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경당(演慶堂) 주변       목록가기     

 

  

 연경당(演慶堂)과 그 주변

   연경당의 내력

  애련지를 지나  더 안쪽으로 들어서면 또 다른 작은 연못이 나오고 이곳북쪽 터에 연경당이 자리잡고 있다.

  지금의 연경당은 순조 28년 (1828)에 당시 왕세자였던 효명세자의 청으로 사대부집을  모방하여 궁궐 안에 지은 이른바 99칸 집이다.

 효명세자는 순조 9년에 태어나 순조 27년 왕명으로 대리 청정을 하다가 순조 30년(1830)에 세상을 떠났다. 그뒤 아들이 헌종으로 즉위하자 왕으로 추증되어 익종으로 종묘에 봉향되었는데 연경당은 바로 익종의 대리 청정 때 창덕궁 안에 지은 것이다. 창덕궁 안에 지은 유일한 민가형식의 건물로 사랑채의 당호(堂號)가 연경당(演慶堂)이다.

'동궐도'를 보면 애련지와 연경당 앞쪽의 작은 연못 사이에 "어수당(魚水堂)"이라는 편액을 건 정면 4칸, 측면 2칸 되는 팔작 기와집이 한채 있었고, 또 연경당 자리에는 지금의 연경당과는 다른 'ㄷ'자 평면의 연경당과 개금재(開錦齋), 그리고 행랑에 우뚝 선 장락문(長樂門)이 있었던 것을 볼 수 있다.

이 기록을 참고해보면, 본래의 연경당과 개금재 터에 현재의 연경당을 지으면서 당호와 문이름을 그대로 따온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연경당의 구조

 연경당은 입구에서부터 연경당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이 심상치 않은 상징성을 지니고 있을 것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바깥마당

  연경당 행랑채와 그 가운데 우뚝 선 솟을 대문인 장락문 밖 넓은 터는 행랑 바깥 마당이다.

  사대부 집에서는 대개 줄행랑과 솟을 대문 밖 넓은 터에 큰 느티나무가 있어 여름철이면 매미를 불러들이고, 매미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무더운 여름철을 보냈다.

  이곳 연경당에서도 그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여 큰 느티나무를 한그루 심고 주변에 도랑과 다리 그리고 석함, 대석 등의 석물들을 늘어놓았다.

 

   월궁 항아의 화신 - 석분의 두꺼비

장락문 앞에 있는 괴석은 받침대의 예술성이 돋보인다. 사면에 꽃무늬가 있고, 윗면 네 모서리에는 두꺼비들이 기어다니는 조각이 들어있다

 

  서쪽에서부터 동쪽으로 꺾이어 문앞을 흐르는 물은 서류동입하는 명당수이며, 이 명당수를 건너는 작은 돌다리도 놓여 있다. 장락문 앞에 있는 괴석은 받침대의 예술성이 돋보인다. 사면에 꽃무늬가 있고, 윗면 네 모서리에는 두꺼비들이 기어다니는 조각이 들어있다

  안쪽으로 들어가는 놈이 있는가 하면 바깥으로 기어 나오는 놈이 있다. 살아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곧 가만히 그 자리에 놓여 있는 괴석과 석함에 움직임의 요소를 줌으로써 정적 공간을 동적 공간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이 두꺼비는 석수의 장난기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심오한 상징성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오경통의(五經通義)>에 의하면 달에 토끼와 두꺼비가 있는데, 토끼는 음이요 두꺼비는 양이라 하였다. 그리고 중국의 오제(五帝)전설 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태양의 어머니 신인 희화는 열 개의 태양을 낳았고 다른 부인 상희는 열두 개의 달을 낳았다. 희화는 동쪽바다 탕곡이라는 곳에 살면서 열 개의 아들인 태양을 매일 아침에 하나씩 말끔히 씻어 내보냈다.

  나머지 아들인 아홉 개의 태양은 그곳에 있는 부상(扶桑)이라는 거목에 저마다 집을 짓고  순번을 기다려야 했다. 그래서 이들은 열흘에 한차례씩 집에서 벗어나 넓은 천지를 날아갈 수 있었다.

 

  차례를 기다리는 것이 불만이었던 아들들은 어느날 반란을 일으켜 동시에 하늘로 뜨고 말았다.

  열 개의 태양이 일제히 내리비치는 햇살은 더 이상 빛이 아니었다.

  그 열기는 하늘과 땅과 바다를 한 덩어리의 불기둥으로 만들어 모든 생물들을 사경에 몰아 넣었다. 이를 본 천제(天帝)는 활 잘 쏘기로 이름 난 예를 불러 해를 쏘게 하였다.

화살을 맞아 떨어진 태양을 보니 세발 달린 까마귀였다. 예는 하늘에 어지럽게 뜬 많은 태양을 활로 쏘아 떨어뜨려 지상의 환란을 해소한 공으로 서왕모로부터 불로불사약을 하사받았다. 그러나 그의 아내 항아가 그것을 몰래 훔쳐먹고 월궁으로 도망쳤다.

