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녕전<강녕전의 다섯 건물: 1.강녕전 2.연생전 3.경성전 4. 연길당 5. 응지당> 왕의 침전과 왕비의 침전을 따로 만들어 남북축 선상에 앞뒤로 배치하였다. 왕의 침전은 대침(大寢인 강녕전과 소침인 연생전, 경성전, 연길당, 응지당 등 다섯 채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연생전과 경성전은 강녕전의 앞쪽에 동서 대칭으로, 건물의 전면이 동서쪽으로 마주보도록 배치되었다. 이와 달리 연길당과 응지당은 남향한 채 강년전 배후 좌우에 대칭으로 배치되었는데, 두 건물의 앞퇴칸은 강녕전의 뒤퇴칸과 복도로 연결 되어있다. 그런데 <강녕전진찬도>(1867)나 <진찬의궤도>(1897)의 <강년전도>에 의하면 연생전과 경성전의 뒤퇴칸도 강녕전의 앞퇴칸과 복도로 연결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흠격각으로 통하는 출입문을 응지당 앞퇴칸에 붙인 것으로 보아 흠경각이 지극히 내밀한 위치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왕의 침전은 대침, 대전 등으로도 부르며, 이를 모시는 환관들의 거처를 대전장방이라고 한다. 창건 초기에는 연생전과 경성전만이 강년전을 보좌하는 삼전 형식이었으나 고종 때에 와서 연길당과 응지당이 추가되어 오전 형식으로 변모하였다. 그리하여 천문의 오제좌를 상징하기도 하고, 우주 만물의기본 구성 요소인 오행을 뜻하게도 되었다.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 앞에는 앞퇴칸 좌우에 이어 지은 곁채와 동행각, 서행각과 남행각을 둘러싼 비교적 작은 중정이 있다. 정전과 편전이 접속된 부분에서 폭을 감소시킨 동서행각은 다시 강녕전 일곽과 교태전 일곽이 접속된 부분에서 폭이 크게 감소되어 있다. 이러한 행각 폭의 감소는 각 영역을 중정 크기에 반영하여, 공적인 정치 활동이 이루어지는 영역과 왕실의 사적인 거주 지역을 적절하게 나눈다. 교태전 후방에는 경회루터에서 파낸 흙을 쌓아 만든 가산, 곧 아미산이 있는데, 자연의 풍요로움을 제공하도록 설계되었다. 왕비의 침전은 중전 또는 중궁전이라 부르는데, 왕위를 계승할 왕자가 잉태되는 산실이기에 왕조 사회의 근본을 출발시키는 장소라 하여 교태나 양의 등의 이름을 붙였다. 한편 교태전 바로 서편에 지어진 함원전은 교태전을 보좌하는 소침전을 보인다. 침전 구역은 1차 복원 계획의 대상으로 이미 준공되어 1996년부터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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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녕전의 다섯 건물
1. 강녕전 2.연생전 3.경성전
4. 연길당 5. 응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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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녕전 경복궁은 왕이 정무를
보는 치조, 왕과 왕비의 침전인 연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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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녕전 발굴 모습 강녕전 사정전을 보면 향오라는 문이 나온다. 그 문을 들어서면 정면 11간 측면이 5간 해서 55간이나 되는 큰 건물이 보인다. 경복궁의 연침 강녕전이다. 동서 양쪽에 각각 하나씩 거느린 건물들 동소침,
서소침과 함께 행각으로 둘러쌓여 있다. 동소침의
이름이 연생전이고, 서소침의 이름이 경성전이다. 왕은 늘 곤룡포나 면류관과 같은 화려하고 거추장스러운 복장을 하고 산것은 아니다. 평복으로 일상생활을 하고 쉬기도 하였다. 왕이 그렇게 일상생활을 하는 궁궐의 건물을 연침, 침전 또는 연거지소라고 한다. 왕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은 이 강녕전을 들어야 한다.그 중 연침은 가장 중심인 내전 구역이다.
