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 천 교(錦川橋)     목록가기     

 

 

 금천교

  응봉아래에서 발원한 개천이 남쪽으로 흘러 창덕궁의 돈화문, 금호문 안으로 들어와서 명당수를 이루니 그 개울, 즉 어구를 금천이라 하며 거기에 걸친 다리를 금천교라 한다.

   정궁인 경복궁에서 광화문과 흥례문 사이를 흐르는 어구를 금천, 그 위에 걸쳤던 돌다리를 영제교라 하였고, 창경궁에서 정문인 홍화문과 명정문 사이를 흐르는 어구 옥천에 걸친 다리를 옥천교라 하듯이 이 어구와 다리들은 궁궐 형성에 있어서 하나의 법도였다.

  그런데 경복궁의 영재교나 창경궁의 옥천교는 정문에서 들어오는 주 방향으로 놓였는데 반하여 금천교는 직각으로 꺾여서 놓여 있다.

  금천교는 두 홍예(아치)를 틀어 교각을 삼고 거기에 의지하여 귀틀을 설치하고 청판들을 건너지르고, 그 좌우 가장자리에 난간을 설치하였다. 난간에는 법수와 동자를 각각 여섯씩 좌우에 세우고, 기둥 사이에는 귀접이한 돌난대를 얹었다.

 

또한 기둥과 기둥사이에는 가운데에 돌난대를 받친 연잎동자를 하나 더 배치하고 청판을 끼웠다.

  청판에도 바람구멍을 투각하는 등 정교하여 돌난간이라기보다 나무로 만든 난간 같은 느낌을 준다.

좌우 난간 안쪽 다리 바닥은 돌을 깔았다. 가운데 어도와 그 좌우의 협도 사이에 장대석 설겅돌을 세로 놓고, 어도는 한단 높게 시렁돌 사이로 장대석을 가로 건너질러 깔았다.  

 다리 위에서는 보이지 않았지만 두 홍예틀이 등을 마주 댄 교각의 남쪽변에는 높직한 대석에 정좌 정시한 해태상 돌조각을 앉혔고, 그 바로 위 두교각 사이에 끼워 맞춘 면석에도 귀면같은 신수상을 조각하였다.

 그 반대쪽 북쪽변에는 현무를 상징하는 거북 모양의 돌조각을 앉혔고, 역시 면석에 신수상을 조각하였다. 이 조각들은 불기(火氣)나 못된 귀신들을 물리치는 벽사의 상징이라고 한다. 또한 난간 법수 아래로 튀어나온 귀틀에도 조각을 베풀었다.

  길이 12.9미터, 폭 12.5미터 되는 금천교는 그 짜임새와 해태, 거북, 귀면상, 연잎동자, 청판의 풍혈 등의 조각들이 조화를 이루어 언뜻 기교가 넘친 듯하나 매우 소박한 아름다움을 담고 있다. 이 다리는 평평한 평교가 아니고 그 가운데를 활처럼 약간 구불텅하게 높였다.

 

 옥천교보다 폭이 넓고 부재의 비율도 빈틈없이 잘 짜여져서 서울에서가장 오래되고 가장 아름다운 돌다리라는 자랑을 지니고 있다.

  사실 이다리는 토목 건축에 있어서 당대의 귀재였던 박자청이 만든 뛰어난 예술작품이다.

  

 <태종실록> 11년 (1411) 3월 18일 조에,  '창덕궁에 누침실(樓寢室)을 꾸미고, 또 진선문밖에 돌다리를 놓았다. 공조판서 박자청이 감역하였다.' 라고 확실하게 밝혀져 있다.

<동국여지비고>에서는, '인정전이 대내 서쪽에 있어 그 남문을 인정문이라 하는데, 또 그 서남쪽에 있는 문을 진선문(進善門)이라 한다. 그문 곁에 신문고가 설치되어 있다. 그 앞에 도랑이 있고 그 위에 놓인 다리를 금천교라 한다.'

