경무대(景武臺)가 있었다. 서울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이곳에서는 국왕이 몸소 농사를 짓는 친경(親耕)을 행하고 인재를 선발하는 과거를 시행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경복궁은 엄격한 규범의 왕실 문화를 간직한 최고의 궁궐이었다. 그런데 일제는 조선을 식민지로 만든 후 민족적 자존심을 말살하기 위해 국가를 상징하던 경복궁을 무참히 파괴하였다. 정문인 광화문부터 근정문 앞까지 모두 허물어 버리고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었으며, 경무대에는 총독의 관저를 지었다. 또한 강령전, 교태전 등 대부분의 건물도 철거하여 빈터로 만들었고, 을미사변의 현장인 건청궁을 철거하여 만행의 자취를 지우려 하였다. 그리고는 각지의 절과 절터에 있던 탑과 부도 등을 경복궁으로 옮겨놓아 경복궁의 유교 전통을 훼손하였다. 광복 50년이 되는 근년에 와서 경복궁 복원사업이 한창이다. 조선총독부 건물을 해체하여 근정전도 제 모습을 찾았고, 일제때 파괴된 건물의 복원도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북악산과 어울린 경복궁의 자연환경과 경복궁에 어린 역사문화적인 전통을 몸으로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인 경복궁은 고층빌딩에 둘러싸여 또다른 형태의 일그러진 모습으로 변해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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