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의 창건배경과 임난후의 창덕궁    목록가기      

 

 

 창덕궁의 창건 배경

  1392년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후, 1394년에 한양을 도읍지로 정하고 경복궁을 중건한다. 그러나 새 왕조의 주도권을 놓고 왕조 개창의 주역들 사이에서 다툼이 일어났다.

 싸움은 재상이 실질적인 주도권을 행사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던 신흥사대부의 핵심인물 정도전과 국왕이 명실상부하게 주도권을 장악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던 왕실의 핵심인물 이방원으로 압축되었다.

 이 싸움은 결국 1398년 (태조 7) 8월 이방원이 태조의 후계자로 후비 소생 방석을 세자로 세워 후원하던 정도전 등을 살해한 이른 바 '제1차 왕자의 난(방석의 난)'으로 폭발하였다. 이른 바 '제1차 왕자의 난'은 왕자들 사이의 대립이기 보다는 이방원과 정도전의 대결이 폭발한 것이었다.

 제 1차 왕자의 난으로 태조는 왕위를 둘째 아들 정종에게 물려주고 상왕(上王)으로 나 앉았다. 정종은 즉위한 지 다섯 달이 되는 1399년 2월 개경근방에 있는 자신의 생모 신의왕후 한씨의 능인 제릉에 참배하러 갔다가 그대로 개경에 머물렀다. 실질적인 개경환도였다.

 이방원은 개경에서 자신과 경쟁관계에 있던 형 방간을 제거하는 이른 바 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세자가 되었다. 세자가 된 이방원은 실질적인 권한을 장악하고, 부왕 태조와의 관계를 개선하는 등 정지 작업을 한끝에 1400년 11월 결국 정종에게서 왕위를 넘겨받았으니 이가 태종이다.

 태종은 즉위하면서 바로 태조의 뜻을 받들어 한양으로 재천도를 강력하게 추진 하였다. 그러나 신료들의 반대도 만만하지 않았다. 이에 태종은 집요하게 재천도를 추진하던 끝에 1404년 (태종4) 10월에는 직접 재천도의 후보지의 하나였던 무악을 둘러보러 나섰다.

  그러나 이때 태종은 마음속으로 이미 한양으로 갈 것을 정해 놓았기에 무악을 둘러본 것은 단지 반대 의견을 재압하기 위한 요식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태종은 종묘에 들어가서 세 후보지 , 곧 개경, 한양, 무악의 길흉을 점쳐 정할 것이니 결정된 뒤에는 이의를 달지 말라고 뒷다짐을 하고 측근 다섯사람만을 데리고 종묘에 들어가 동전을 던져 점을 쳤다.

 결과는 한양이 2길 1흉, 개경과 무악이 모두 1길 2흉이었다. 태종은 의논이 정해졌다고 발표하였다. 그러고서는 마침내 향교동 동변에 궁궐자리를 정하고 새 궁궐 - 이궁(離宮)을 짓도록 명하였다.

  종묘에서 점을 치겠다고 한 것, 점치는 방법으로 돈을 던지는 것을 택한 것, 점의 결과가 한양이 길한 것으로 나온 것 모두가 우연이 아니라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부왕 태조와 그리고 자신의 몇몇 측근들과 말을 맞춘 것으로 보인다.

  점의 결과가 나오자마자 천도지를 확정짓고 궁궐 자리를 정한 것은 이의를 제기할 틈을 주지 않으려는 의도로 보인다. 사실 당시 주요 관심사는 한양으로 재천도하는 것이었는데 그 기세에 끼워 넣어 새 궁궐 - 이궁을 짓게 한 것도 주목할 대목이다.

  경복궁이 엄연히 있는데도 새로 이궁을 짓도록 한 태종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이를 짐작할 만한 뚜렸한 단서가 없으므로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려우나 태종 왕권의 정통성의 한계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경복궁은 태종 자신이 정적 정도전과 이복 동생들을 죽였던 현장이다. 될 수 있으면 덮어두고 싶은 과거를 자꾸 일깨우는 경복궁으로 임어 하는 것은 태종으로서는 달가운 일일 수가 없었다.

