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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원정(香遠停)-내전 뒤편에 있는 후원

 

  향원지는 내전 뒤편에 있는 후원으로서 경치가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물 위의 비치는 향원정의 그림자는 환상적이다.

이 향원지는 장엄한 경회루와 달리 대체로 아늑하고 아담한 분위기가 묻어난다.

주로 향원정은 주변의 원림을 즐기기 위한 유휴처로서의 의미를 지니며 향원정은 그 자체가 감상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다. 정자는 그 위에 올라 주변 경치를 즐기면서 쉬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정자의 정(亭)은 곧 정(停)이다. 사람이 머무르고 쉬는 곳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향원정만을 구경할 수 밖에 없다.

  향원정은 오후가 되면 온통 하얀 색이 된다. 경치가 아름다와서 일까 많은 신혼부부들이 여기에서 사진 촬영을 한다. 그냥 두어도 한 폭의 그림이 되니 사람들이 좋아할 만하다. 경회루가 남성적이라면 향원지는 아늑하고 매우 여성적이다. 이 곳은 왕실 전용의 휴식공간이었다. 향원지의 모습도 역시 경회루와 마찬가지로 사각형을 이루고 있지만 끝 모서리가 둥근 부드러운 사각형이다. 예로부터 우리들의 연못은 이처럼 네모랗고 그 안의 섬은 둥근 형태를 띄었다. 이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져 있다는 동양사상을 반영한 것이다. 향원지도 연못 한 가운데 네모란 섬을 두었다. 그리고 그 섬에 육각형의 정자를 지어 그 이름을 향원정이라고 지었다. 향기가 멀리 퍼져나간다는 뜻이다. 정자는 둥근 섬 한복판에 네모난 기단을 두고 그 위에 돌기둥을 낮으막하게 세운다음 2층의 누각식으로 꾸민 것이다. 1층에는 평범한 난간의 툇마루를 두었고,2층에는 닭다리 모양의 난간을 두른 툇마루를 두었다. 그리고 각 칸마다 예쁜 나무 창살들을 달아 멋을 냈다. 처마는 겹처마이며 육각형의 지붕을 올라가서 가운데 꼭대기에 추녀마루들이 모이는 곳에 절병통을 얹어 치장하였다.
향원정은 취로정이라 불리던 정자를 1873년 건청궁을 지을 때 다시 손을 본 것이다. 또한 향원정을 연결하고 있는 다리를 취향교라 하는데 이도 지금과 달리 건청궁이 있었던 북쪽으로 나 있었던 것이다. 이 취향교는 6,25전란으로 불타 없어졌고 지금의 남쪽으로 난 다리는 1953년에 만든 것이다. 건청궁이 없으니 그리로 놓기보다는 편의를 위하여 남으로 논것이다. 또한 이다리 쪽에서 보면 향원정 머리 위로 북악이 걸쳐 보이는데 그것이 보기 좋아 그랬을런지도 모르겠다.

 

향원지의 구조

향원지는 네모나고 가운데 있는 섬은 둥그렇다. 이는 하늘은 둥그고 땅은 네모져 있다는 동양 사상을 반영한 것이다. 네모난 땅을 상징하는 연못은 둘레가 네모나게 파져 있고 하늘을 상징하는 섬은 둥글게 만들어져 있다.

 

향원정의 구조

향원정은 2층의 정자이다.
이 건물은 정육각형으로 지어졌고 아래, 윗층의 크기가 같다. 받침이 되는 바닥돌 기단 위에 육각형의 주춧돌이 있고, 그 위에 1,2층을 꿰뚫는 여섯 기둥을 세웠다.

향원정은 각 칸마다 예쁜 나무살창들을 달아 멋을 냈다. 처마는 겹처마이며 육각형의 지붕으로 올라가서 가운데 꼭대기에 추녀마루들이 모이는 곳에 절병통을 얹어 치장하였다.

향원정은 취로정이라 불리던 정자를 1873년 건청궁을 지을 때 다시 손을 본 것이다.

 

 취로정

세조실록에 의하면 세조 2년(1456)에 취로정이란 정자를 짓고 주변 연못에 연꽃을 심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 취로정이 향원정의 전신으로 생각된다. 향원정은 임금과 신하의 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한 만남의 장소로도 쓰였다. 이 곳에서 임금이 공을 세운 신하를 위로하기도 하고, 때로는 군신이 함께 단출한 시회를 베풀기도 하여다. 주변의 아름다운 경관을 감상하면서 풍류를 즐기고, 돌아가며 시 한 수씩을 읊었던 것이다.

 

 물을 대는 장치

 

이 사진은 향원정에 물을 대는 장치이다.
이 장치는 북악산에서 흘러온 차가운 물이 곧바로 연못에 흐르게 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일단 돌로 만든 물통(수조)에 들어온 물은 방향을 동쪽으로 바꾸었다가 다시 돌판 속에서 남쪽으로 바꿔 연못으로 흘러간다.(서류동입의 명당수 개념)
그 사이 물은 온도가 높아지고 세기가 줄어든다고 한다.

향원지를 채운 물은 향원지
남쪽 함화당과 집경당 땅 밑을 지나 나타나고 숨다가
경회루 연지 동쪽 호안의 용두의 입을 통해 연못으로 흘러간다.

이렇게 한 까닭은 그냥 물이 흘러 들어가면 아주 차고 세찬 물이 물고기를 놀라게 하는 데다가, 풍수지리에서 명당수는 서쪽에서 흘러 들어와 동쪽으로 들어가야 좋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향원지에는 열상진원 (차고 맑은 물의 근원이라는 뜻)이 라는 샘이 있는데, 이 샘은 경복궁 창건 당시부터 있던 샘으로 물이 맑고 차서 궁궐안의 우물로 이용하였다.

 

샘의 물은 향원정 연못인 향원지로 들어가는데, 샘에서 솟은 물이 두번 꺽여서 연못으로 잔잔히 흘러들도록 만들었다.

우물의 뚜껑 및 "열상진원"(열上眞源)이란 각자는 경복궁 중건때 만든 것이다.

 

신무문은 경복궁의 북문으로, 북방의 현무(玄武)에서 따온 이름이다.1433년(세종 15)에 지은 후 임진왜란때 소실되었다가 고종때 중건하였다. 높다란 석축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문루가 있다.

  신무문 밖은 경복궁의 후원으로 북악산으로 연결된다. 북악산 기슭의 융문당(隆文堂), 융무당(隆武堂)에서는 문과, 무과 등 과거를 시행하기도 했고, 내농포(內農圃), 경농재(耕農齋)에서는 국왕이 몸소 농사를 지어보이기도 했다. 뒤쪽의 경무대(景武臺)는 국왕이 군사 훈련을 검열하던 곳이다.

경복궁 후원도 일제때인 1927년 융문당 융무당 등을 허물고, 조선총독의 관저를 지었다. 조선 총독의 관저는 정부수립후 대통령 관저로 쓰이며 경무대로 불리다가 1960년 사일구혁명이후 청와대(靑瓦臺)로 바뀌었다. 조선총독의 관저는 계속 사용하다가 1993년에 철거하였다

신무문 밖

궁성 북문 밖 북악산 남쪽 중턱 아래 무예 시험을 보던 융무당

 

문과 시험을 보던 융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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