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선재의 내력    목록가기      

낙선재 조감도

 

 

 

  낙선재 일곽은 낙선재.석복헌과 수강재를 중심으로 취운정.진수당, 장경각 등의 여러 부속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낙선재는 조선의 24대 임금 헌종이 즉위한지 13년 (1847)되던 해 낙성을 본 건물이다.  헌종이 사랑하는 여인 경빈 김씨를 위해 이 건물을 지었다고 전해온다.

  헌종임금은 임금이 되고서야 장가를 들었다. 왕대비가 주관하는 국혼령(國婚令)이 발동되었다. 전국의 처녀는 영이 떨어지면 시집가는 일을 연기하며 기다려야 한다.

  3단계에 걸쳐 왕비감을 선발한다. 많은 후보를 단계마다 줄이다가 세 번째 간택 때가 되면 세 여인만 남게 된다. 그 중의 한 여인이 왕비로 낙점되고 혼사를 치렀다.

 그런데 헌종은 떨어진 두 번째 김씨 성을 가진 여인이 마음에 들었다. 그와 왕혼(王婚 : 임금이 선택한 여인과 동거하는 혼인)을 하고 사랑에 빠졌다. 사랑하는 김씨 여인을 위해 왕비전에 멀리 떨어진 , 그것도 궁이 다른 창경궁에 , 그러면서도 쉽게 다닐 수 있는 자리에 집을  지었다.

 

 이런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해오는  낙선재 경내는 대략 8,000여평으로 서쪽에 낙선재가 있고, 행각으로 둘러싸인 동쪽에 석복헌이 있으며,

  다시 그 동쪽으로 수강재가 있어 이 건물들을 통틀어 낙선재라 한다.

  수강재와 석복헌은 육순을 맞이 한 대왕대비 순원왕후를 위해 그 이듬해 (1848)에 지어졌다.

 

                   <낙선재>
              <석복헌>                       <수강재>
 

  낙선재는 고종이 편전으로 사용하기도 하였으며, 1917년 대조전이 불탔을 때는 순종이 이곳에 기거하였고, 순종비인 순정황후와 조선시대 마지막 공주였던 덕혜옹주도 이곳에서 생활하였다.

 그리고 최근에는 영왕비가 1989년까지 이곳에서 생활하여 낙선재는 다섯 궁의 전각들 중 가장 최근까지 왕실의 사람들이 살았던 곳이다.

 영왕비 일가가 현대식으로 개보수하여 사용하던 낙선재 일곽은 낙선재 상량문에 따라 헌종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낙선재는 헌종의 침전으로, 석복헌은 경빈 김씨의 침전으로, 수강재는 순원왕후의 침전으로 꾸며 당시의 생활상을 재현하였다.

  이 세 채의 집들은 언뜻보면 서로 닮아 보이면서 부분적으로는 제각기 많은 변화가 있다. 같은 반자를 달았으면서도 그 방밥이 다르고 , 문창호를 바른 미닫이를 달았으면서도 창살이 서로 다른 형태로 짜여져 있다.

  그런 가운데 기둥 사이의 문짝이나 창문짝의 짜임새도 그 비례감과 아울러 더도 덜도 할 수 없는 조화미를  나타내고 있다.

  이 건물은 순조 28년 (1828)에 지은 창덕궁 후원 안의 연경당과 쌍벽을 이루는 아름다운 집으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낙선재는 지형과 환경에 따라 자유분방하리만큼 다양한 건축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집 뒤편으로는 건물의 형태를 따라 꺾어 돌린 쪽마루가 쭉 놓여서 어느 채나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게 되어 있고, 쪽마루 끝에는 난간이 나지막하게 둘러져 있어서 더욱 운치를 돋운다.

 

넓은 앞뜰과 뒤뜰에는 상록수와 꽃나무가 우거진 중에 드문드문 정자도 배치되어서 아담한 정취를 자아낸다.

  특히 북쪽 후원에는 큼직한 장대석으로 쌓아 꾸민 화강석 화단이 있고, 그 화계 위에 육우정이 배치되어 있다.

  화단을 가르는 정교한 담장과 굴뚝들이 그 높이를 달리 하면서 화단의 꽃나무와 알맞게 키를 맞추는가 하면, 군데군데에 석분, 괴석, 연지 등이 배치되어서 균형과 조화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자연미와 인공미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조화를 보면 '과연 우리나라 고유의 정원양식을 대표하는 전형적인 밀원이구나'하는 느낌을 금치 못하게 된다.

 

           <낙선재 뒤뜰 :현재 출입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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