  이렇게 한양 천도와 이궁 조성이결정되자  먼저 한양으로 이어하였고, 그 한달 뒤에 태종도 한양에 도착하였다. 이 때 한양은 도시 기반 시설, 특히 주택이 부족하였으며, 궁궐도 미처 완공되지 않은 상태여서 태종이 연화방에 있는  조준의 집에 임시로 머물정도였다.

  새 궁궐은 1405년(태종5) 10월 19일에 가서야 완공되었다. 이 때의 재천도로 한양은 명실상부한 조선의 수도로서 지위를 굳히게 되었고, 조선 왕조는 본격적으로 체제를 정비할 기초를 마련하였다. 궁궐 경영의 측면에서 보자면 창덕궁의 영건은 법궁에 대해서 이궁의 완성이요, 조선왕조 최초의 법궁 - 이궁 양궐 체제가 이루어졌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임진왜란 후의 창덕궁

  임진왜란 당시 정궁인 경복궁역시 왜군의 방화로 잿더미가 되었으므로 전란 후 제일 먼저 경복궁을 중건해야 마땅하였으나 도참가 이국필이 풍수지리설을 내세우며 , "경복궁 자리는 불길하니 창덕궁을 중건해야 마땅하다." 고 주장함에 따라 ,1607년 (선조40)에서 서둘러 착수한 창덕궁의 중건은 1612년 (광해군3)에 마무리되었다. 이 사실은 [궁궐지]와 [한경지략]에 밝혀져 있다.

  그 이후로 경복궁은 줄곧 폐허로 버려졌다가 겨우 1867년(고종4)에 복구되고 보니, 그 때까지 창덕궁은 273년 동안 정궁 구실을 해왔다.

 그러나 창덕궁도 복원된 지 불과 12년 만인 1623년에 인조반정으로 인정전만 남고 모든 정각이 불에 타 버리는 비운을 겪었다.

 그 후 1647년 (인조 25)에야 대조전, 선정전, 희정전, 묵정당, 집상전, 보경당, 옥화당, 태화당, 연화당, 징광당 등이 중건되었다.

 이어 만수전, 춘휘당, 천경전 등이 1656년 (효종7)에 새로 지어졌고, 정조 연간에 와서 1776년(원년) 후원에 규장각, 즉 오늘의 주합루가 1782년 (정조6)에 중희당이 , 1785년에 수강재가 창건되었다.

 그 후 순조 연간에는 화재가 잦아 인정전도 1803년 (순조3)에 불에 타서 다음해에 복구되었다. 지금 남아 있는 인정전이 이때 지은 건물로 190년 된 것이다.

 그 후 1811년(순조11)에 예문관(藝文館)과 향실(香室)이 불에 탔는가 하면, 1833년에도 대조전을 위시하여 내전전부가 불에 탔으나 곧바로 다음 해에 복구되었다. 지금 창덕궁 안에 있는 낙선재가 지어진 것은 1846년 (헌종12)의 일이다.

 1910년 이른 바 경술국치라는 한일합방 후 모든 궁궐을 일제가 관리한 뒤로 1917년 11월에 상궁처소에서 불이 번져 내전 일부를 태우는 바람에 이제는 그 옛 모습을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일제는 이 화재를 좋은 기회라 여기고 경복궁의 내전인 교태전, 연길당, 함원전, 만수전, 흥복헌과 임금의 편전인 강녕전, 연생전, 경성전 동, 서 행각 및 응지당, 흠경각등 여러 전각을 헐어 낸뒤 창덕궁을 복구한답시고 교태전 재목으로는 대조전을, 강녕전 재목으로는 희정당을 꾸며 놓았다.

  그리하여 오늘날의 창덕궁 대조전은 순조시기의 대조전 모습도 아니고, 그렇다고 경복궁의 교태전 그대로도 아닌, 그야말로 일본인들이 제멋대로 만든 궁전으로 변모되고 말았다.

 한나라의 정궁을 마구 헐어 유린하는 한편으로 복구했다는 생색을 내며 창덕궁 내전을 온통 일그러뜨린 소행이야말로 의식적인 만행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저들은 그 후로도 인정전 둘레의 멀쩡한 집채까지 우리 전통 법식을 무시한 채 멋대로 개조해 버렸다. 지금 인정전 둘레의 복원 작업이 진행중인 것은 다행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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