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 정 전      목록가기   

 

 

  선정전(宣政殿)

   선정전의 내력

  창덕궁의 정전(正殿)인 인정전은 공식적인 국가 행사를 베푸는 장소이고, 보통때는 임금이 신하들과 국가의 정치를 의논하는 곳을 편전(便殿)이라 한다.

  임금께서 평복차림으로 정무를 보살피던 편전인 선정전은, 때에 따라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집으로도 쓰였는데 경복궁으로 치면 사정전과 같은 격이었다.  

 

  

  선정전이 바로 외전에 속하는 편전이다. 따라서 건물의 구성에서도 공식적인 치장이 가미되며, 위치로는 정전의 후방에 배치되나 창덕궁에서는 인정전의 동쪽에 정전보다 뒤로 물러나 앉아 있다.  규범을 지키되 주변 환경에 적합하도록 적응시킨 것이다.

  <세조실록>7년 (1461) 12월 을유조에,  '조계청을 선정전이라 이름하고 그뒤편 동쪽 별실을 소덕당, 서쪽 별실을 보경당이라 하였다.'  고 한 기록으로 미루어 알 수있듯이 , 궁궐 건물들의  이름을 바꿀 때 조계청(朝啓廳)이라 하던 것을 선정전이라 하였다. 선정전도 임진왜란 때에 소실된 것이 광해군 때 재건되고, 인조 반정 때에 다시 화재를 당하여 인조25년(1647)에 중건되었다.

  이때에는 광해군이 창건하한 인경궁(仁慶宮)의 전각을 철거하여 그 재목을 이용함으로써 700여칸의 전각 중건을 5개월 만인 짧은 기간에 완공한다.

   이당시의 공사 내용을 기록한 [창덕궁 수리도감의궤]에는 중건되는 건물과 철거되는 건물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있으며 그 내용을 검토한 결과로는 인경궁의 광정전(光政殿) 9칸을 철거하여 선정전 9칸을  중건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인조실록> 25년 11월 무신조에
'임금께서 창덕궁으로 옮겨 드시니 수리할 때 많은 집채가 옛 제도대로 재건되어서 대내에서 특히 대조전 , 선정전, 희정당, 묵정당.....과 징광루등이 더욱 장려하였다.'

라는 기록을 통해서 선정전이 이때에 다시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지금 남아 있는 선정전이 다포계의 공포와 내목, 겹처마의 꾸밈새로  되어 있어서 어쩌면 인조 때의 건물 구조 그대로인 것 같다는 견해도 없지 않다.

 

그 뒤의 선정전의 변천에 관해서는 현종 15년(1674) 7월에 건물이 손상된 것을 고치라는 분부가 있었으나 봄부터 앓아온 질병으로 8월 18일에 현종이 승하하였으므로 시행 여부는 알 수 없다.

그리고는 선정전의 수리에 관한 기록이 없었으므로 이 건물은 인조 때에 중건된 건물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하겠다

더 나아가서는 광해군때에 이루어진 인경궁 광정전의 골격을 지니고 있으므로 인경궁과 같은 시기에 이룩된 경희궁의 잔존한 건물 모습과 비교 검토하면 당대의 건축 구조 기법에 관한 것을 밝혀 줄 수 있는 소재를 간직한 건물이라 하겠다.

 

 선정전의 구조

 <동국여지비고>에 , '선정전이 인정전 동쪽 연영문 안에 있다. 선정전은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던 집으로 청기와를 덮었으며 그 남쪽에 선정문이 있다.' 고 하였다.

  선정전의 초석과 같은 모습을 경희궁의 흥화문(興化門)과 숭정전(현재 동국대학교 정각원 건물)에서도 볼 수 있어 인경궁의 광정전을 이건한 사실과 연관하여 광해군 때의 강직한 초석 제작 기법을 보여 주고 있다.

   장대석 한단으로 낮게 설치한 월대 위에 다시 장대석 기단 한 단을 두르고  그 위에 정면 3칸, 측면 3칸의 건물을 원형 초석위에 세웠다.  외이출목, 내삼출목의 다포 구조이고 내부의 앞쪽에만 고주를 두어 창경궁 명정전에서의 기둥 배열과 같은 방법이다.

  벽사체에는 사면에 세 살 분합문을 설치하고 바닥은 우물 마루로 구성하고 별도의 칸막이가 없이 통칸으로 하였다.

   정면의 분합문 가운데 중앙칸은 순수한 사분합문이고 좌우의 협칸은 각각 중앙의 두짝은 분합문이고 양쪽의 두짝은 머름 위에 설치된 분합 광창(分閤光窓)으로 구성된 특색있는 구조이다. 

 

           일제에 의해 훼손된 선정전

                     선정문

                  <선정전 드므>

 

  천장은 대들보의 상단부 높이로 소란 반자를 설치하고 봉황문양으로 화려한 단청을 하였다.

 중앙칸 뒤쪽으로는 어좌(御座)가 배치되고 그 뒤로 어좌 후벽(後壁)이 설치되고 그 상부에는 보개(寶蓋)가 소란 반자 아래에 구성되었다.

  인정전에서 보이는 보개를 간략하게 정리한 것 같은 모습이며 귀접이한 보개 천장에는 금빛의 여의주와 봉황 그리고 꽃구름이 별도의 조각으로 치장되었다.

기둥머리 부분의 안초공이 인정전에서의 길 게 늘어진 것과는 달리 여기서는 창방부위의 높이로 간략하게 설치된 점과 보머리가 삼분두 형식이고 첨차와 쇠서의 형태에서 경희궁의 흥화문과 유사한 모습이 보인다.

 지붕은 서까래와 부연으로 구성된 겹처마에 팔작 지붕이고 양성마루가 아닌 기와쌓기의 영마루에는 취두를 설치하였다. 합각 마루에는 용두, 사래 끝에는 토수를 설치하였고 현존하는 궁궐 건물에서는 유일하게 청색 기와로 치장한 건물이다.

'동궐도'와 '동궐도형'에서는 선정전 주위로 반 듯하게 회랑이 둘러지고 선정전 앞으로는 5칸의 복도가 있어 솟을 삼문인 선정문(宣政門)의 서쪽 칸으로 연결되었다. 

선정문 앞에서 서쪽으로 꺾어 들어가면 인정전의 동쪽 문인 광범문(光範門)을 통해 인정전 뜰로 들어가게 된다.

동궐도형'의 회랑 칸수와 현재의 상황을 비교하면 선정전의 마당이 원래보다 동서쪽이 좁아진 상태이고

  또한 현재의 평삼문인 선정문도 현재보다 더욱 앞으로 배치되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변화는 일제시대에 창덕궁을 개조하면서 선정전의 회랑과 인정전 회랑을 연결시키면서 생긴 것으로 보인다(보물 814호).

 밖에도 선정전 언저리에는 정청 19간에 후당 10간, 동행각 12간, 서행각 12간, 남행각 5간이 딸렸고 , 그 바깥문인 연영문 1간에도 좌우 행각이 4간씩 딸려 있었다.   

 이러한 짜임새 있는 구조를 갖춘 선정전은 일제시대에 그 일부가 헐리기 전까지 인정전과 더불어 장엄하고도 화려한 외전으로서의 면모가 돋보였다.

기록에 의하면 성종 2년에 선정전에서 양로연 (養老宴)을 왕비가 베풀었고 같은 해 8월에는 친잠례(親蠶禮)를 행하였으며 명종때에는 문정대비가 수렴청정을 하던 곳이기도 하였으나 순조 이후에는 선정전보다는 희정당(熙政堂)을 편전으로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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