이 아름다운 다리를 건너면 바로 코 앞에 진선문이 있어서 그 문에 잇닿은 담장이 금천 동쪽 둑을 따라 남으로 뻗치다가 다시 동쪽으로 꺾여 둘러서 인정전을 겹담으로 감쌌다.

  그렇기 때문에 금천교에서 바라다보이는 광경이 줄줄이 잇닿은 익각과 복도로 이리저리 굽어 꺾이고 에워 둘려서 몇백 칸이 되는지 마치 하늘나라 옥경(玉京)인 듯 황홀했던 것 같다.

특히 봄철 금천 명당수에 늘어진 버들가지는 부용꽃 모양을 아로새긴 돌난간, 금천교 돌다리와 어우러져 그윽한 운치를 자아냈던 듯하다.

  이 첩첩 익각과 복도와 진선문, 숙장문이 헐린 것은 순종 황제께서 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겨 앉던 1907년의 일이었다. 이때 일본인들은 창덕궁을 수리한답시고 진선문 안 모든 시설을 헐고 인정전 남쪽 행랑까지 왜색으로 바꾸어 놓아서, 지금은 겨우 <동궐도> 그림을 통해서 옛모습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금천교의 해치와 거북이

  다리 밑을 보면 무지개 형태의 홍예 두 개를 짜고 그 중앙에 홍예 기석(基石)을 놓고 그 끝에 좌대를 마련 하였는데, 남쪽에는 해치 한 마리가 남향하여 앉아있고 , 북쪽에는 거북이(玄武) 한 마리가 북향해 앉아 있다.

 현무는 북방의  방위신이기 때문에 북쪽을 향해 앉혔고, 해치는 광화문 해치처럼 남쪽을 향해 앉힌 것이다.

  해치는 앞서 말한 바처럼 정의를 수호하고 사악한 것을 물리치는 상상의 동물로 명당수를 타고 침입하는 악귀를 방어하고 있고, 현무는 사방위신 중 북방을 지키는 상상의 동물로 해치와 함께 벽사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그런데 다리 밑에 있는 해치와 현무는 난간으로 다가가서 일부러 내려다보기 전에는 사람의 눈에 잘 뛰지 않는다.

  적어도 현대인의 상식이라면 장식 조각품은 사람들 눈에 잘 띄는 곳에 놓는 것이 당연한 일일텐데, 이처럼 잘 보이지도 않는 다리 밑에 조각상을 앉힌 마음은 무엇일까.

  이런 비슷한 예는 전라남도 승주 선암사 입구의 승선교 다리에서도 볼 수 있다. 이다리를 보면 , 아예 다리 밑 천장에 용두(龍頭)를 조각해 놓았다. 다리 밑에 내려가서 보지 않으면 이것이 있는지 조차 알 수가 없게 되어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벽사상은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장식품이 아니라 , 잡된 귀신들들을 상대하기위해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금천교 다리 아래의 해치와 거북이도 사람에게 보이든 안 보이든 상관할 바가 없는 것이고, 잡귀들을 상대로 벽사의 역할만 충실히 해낸다면 그것으로 족한것이다.

 

 

이 돌다리가 금천교(錦川橋)이다. 1411년(태종 11년)에 창덕궁을 처음 지을 때의 그 다리가 참 고맙게도 아직까지 남아있다. 다른 나무 건물들은 임진왜란, 인조반정, 1917년 대화재 등 여러 차례의 환란 때 불에 타서 계속 다시 지은 것들이다.

조선 궁궐에는 모두 금천(禁川)이라는 개울과 그 위를 건너는 금천교(禁川橋)가 있다. 풍수지리 사상의 영향으로, 명당수(明堂水)가 있어야 길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경복궁 영제교(永濟橋)와 창경궁 옥천교(玉川橋), 경운궁 금천교도 모두 그런 이유로 만든 다리다. 창덕궁 금천교(禁川橋)의 이름이 '금천교(錦川橋)'이다. 그러나 지금 금천에는 물이 흐르지 않는다. 이 개울을 늘 채워주던 물은 아마도 인근 주택가 하수도와 연결되어 다른 어디론가로 열심히 흘러가고 있으리라고 짐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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