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 정 당       목록가기   

 

내전 조감도

  

 

 

 

희정당 (熙政堂)

   희정당의 내력

  선정전 동쪽의 협양문과 선화문안 , 곧 대조전 남쪽에 희정당이 있다.

  <궁궐지>에 '희정당이 대조전 남쪽에 있는데 편전이면서 시무(視務)하는 것

 

<동궐도의 희정당>

 이다.' 하였고 ,  <동궁여지비고>에도 "연침 접군신지소'라고 하였듯이 침전(寢殿)의 하나로 내전에 속하는 건물이며 순조대부터는 정사를 보는 편전으로 신하들을 접견하며 나라 정사를  보살피던 전당이었다.

<희정당 밖>

 

   건물의 방향은 인정전과 선정전이 정남에서 약간 동향으로 치우친 남향축임에 비해 희정당은 대조전과 함께 서향으로 치우친 남향축으로 설정되었다.

   대조전 북쪽에서 흘러내리는 지형의 방향에 적응한 때문이다.

   희정당은 대조전의 앞에 있고 회랑으로 연속된 건물이기 때문에 대조전과 같은 재난을 겪는다.


  창건과 함께 지어진 희정당은 연산 2년 (1496년) 12월 숭문당(崇文堂)을 고쳐 희정당(熙政堂)이라 칭하였으며,  임진왜란으로 소실된후, 광해군 원년에 재건하고 인조 25년 재건, 순조34년의 재건이  있었으나 1917년의 화재로 내전이전부 소실될 때 희정당도 소실된다.

  소실된 건물을 중건하기 위해 경복궁의 전각을 이건하기로 총독부와 협의하여 순조의 허락을 받는다. 공역은 1920년 12월에 끝나고 이때에 희정당도 재건된다.

   소실되기 이전의 희정당은 정면 5칸에 측면 3칸의 15칸 건물이나 현재는 정면 11칸에 측면 5칸의 55칸 건물로 되어 원래보다 규모가 훨씬 커진 것이다.

 

곧 경복궁의 사정전 북쪽에 있던 강녕전을 이전하여 희정당을 건립한 것이다.

   건물을 옮겨 지었으나 강녕전과 같은 규모로 만들면서 원래의 모습과는 다른 부분적인 변형이 있다.

  강녕전은 고종 13년 11월에 소실되었던 것을 25년 (1888)에 중건한 건물이므로 희정당의 골격은 1888년대의 것으로 보아야 한다.

 

 

희정당의 구조

  희정당은 순조 33년(1833)에 중건되었는데 그 이전의 희정당은 정면 5간에 측면 3간인 15간 건물이었고  그 뜰의 동쪽에는 연못도 있었다. <궁궐지>에 . '현종 15년(1674)에 이 연못에서 연꽃과 연밥이 볼 만하였다'고 나와 있는 것을 보면 희정당은 연못이 딸려 있는 운치 어린 전각이었다.

  이 건물이 1917년에 대조전과 함께  화재가 나는 바람에 경복궁의 사정전 북쪽에 있던 강녕전을 뜯어내어 지금의 건물을 지으면서 연못을 없애 버렸다.

  현재의 희정당은 5단의 장대석 기단위에 지은 12간짜리 이익공 집으로 <궁궐지>에 의하면,  기둥의 높이가 10척 5치, 양통 2간에 7척 5치씩 , 앞퇴가 10척이며 도리통은 5간에 10척씩이다.

   또한 북쪽에는 복도 3간이 있고 남쪽으로는 남행각이 딸려있다. 거실로 쓰이는 부분은 정면 6간에 측면이 3간으로 중앙부의 3간은 전체가 응접실로 꾸며졌고, 서쪽의 3간은 회의실로 꾸몄으며 동쪽의 3간은 여러 칸으로 막아서 골방, 이발소, 목욕탕 등을 꾸몄다.

  이러한 구조는 원래의 강녕전 그대로의 꾸밈새도 아니고 또한 원래의 희정당의 모습과도 다른 형태이다. 이와 같은 구조는 1920년 일제시대 때 꾸민 유럽식이 가미된 형태이다.

  그러므로 응접실에는 탁자와 의자가 놓이고 안벽 상방에는  해강(海岡) 김규진 이 52세에 그린 산수화대작, 폭 8.85미터, 높이 1.8미터 되는 <금강산 만물상도>와 <총석정 해금강도>등 두폭의 큰 그림이 걸려 있다.

  총석정 해금강도 : 금강산에서 바라본 이 해금강 총석정의 모습은 실로 장관이라 아니할 수 없는데 바위의 힘 있는 필채와 바다를 물고기 비늘같이 표현은 진경 그대로 잘 표현되었으며 이는 스승으로서 황태자인 영친왕에게 「왕이 되면 큰 뜻을 품고 어떤 일을 결정할 때 하늘같이 높고 바다같이 깊게 생각하여 바위처럼 굽힘없이 해나가거라」라는 뜻을 담고 있는 듯하다.
 

  금강산 만물상도 : 김규진은 영친왕의 서법 선생으로 영친왕이 일본에 볼모로 가 계실 때 어린딸과 함께 금강산에 은둔생활을 하다가 1917년에 창덕궁이 화재로 소실되고 재건시 고종의 황태자로 돌아온 영친왕의 부탁과 순종의 하명으로 용상 앞부분과 뒷부분 벽화를 제자인 영친왕을 위하여 약 3년여에 걸쳐 금강산 가을의 모습을 비로봉을 중심으로 약간 위에서 내려본 것처럼 그려냄으로써 제자인 왕으로 하여금 금강산 속에 와서 절경을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기위해 심혈을 기울인 흔적이 엿보인다. 
 

  희정당의 벽은 앞면으로 중앙 3간은 아(亞)자 분합문과 고창을 달았고 그 밖에는 마름인 방 위에 아(亞)자 분합문과 고창을 두었다.

  건물의 양식은 처마도리 밑으로 운공을 사용한 이익공 구조로, 고주 위에는 팔각형의 기둥머리를 사용하여 그 상부에 사각형의 고주두를 두어서 대들보를 받게 하였다.

  응접실은 큰 보위로 소란반자를 하였고 회의실은 서양식 반자로 꾸몄다. 1920년에 중건하면서 내부는 서양풍의 가구와 치장을 가미하여 커튼 박스와 전등이 설치되고 쪽널마루 위에 붉은 양탄자를 깔았다.

  한편 지붕은 겹처마에 팔작지붕으로 양성마루 윗부분은 취두, 용두, 잡상, 토수로 장식하였다. 이집이 강녕전 건물이었을 때는 지붕에 용마루가 없는 무량집이었으나 희정당으로 지으면서 용마루가 생긴 것이다.

   합각벽에에는 전돌로 완자 문양을 치고 그 중앙부에 길상문을 새겼다. 또한 동쪽에는 강(康)자 문양을 넣고 서쪽에는 영(寧)자 무늬를 장식하였다.  경복궁의 강녕전이 이건되었음을 알려주는 문자인 것이다.

 

<희정당 응접실>

  희정당은 앞뒤로 회랑과 연결되어 있어서 앞으로는 협양문, 선화문을 통해서 들어오게 되어 있고, 뒤로는 대조전의 행각과 연결되어  선평문을 통해서 대조전으로 들어가게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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