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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정전(仁政殿)

   인정전의 내력

  조선왕조 500년 사직의 종말을 고한 경술합방(한일합방)이라는 올가미를 쓴 비극의 장소인 인정전은 태종 5년(1405)

   창덕궁 창건과 함께 건립되었으나 태종 18년(1418) 박자청에 의해 다시 지어졌고 세종 즉위년(1418년) 9월에 준공되었다.

 이후에 임진왜란으로 소실 된 것을 광해군때 중건하고, 정조 1년(1777) 9월에 조정에 품계석을 설치한다. 몇 차례의 소실과 중건을 반복하다가 1908년 탁지부 건축소에 의해 인정전 내부를 서양식으로 개조한다.

  그 뒤 일제시기에는 인정전은 물론, 그 주변과 조정마당까지 심하게 왜곡되었었다. 현재 인정전의 모습은 1999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인정전은 창덕궁 외전(外殿)의 중심인 법전이며, 국왕의 즉위식, 외국 사신을 맞이하는 의식, 신하들의 하례 등이 거행되던 공간이다. 연산군(1494)과 현종(1659)이 인정전에서 즉위한 왕이다.

  

인정전의 구조

  인정문을  들어서면 저만치 정면으로 겹 월대 위에 드높이 2층집인 인정전이 앉혀져 있다.

  겹 월대 중에  윗월대의 길이는 45척, 아랫월대는 이보다 16척 5치가 더 길고 북쪽 낙수첨계는 10척이다. 옛기록에 의하면 , 월대위의 인정전 건물은 20간 넓이의 2층집으로 내구포, 외칠포의 다포계 공포 양식이라 하였다.기둥의 길이는 16척이고 대들보 길이는 2간 모두 15척씩이다. 앞뒤 툇간의 대들보 길이도 15척씩이다. 도리통의 어간은 20척이고 좌우 툇간은 15척씩이다.

 

         <인정전의 품계석>

        <인정전 내부 소란반자 >

                         <인정전>

 

<한경지략>에서는 중건 당시의 상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인정전은 정면 5간, 측면 4간인 2층집으로 그 앞쪽은 2단의 층계로 되어 있다. 뜰에는 가운데 어도를 사이에 두고 동서로 문관과 무관의 품석이 세로로 줄지어 박혀 있다.

이곳은 임금께서 하례(賀禮)를 받는 정전인데 순조 3년에 화재가 발생하여 이듬해 겨울에 새로 지었다.

   인정전의 현판 글씨 '인정전'은 죽석 서영보의 필체이다. 광범문이라고 하는 서쪽 문은 악원으로 통한다.'

  이설명으로 당시 인정전의 모습을 대강짐작할 수 있으나 좀더 부연하면 ,

인정전에는 18간씩 2간통으로 된 동행각 36간과 19간씩 2간통인 서행각 38간이 딸려 있다.그 양식은 초익공으로 가운데 쯤에 동행각의 광범문과 서행각의 숭범문이 나 있다.

  인정전의 공포 구성은 상하 모두 외삼출목 칠포 양식으로 기둥 사이에 공포를 배치한 다포 양식이다. 외부 쇠서받침은 삼중(三重) 앙쇠에 일수쇠 운공(雲空)으로 처리되어 있다.

  참차는 교도형이고 보머리는 삼분두이다. 기둥머리의 안초공이 살미의 밑을 받치고 있는 듯한 모습은 인정문과 는 맛이 다르나, 복합한 초각(草刻)과 다포 양식에는 시대적 수법이 잘 나타나 있다. 처마는 겹처마로 굵은 서까래와 부연이 촘촘히 뻗쳐 있다.

  인정전 내부는 3층 구조로 통고주를 세워서 매우 우람하다.

  고주에 대들보를 내려 걸고 마치 별창방처럼 운공들을 짜 둘리고 낙양각하여서 그 장식이 매우 화려하다.

 

 

 인정전 내부의 2층에는 문짝이 없지만 아래층 4면에는 칸마다 문짝이 달려 있다.

