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원의 뜻과 후원의 내력    목록가기      

 

 후원의 뜻

 후원(後苑)은 조선시대의 커다란 궁궐 곧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경운궁의 하나인 창덕궁 뒤쪽에 자리잡은 정원으로 왕가에서 휴식을 취하던 곳이다. 그러나 이곳은 후원(後苑)이라기보다는 비원(秘苑)으로 알려져있다. 본래 비원이라 하지 않고 처음만들어진 조선시대 초기부터 고종때까지 후원(後苑), 북원(北苑) 그리고 금원(禁苑)으로 불려졌다. 조선시대의 옛 기록에서는 비원(秘苑)이라는 말은 보이지 않고 후원, 북원, 금원만이 보이는데 그 가운데서도 후원이 가장 많이 볼 수 있다. 창덕궁이 자리잡은 곳은 지금의 와룡동 남쪽이고 비원은 그 뒤인 북쪽이므로 후원은 또는 북원이라 불렀으며, 한편 일반인의 접근이 금지되고 공개되지 않기 때문에 왕가에서는 금원 또는 고종 이후에는 비원이라 불렀다. 일본인들이 후원을 격하시켜 부른 것이라 생각된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그동안 사용해온 비원이라는 말은 사실 후원으로 고쳐 부르는 것이 마땅하고 왕의 동산이라는 뜻에서는 금원이라 부르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된다.

 

 

후원의 내력

  창덕궁 후원이 만들어진 것은 조선시대 초기인 태종때라 생각된다. 왜냐면 왕조실록에 태종 5년 10월 창적궁이 세워졌다 는 기록과 이듬해인 태종 6년 4월 창덕궁 동북쪽에 해온정을 지었다는 내용을 찾아 볼수있어 이 창덕궁 동북쪽이 바로 지금의 비원 곧 후원이 있는 곳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해온정이라는 정자 앞에는 연못이 있었는데 여기에서 잔치를 벌이고 등놀이도하였다.

해온정은 태종 14년에는 "신독정"이라 이름을 고쳤는데 세종때부터는 별로 이 신독정의 이름이 오르내리지 않고 있는 이유는 아마도 세종이 창덕궁보다 경복궁에 즐겨 머물렀던 까닭이라 생각된다. 또한편으로는 세월이 흐르면서 이 정자가 사용되지 않아 자연히 없어진 것이 아닌가도 생각된다.

태종6년 5월 27일에는 인소전을 창덕궁북쪽에 짓도록하여 그터를 잡고일을 시작하였으며, 같은해 8월22일이곳에 신의왕후의 신위를 모셨고 2년되인 태종 8년 8월 26일에는 이름을 문소전으로 바꾸도록 하였다.

세조때에는 후원좌우에 연못을 파게하였다는 기록이 세조실록 5년 9월26일 기록에 보이고또 세조 7년 11월에 열무정에 행차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열무정"은 세조 5년에 판 연못주위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또 예종때에도 후원에서 습진 (적을 뒤쫓아가 공격하는 연습)이있을 때 이 열무정에 행차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궁궐지에는 "열무정" 북쪽에 사정기를 쓴 비석을 세워둔 비각이있다고 하였다.

지금 부용지 서쪽에 "마니" "파리" "우리" "옥정"의 4개의 샘에 대하여 기록한 비각 곧 "사정기비각"이 서 있다.

세조는 후원을 확정하였다. 세조 8년 정월에 동복 담장을 넓게 쌓고자 하여 둘레 4,200자 (약 1,272미터)로 그안에 있던 백성의 집 73채를 헐었다.또 58채의 집들을 헝어 북쪽담장도 넓게 쌓아 후원의 경계가 지금처럼 성균관에 가깝도록 하였다. 이때가 세조 9년 이였다.

창덕궁 후원이 넓어지면서도 왕과 왕의가족들이 쉬던곳이 난잡한 놀이터로 변한 것은 연산군때이다.

연산군 3년 초에 후원의 서쪽담장을 높이고쳐 쌓게 하여궁밖사람들이 궁안의 놀이를 들여다보지 못하게 하였고 또 9년에는 동족담장과 서쪽담장아래쪽의 집들을 모두 헐게하였다. 더욱이 10년에는 성균관이 후원과 근접하고있다고 하여 성균관을 다른곳으로 옮기게 하였다.