강녕전의 뜻 "홍범 구주의 오복 가운데 세번째가 강녕입니다. 무릇 백성의 왕이 된 분이 마음을 바르게 하고 덕을 닦음에 -황극 왕으로서의 기준과 법도-를 세우면 오복을 향유할 수 있습니다.그래서 연침의 이름을 오복 가운데 하나인 강녕으로 붙였습니다." 강녕은 수, 부, 강녕, 유호덕, 고종명의 오복 가운데 세번째로서 전체를 대표한다. 왕으로서 왕답게 마음과 덕을 닦을 때 저절로 향유하게 되는 결과라는 것이다. 이러한 철학은 강녕전 좌우의 연생전과 경성전으로 가면 왕이 천지 자연의 순리를 따라 인과의 덕을 지녀야 한다는 데로 확장된다. "천지 자연이 만물에 대해서 봄에는 생겨나게 하고 가을에는 이루게 하였습니다. 성인이 만민에 대해서 인으로써 생성하게 하고 의로써 제도를 갖춥니다..... 그래서 동소침은 연생이라 하고 서소침을 경성이라 이름하여 전하께서 천지 자연이 만물을 생성하는 것을 본받아 그 정령을 밝히 하심을 드러내려 하였습니다 강녕전의 역할 강녕전은 사랑방 구실도 하였다. 이곳에서 왕은 평상시 독서나 사색을 즐기기도 하고, 왕실 종친들이나 신하등을 만나기도 하였다. 이 때는 주로 소침을 많이 이용하였다. 왕은 내전에서 사사로이 신하를 볼 때도 혼자서 만나지 않았다. 사관 없이는 혼자서 신하를 만나지 않는 것이 궁중 법도였다. 장인도 혼자 만나지 않았다. 모든 것을 공개하여 투명한 행정을 펼친 것이다. 강녕전에서는 잔치도 하였다. 왕은 통치자이면서 한 집안의 가장이기도 하였다. 가장으로서 왕은 때때로 왕실 종친들을 모셔다가 잔치를 베풀었다. 왕비나 세자가 생일을 맞으면 잔치를 벌이기도 하였다. 강녕전에는 넓은 대청 마루와 시원하게 펼쳐진 월대가 있다. 이 곳에서 왕은 잔치를 벌였다. 조선 왕조 실록을 보면 세종 대왕이 예조에서 좋은 술 50병과 소. 양. 기러기. 오리 등 물건을 진상하자 무희와 악공을 강녕전으로 불러 용비어천가를 연주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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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생전(동소침)
강령전 동쪽에 있는
부속건물. 일제때 파괴된 것을 최근에 복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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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전(서소침)
강령전의 서쪽의 부속건물.침전(寢殿)인 강령전의 동서 양쪽에는 소침(小寢)을 두었는데 동소침은 연생전이고 서소침은 경성전이다. 소침의 이름도 정도전이 지었는데, "천지의 생(生)과 성(成)을 본받아 정치를 밝게 한다"는 의미에서 연생전과 경성전이란 이름을 지었다. 일제때 파괴된 것을 최근에 복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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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길당(연생전 뒷편) | 응지당(경성전 뒷편) |
![]() 강령전의 부속건물. |
![]() 강령전의 부속건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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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태전
교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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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태전은 왕비의
정침이다. 교태전의 동측에는 원길헌이, 원길헌과 함흥각, 그리고
행랑은 방과 청, 부엌으로 구성되었으며 일제 강점기에 철거되었던 것을 1994년에 복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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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의 중심축에 일직선으로 배열되어 있는 건물들 가운데 마지막이 교태전이다. 강녕전의 뒤로 가면 양의문이 나오는데 교태전은 그 문 안에 있다. 강녕전이 왕의 침전이라면, 교태전은 왕비의 침전이자 시어소다. 왕비는 공인이다. 궁궐안에 살면 내명부를 비롯한 여러 층의 여인들을 치리하는 일 등 업무가 적지 않다. 교태전은 용마루가 없다. 강녕전에도 용마루가 없고 창덕궁의 대조전, 창경궁의 통명전에도 용마루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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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원전 (교태전의 부속 건물,교태전 왼쪽에 위치 )
침전은 용마루가 없다. 왜 왕은 용이다. 다음 대를 이을 용을 생산하는 곳이므로 용이 위에서 이를 내리 누르면 안 되기 때문에 용마루를 설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교태는 태는 주역의 괘 이름이다. 태는 아래가 건 위가 곤으로 건은 하늘, 남자, 밝음, 위로 솟음을 상징한다. 괘는 땅, 여자, 어두움,아래로 가라앉음 등을 상징한다. 불합리하다. 이것은 지나치지 말고 서로 합하라는 것이다. 교태전에 들어가는 문이름도 "교합"이다. 남녀가 서로 만나 생산을 잘 하라는 뜻이 있다. 교태전 가장 은밀하고 중심부에 있는 이 곳이 중전이다. |
![]() 아미산 |
복궁의 중전 교태전 뒤 이제 더 이상 건물이 이어지지 않고 산이 나온다. 이름은 아미산이다. 이것은 경회루 연못을 파면서 나온 흙을 옮겨 쌓은 인공산이다. 조그만 둔덕이다. 이 산은 백두대간의 백두산에서 지리산을 향하여 오다가 금강산 못 미친 평강 땅에서 남방으로 한 갈래 오니 이거이 한북정맥이다. 그리고 우뚝솟은 산이 북한산이요 남으로 내려와 솟은 봉우리가 백악산이요 그 끝이 아미산이다. 예전 왕비가 살때는 온각 기화요초를 실었으리라. 괴석이라 한다. 석지가 있는 윗단에는 굴뚝 네 기가 서 있다. |
붉은 벽돌을 육각형으로 사람 키 한 길 반은 되게 쌓고 그 위에 둘레를 돌아가며 기와를 얹고 가운데에는 집 모양으로 연기 빠지는 구멍 연가를 만들어 놓았다. 면 마다. 귀면이나 봉황등의 벽사상, 십장생, 사군자, 만자문, 당초문 등을 길상을 구워 박아 넣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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