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 정 문(仁政門)        목록가기        

 

 

인정문

  인정전의 남문인 인정문도 1804년에 인정전과 동시에 중건한 건물로서 <궁궐지>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이집은 2간통으로 된 2간 건물로서 내칠포 외육포이고 기둥 길이가 15척 3치, 들보 길이는 각각 13척씩이며 도리통은 어간이 15척 5치, 좌우 협간이 각각 13척 5치씩이며 좌우의 월랑이 도합 20간인데 초익공 공포양식이다.'

 

 

  인정문은 인정전의 정문으로 태종 5년(1405)에 창건한 것이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광해군 즉위년(1608)경 재건 되었다. 영조 20년(1744) 10월 승정원 화재 때 좌우 행각과 함께 소실되어 이듬해 3월에 재건되었다.

  순조 3년(1803) 12월에 선정전 서행각에서 화재가 나 인정전 등이 소실되어 이듬해 12월에 재건하였는데 이 문도 그 때 재건 된것으로 여겨진다. (보물 813호).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 구조의 겹처마 팔작 지붕이고 지붕 마루는 양성 마루이며 추녀 마루에 잡상 5구와 용두가 설치되고 용마루에는 취두가 , 사래 끝에는 토수가 설치되는 점은 돈화문과 같으나 잡상의 수가 돈화문보다 적다. 정전의 대문으로는 조선대의 궁궐이 모두 인정문과 같은 팔작지붕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인정문은 삼문이며 단층이다. 문 좌우로 행각이 있고 동행각엔 광범문이, 서행각에는숭정문이 있어 보통 때의 문무백관들이 출입한다. 이는 경복궁 근정문 좌우에 일화, 월화문이 있어 출입하게 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인정문의 편액은 검정바탕에 흰글씨로 양각하였고 선조 때의 명필인 북악(北嶽) 이해룡의 글씨라 한다. 

 인정문에서 즉위식을 거행하고 비로소 어도를 거쳐 답도를 밟고 , 인정전 보좌에 앉아 넓은 뜰의 동서로 품계석 따라 문무 백관이 도열한 가운데 하례를 받은 여섯 분 임금님의 감격과 영화는 참으로 성대 하였을 것이다.  

  한편 <국조보감>에 의하면 , 영조 19년 (1743)에 일찍이 중국 송나라 인종이 태후에게 친히 하례의를 올린 옛일을 본받고 성종 임금께서 대왕대비인 세조의 정희 왕후에게 친하를 드린 전례에 따라, 대왕대비(숙종의 계비인 인원왕후)에게 이곳 인정전에서 친하례의를 올렸고, 23년에도 대왕대비의 환갑연을 역시 인정전에서 거행하였다.

이제 진선문, 숙장문과 두문을 이어 둘렀던 담장까지 옛모습으로 복원(1995)하여 자못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

 용마루에 붙은 오얏꽃 문양은 일본인들이 해 놓은 그대로다.

 

 

 인정전에서는...   

  일찍이 이곳 인정전에서 인조 27년에 효종이 , 효종 10년에 현종이, 현종 15년에 숙종이 , 경종 4년에 영조가 즉위식을 가졌고 고종도 역시 이 곳에서 즉위하였다.

  즉위식의 절차가 임금의 자리에 오르기 위한 사전 의식인 까닭에 그 의식을 인정문에서 마치고서야 정전인 인정전으로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인정문(仁政門, 보물 제813호)은 인정전으로 들어가는 대문이다. 입구가 세 부분으로 되어있는데, 가운데는 왕이 드나드는 어문(御門), 동쪽은 문관, 서쪽은 무관들이 드나들던 문이다. 인정문과 그 옆 회랑은 일제가 홍보 전시장으로 개조하여 많이 훼손시켰었으나, 1995년에 복원해 놓았다. 그러나 용마루에 붙은 오얏꽃 문양은 일본인들이 해 놓은 그대로다.
       목록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