연산군은 더 나아가 재위 11년(1505) 5월에는 새로 대를 쌓을것을 명하였으니 이것이 서총대이다. 돌을 10자 높이로 쌓고 주위에 돌양쪽 강에 배들을 띄우게 난간을 둘렀으며, 1,000여명이 앉을 수 있는 넓이로 만들었다. 또 대앞에는 큰엿못을 파게 하였는데 감독만 900여명이고 일꾼들은 수만명이었고 하였다. 그러나 연산군이 왕위에서 쫓겨남으로써 공사는 중단되었고 중종때 모두 철거되었다.

임진왜란 이전까지 창덕궁 후원에 이어난 일들은 이들말고도 성종 8년 (1477) 3월 3일 선공감에 명하여 후원에 채상단을 쌓게 한일도 있으니 이는 왕비가 양잠을 장려하던 일과 관계있으며 뒷날 1911년 후원의 주합루 서쪽서향각에 양잠소를 만들게 한 일과 연결된다고 하겠다.

또 임진왜란(선조25년)전인 선조 7년 (1574)8월9일에는 후원에 말이 달리는 길을 만들어 기사를 시험케 하라는 명이 있었으나, 서내에서 없었던 일이니 하지 않을 것을 간하였으나 임금꼐서 듣지 않았다 는 기록이 보인다.

그 뒤 임진왜란으로 창덕궁은 모주 불타고 후원도 그 피해가 심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광해군이 영건청을 두어 여러 건축공사를 강행하자 삼사(사헌부,사간원,홍문관)에서 영건청을 없을 것을 간하였던 일이 있다. 이해 광해군은 "근일 영건청을 없애라는 삼사의 논의 가 있었는데 그말은 옮다... 책방을 만들고자 하는 것은 한가롭게 놀 곳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이 불안할 때 쉴곳이 없어 책방을 만들어 몸과 마음을 고치는 병당으로 하고자 하는 것이니 영건청을 폐하기는 어렵고./... 혼경전 영화당같은 것은 영조하지 말도록 하여 공의에 따르겠다"는 기록이 광해군일기 2년 2월 을미조에 보이고 이기록밑에 "이 여러전각의 건축일들은 모두 먼저 이루어졌다 또 별전 여러곳도 만들어졌다고 되어있다. 또"기이한 화초, 괴석들을 늘어놓고 ,원유의 꽃과 둘사이 곳곳에 작은 정자들을 만들어 유람에 대비하였는데 그 기교하고 사치스러움이 예전에 일찍이 없었던 일이다 라고 주해되어 있다. 이런 것으로 보아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재정에도 불구하고 크게 공사를 하여 후원의 위용을 갖춘 것을 앙수있다.

후원의 그 많은 정자들이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7세기 인조떄이다.

인조 14년 (1636)에 지금의 소요정인 "탄서정 태극정인 운영정 청의정"등을 세우고 청의정 앞쪽 암반에 샘을 파고 물길을 돌려 폭포를 만들었으,며 옥류천이라는 인조의 붓글씨를 받아 그대로 암반에 새겨 넣었다.

또 인조 18년(1640)에는 취규정이 건립되고 현종5년에 관덕정으로 이름을 고쳐 부른 취미정이 인조 20년 (1642)에 건립되었다. 또 인조 23년 (1645)네는 뒷날 희우정이라 고쳐 부른 취향정을 24년에는 팔각정 25년에는 취승정 관풍각이 세워졌다.

이가운데 취승정은 낙민정으로 개칭되었고 팔각정은 "세자가 중국 북경에서 돌아오니 임금께서 북경의 궁궐모습을 묻자, 세자가 팔각정 제도가 묘하다 하여 그것을 그려보게 하고 그대로 지은 것"이라고 인조실록에 전한다.

숙종14년(1688)에는 청심정과 빙옥지가 만들어졌고 16년에는 술성각 옛자리에 사정기비각을 세웠다 또 18년에는 영화당을 고쳐 짓고 애달정을 세웠다.

숙종 30년 12월에는 임진왜란 떄 군대를 보내 도와준 명나라 황제 신종을 제사 지내기 위하여 후원에 대보단을 축조하였으며 33년에는 택수재가 세워졌고 53년 정조 원년에는 규장각을 세웠는데 택수재는 부용정으로 고치고 규장각은 왕실의 도서를 모아 둔 곳으로 위층은 누각인데 이것이 지금의 주합루이다 .

순조28년(1828)에는 궁굴속에서 사대부들의 사는 모습을 알기 위해 연경당을 건립하였다.

한일합방 뒤 1921년에는 선원전을 후원 북쪽 옛건물터에 세웠다.

이처럼 창덕궁 후원은 조선시대 초기부터 여러대의 임금들을 거치면서 여러 차례의 건축과 후원 가꾸기를 하여 오늘날과 같은 만여 평이 넘는 후원을 이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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