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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선재(樂善齋)이야기

  '낙선재'하면 조선왕조의 낙조(落照)를 상징하는 최후의 전각쯤으로 연상된다.

  낙선재가 쇠잔해 가는 조선왕조 최후의 무대라는 감회를 느끼게 하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돌이켜보면 일찍이 황태자였던 영왕 이은 이 1907년 12월 어느날 , 이 곳 낙선재 뜰에서 놀고 있다가 느닷없이 11세의 어린 몸으로 통감 이토히로부미에게 이끄려 일본으로 납치되어 끝내 볼모 신세가 되었고,

  황제에서 이왕으로 격하된 순종 황제가 1926년 4월 25일에 43세를 일기로 대조전 흥복헌에서 한 많은 일생을 마감한 이후, 순정효황후, 세칭 윤 비도 장장 43년이라는 긴세월을 홀로 낙선재에서 그 비운을 달랬다.

  윤비는 1906년 13세에 동궁(순종)의 계빈이 되어 다음 해에 융희 황제(순종)의 황후가 되었으나.

  1910년 한일합방 늑약이 강요되던 흥복헌 어전회의 때 옥새를 치마 속에 움켜 쥐고 통곡하다가 숙부 윤덕영에게 강탈당하는 통분을 격기도 했으며,

 

<이토히로부미가 11세 난 영친왕을
납치할 때 찍은 사진 
>
 

   6.25동란 때는 공산당에 의하여 낙선재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말년에 이르러 대지월이라는 불교의 법명을 얻어 나라의 비운과 자신의 고독을 달래다가 , 1966년 2월 3일 낙선재에서 73세로 영욕의 일생을 마감하였다.

  또한 영왕 이은도 조국이 광복되었지만 곧바로 환국하지 못하다가 1963년 12월 가까스로 귀국길에 올랐을 때는 이미 말을 못하는 기억상실의 상태였다. 그 후 7년간의 병원치료도 헛되이 1970년 5월 1일 낙선재에서 눈을 감았다.

 

<1910년 한일합방 늑약이 강요되던
흥복헌 어전회의 때 옥새를 치마 속에
감추었던 21세 때의 윤황후>

  11세에 일본으로 납치되어 1920년 4월 28일 일본의 4대 귀족의 하나인 나시모토 미야케의 19세 난 규수(후에 이방자로 개명)와 결혼 했지만 ,

   8.15종전으로 일본의 황족도 아니고 한국 국적도 갖지 못한 신세가 되어 20년 가까이 도쿄에서 생활하다가 볼모로 끌려간지 무려 57년 만에 식물인간이 되어 환국한 것이었다.

  함께 돌아온 여왕비 이방자여사도 그 후 낙선재 생활 27년, 향년 88세를 일기로 1989년 4월 30일에 역시 이 곳에서 운명하였다.

  이방자여사는 자신의 저서 <비련의 황태자비>에서 영왕과의 결혼 사정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결혼직후 귀국한 영왕과 방자비  >
 

 
  "나는 1916년 8월 , 볼모가 되어 일본으로 잡혀와 있던 영왕의 약혼녀로 정해졌다.

  나와 이은 전하는 단순한 한일 민족융화라는 목적뿐만 아니라 권력 투쟁의 음모 속에서 희생된 것이다."

  이방자 여사는 결혼 다음 해인 1921년 8월 첫아들 진을 안고 첫서울 나들이를 하였는데 사흘째 되던날 갑자기 진이 폐렴으로 세상을 떴다.

 그 후 두고두고 이방자 여사는 아들 진의 죽음을 조선 사람들의 음해 때문인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앞뒤 경호와 최후의 진찰까지 일본 사람들이 도맡았는데 그 사실이 보다 더 의심스럽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고종 황제의 고명딸인 덕혜옹주도 정신질환상태에서 독감으로 1989년 4월 21일에 낙선재에서 한 맺힌 생애를 마쳤다.

   덕혜옹주는 1912년 복녕당 양씨의 몸에서 태어난 마지막 옹주로서, 1918년 여덟 살의 어린 나이로 시종이던 김황진의 조카와 약혼까지 맺었지만 별 수 없이 일본으로 업혀가고 말았다.

   어머니인 양 귀인의 무릎에 싸여 어리광을 부리던 어린아이었지만 , 일본인들이 옹주마저 볼모로 데려가려는 낌새가 보이자 부랴부랴 늘상 가까이 있는 시종의 조카와 약혼을 맺어 놓은 것이었다.

 

<일본으로 납치되기 직전의
덕혜옹주(가운데 소녀)>

 이와 같은 아버지 고종황제의근심어린 배려도 헛되이 1919년 고종께서 운명하시자마자 일본인들은 다음해에

   10세 난 옹주를 납치하여 우리나라의 지위를 낮춰 버릴 셈으로 일개 대마도도주의 아들과 강제 결혼을 시켰다.

   대마도주 아들과의 동거 생활 3년 만에 덕혜옹주는 그 동안의 시련으로 인한 우울증에 실어증까지 겹쳐 끝내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낙선재 최후의 가족(왼쪽부터 이구,윤황후, 방자여사, 이구의 부인 줄리아 여사  >

  이처럼 낙선재는 조선왕조 최후의 왕손들이 슬프고도 기구한 운명을 마감한 무대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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