  앞쪽 어간(가운데칸)과 그 좌우 협간, 그리고 뒤편 어간 동편 한 간에도 출입할 수 있는 문짝이 있다.

   여기에는 하방은 있고 머름이 없다. 그밖의 다른 가에는 높직하게 머름을 돌렸고, 분합으로 된 광창을 달았다.

  문머름은 기둥 좌우에 세운 벽선과 문설주 아래에 따로 인방과 아랫부분의 하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문설주와 창방사이에는 교창을 설치하였다.

내부 천장은  높직하게 꾸며진 소란반자로 어간 중앙에는 아로새겨 넣은 천장이 따로 있다.

   그천장판에 뜬구름 사이를 나는 봉황이 장식되어 있는데 이것은 모두 따로따로 목각한 작품들이다.   

소란반자에는 쌍학이 구름 속에 노니는 무늬를 단청으로 칠하여서 마치 비단으로 도재한 듯 빛깔이 찬란하다.  

   내부의 고주 어간에는 운공과 낙양각을 장식하였고, 운공판 풍혈에는 보상무늬를 투각하였다.

    

 

                           
             인정전 내부        일제시대의 인정전 내부

 

 높아서 눈에 뜨이지 않을자리에도 섬세한 조각공예장식을 하였다.

  이렇게 장식한 내전의 고주 어간은 임금이 앉은 어좌로서 거기에 보개를 높게 달고 아래에는 따로 꾸민 닫집에 어좌를 놓았다.  

 원래 이보좌는 전돌을 깐 바닥위의 높직하게 앉힌 탁자 위에 놓였고, 그 뒤로 일월오악병풍을 두르고 앞에는 보란과 보계가 설치되어 있었다.

  오늘날 바닥에 널마루가 깔리고 조명기구도 근대화 되어 있는 것은 일제 시대 에 이화 무늬의 서양식 의자를 동그마니 놓았을 때 개조된 흔적이다.

   일제시대에 개조한 모양새는 얼핏 화려하게 보이지만 번잡스러워워서 도리어 장중한 기품을 뭉개 버린 꼴이 되고 말았다.

인정전의 기단이 아래위의 월대 정면에는 임금만이 오르내릴 수 있는 돌계단을 설치하였다.

   아래 월대 돌계단 앞뜰에는 삼도로 된 어도가 열렸고 그 어도 좌우 양편에 줄지어 품석이 놓였다.

   아래위 섬돌 끝마다 엎드려 있는 모양의 돌짐승조각을 장식했는데. 가운데 답도 중앙에는 한쌍이 어울린 봉황새 무늬 조각을 베풀었다.

그 양쪽 디딤돌 앞면에도 당초 무늬 조각이 베풀어져서 전체적으로 매우 화려하다.이와 같은 짜임새는 덕수궁의 중화전에 있는 것보다 훨씬 예스러운 맛을 풍긴다.

 지금의 인정전은 19세기 초에 세운조선왕조 말기 건축양식의 대표적 건물이다.전기의 건물은 임진왜란 병화에 탔고 중기의 것도 여러번 불에 탔다.

  그러나 <세종실록>즉위년(1418) 9월 10일 조에 '창덕궁 인정전이 준공되었다.'고 나와 있는 기록으로 미루어 지금의 기단 월대와 탑도 등은 세종 때의 것 그대로가 아닐까 추정된다.

   그렇다면 이것 역시 박자청의 유작이다.

 

               

         답도 : 구름속에서 봉황이 노니는 형상이다. 봉황은 '성군이 나타나거나, 성군이 다스리고 있음'을 의미한다. 성정을 베풀겠다는 왕의 의지를 드러낸 상징물이라 할 수 있다.>

        

      월대 위의 드므
'드므'는 '입이 넓은 큰 그릇'이란 뜻의 순우리말이다.  화재를 예방하기 위한 주술적 상징물이다.
 

             

              마당과 인정전 기둥의 쇠고리
행사때 해나 눈,비를 가리기 위한 차일을 치던고리.

         

월대아래의 드므
평소 물을 담아두는데 일설에 의하면 불귀신(화마)이 그 물에 비친 자기모습에 놀라 도망간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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