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 선 문(進善門)    목록가기      

 

 진선문

  진선문은 대문인 돈화문(敦化門) 다음에 나오는 일종의 중대문이다. 돈화문과 인정문 사이에 다시 한 번 문을 만들어 놓은 것은, 창덕궁 정전(正殿)인 인정전의 권위를 높이기 위함이다.

 1908년 탁지부 건축사무소에 의해 시행되었던 인정전 개수공사 때 헐렸던 것을 1996년 복원을 착수, 둘레의 긴 회랑들도 같이 복원, 1999년 완공하였다.

  진선문에는 억울한 일이 있는 백성이 와서 치면 왕이 듣고 억울한 사정을 해결해주마고 하는 큰북이 달려 있었다. 태종대에 처음 설치하였다가 중간에 유명무실해진 것을 영조대에 다시 설치하였다. 이북을 신문고(申聞鼓)혹은 등문고(登聞鼓)라고 하였다.

 

  <동국여지승람>에  '인정문 서쪽에 있는 진선문 곁에 신문고를 달았다'고 하였고,
 
   <정조실록> 22년(1798) 3월 무신 조에  '지금 창덕궁의 진선문과 경희궁의 건명문에 신문고가 가설되어 있다' 고

  한 것으로 미루어 긴 세월 동안 다소의 우여곡절은 있었으나 신문고 제도가 유지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제도는 조선왕조의 큰 자랑거리의 하나가 아니었던가 싶다, 태종 이전에는 등문고 제도가 있었으나 백성이 정치의 득실이나 슬픈 사연을 임금께 호소하고자 하여 의정부에 신고하여도 번번이 임금께 전달되지 않으므로 신문고 제도로 바꾸어 백성이 궁에 들어와서 북을 두드리면 그 소리를 듣고 임금이 직접 불러 보도록 한 것이다.

   이때 대신 중에는 먼저 임금께 말하고자 하는 사람의 신원을 알아본 다음에 북을 두드릴 수 있게 하자고 주장하는 이가 적지 않았으나 태종 임금은 단호히 우선 북을 치게 한 다음에 신분을 알아보도록 하였다.

  서울 사람이건 시골 백성이건 억울한 사정이 있으면 진선문 안의 신문고를 두드릴 수 있었던 제도가 연산군 때 한때 폐지되었던 정황이 <풍암잡화(楓岩輯話)>에 상세히 실려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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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천교를 건너면 바로 만나는 문이 진선문(進善門)이다. 일제가 없앤 것을 1997년에 다시 만들어 놓았다. 둘레의 긴 회랑들도 같이 복원했다. 진선문은 대문인 돈화문(敦化門) 다음에 나오는 일종의 중대문이다. 돈화문과 인정문 사이에 다시 한 번 문을 만들어 놓은 것은, 창덕궁 정전(正殿)인 인정전의 권위를 높이기 위함이다. 경복궁에서 이 노릇을 하는 문이 흥례문(興禮門)인데, 일제는 역시 이 문과 둘레 회랑들을 모조리 없애고는 그 자리에 총독부 청사를 지어 놓았었다.

 

진선문 처마 마루에 있는 '잡상'이다. 유몽인이 쓴 <어우야담>에는 잡상을 구성하는 것들을 설명해 놓았는데, 이들은 모두 살을 막아주는 신(神)으로 풀이되어 있다. 진선문에는 처마 마루마다 잡상이 다섯개씩 있다. 돈화문은 일곱개, 인정전에는 아홉개씩 있다. 건물 지위에 따라 잡상의 갯수도 달라진다.
한창 공사중인 진선문 옆 담벽. 지금은 기둥 사이에 '중깃'과 '외'를 촘촘히 엮어 놓은 상태다. 여기에 흙을 발라서 벽을 완성하게 된다. 이 때 쓰는 흙은 점성이 좋아야 하는데, 옛날에는 찰기가 있는 황토흙을 퍼다가 볏짚을 썰어 넣고 물을 부은 다음, 발로 잘 밟아 이겨서 만들었다.
1999년 복원 공사중인 진선문 일대의 모습. 그 앞 돌다리가 금천교이다. 폭이 아주 넓음을 알 수 있다. 사진 왼쪽, 즉 금천교 북쪽으로는 지금도 공사용 칸막이 담이 설치되어 있다. 규장각 권역 복원 공사가 2002년까지 계속될 예정이어서, 어쩔 수 없이 그 때까지는 어수선한 분위기를 참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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