  그후 항아가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전하는 말이 구구했다. 달에 도착하자마자 월신의 노여움을 받아 두꺼비로 되었다고 하고, 남편을 배반한 죄를 치루고 신선처럼 살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쨌든 옛 사람들을 달을 선궁(仙宮)으로 생각했고 , 그 속에서 신선처럼 살기를 원했다. 이밖에 해와 달에 얽힌 전설로는 <삼국유사>에 전하는 연오랑과 세오녀 이야기가 있고 두꺼비를 달의 화신으로 표현한 예는 고구려 벽화무늬의 월상도문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대조전 뒤뜰의 굴뚝에 토끼가 새겨져 있고, 경복궁 교태전 뒤뜰의 석연지에는 두꺼비가 새겨져 있다. 연경당 안채가 그렇고 , 왕비의 침전인 경복궁 교태전이나 창덕궁 대조전이 그렇듯이 두꺼비나 토끼형상을 새겨 놓은 곳은 모두 여성들의 생활공간이다.

  해가 남성이라면 달은 여성이다. 달은 월궁이라하여 거기에는 광한전이라는 궁전이 있고, 그 속에서는 모든 근심과 걱정을 잊고 사는 신선들이 있다고 믿었다.

   그런 선계에 올라가 항아처럼 살고 싶은 것은 뭇 여성들의 간절한 소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월궁에 가서 산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래서 묘안을 생각해 냈다. 현재의 생활공간을 월궁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요소요소에 두꺼비와 토끼장식을 베풀어 지금 거처를 지상의 월궁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이 석함의 동북쪽에 서 있는 팔각형 단면의 석주 모양인 대석은 축우기를 받치던 석문의 하나이다.

  측우기는 단면이 둥근 원통이기 때문에 이 대석의 팔각형 평면 안쪽으로 둥글게 홈을 파서 측우기를 올려 놓았을 때 움직이지 않게 하였다.

   서류동입하는 명당수와 금천교

    

  연경당의 대문인 장락문(장락문)으로  들어가려면 작은 개천에 놓여 있는 돌다리를 건너야 한다. 이 돌다리는 연경당 서북쪽 골짜기에서 흘러오는 물을 , 일단 서쪽 행랑채의 마당 밑으로 끌어들였다가 , 다시 서쪽 행랑채 밑에서 작은 개천으로 끌어내어, 동쪽으로 꺾이면서 행랑채 앞을 흐르게 만들어 놓은 개천 위에 놓여 있다.

  이 작은 개울은 연경당 남쪽 넓은 터로 완만한 곡선을 그으며 흘러가서, 앞서 지나온 작은 네모 연못으로 숨어 들어간다. 이렇듯 이 집의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서입동류(西入東流)의 개천은 곧 연경당의 명당수이다.

  앞서 지나온 네모 연못은 그 남쪽인 주작(朱雀)인 셈으로, 집 남쪽에 연못이 있으면 집안이 길하고 부를 누리게 된다는 풍수도참설에 근거한 연못이다.

  물의 흐름은 직선적이 되어서는 안된다. 물은 유연하여야 한다. 대문에 물을 흘려보내는 작은 도랑, 개천 등은 유연하게 흐르도록 하고 그 가장자리를 마감하는 장대석들도 필요한 곳에서는 휘어지게 다듬는 것이다.

  연경당에서도 개천 양쪽 벽의 장대석들을 부드러운 곡선으로 마감하였다.

  그리고 가장자리에 심은 나무뿌리를 보호하기 위하여 둥글 게 마무리한 것도 볼 수 있다.

사대부집이나 궁궐의 정전 등에 들어갈 때 개천 위에 놓인 다리를 건너게 된 것은 어떻게 보면 적어도 고려 왕조 때부터 내려오는 공간 디자인의 한 수법이라 할 수 있다.

  고려 때 개성의 궁궐 터인 만월대 터를 보아도 그렇다. 

곧 정문인 신봉문(神鳳門)에 이르기 전에 서쪽으로부터 물이 흘러와 동쪽으로 흘러가는 개천인 광명천(廣明川)위에 놓인 돌다리인 만월교(滿月橋)를 딛고 건너게 된다. 만월교가 놓인 광명천은 하나의 금천이고, 다리는 금천교이다.

  또  조선시대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의 정문 앞에는 금천이 흐르고, 이 위에 영제교가 서 있다. 이와 같은 이치로 창덕궁에서는 금천교가, 창경궁에는 옥천교가 있다. 그리고 경복궁과 창덕궁에서는 금천이 서북쪽에서 흘러와 동남쪽으로 흘러나가는데 이때 정전은 남쪽을 향하고 있다.

  연경당의 개천도 남쪽으로 향한 연경당 서북쪽에서 흘러 들어와 동남쪽으로 흘러 나가는 것은 우연의 일치만은 아니라 하겠다.

 

 

 

  장락문 - 솟을 대문이야기

   연경당의 대문인 장락문은 솟을 대문이다. 평대문(平大門)이 대문을 설치한 행랑채의 지붕과 같은 높이, 같은 지붕 속의 것이라면 솟을 대문은 행랑채 지붕보다 한층 높인 지붕을 덮고 있다.

  조선시대에는국가 관료직은 정과 종 각각 9품계로 총 18품계로 나누어졌다.

  이 가운데 종 2품 이상의 관료는 초헌이라부르는 외바퀴 수레를 타고 대궐에 드나들었다. 이때 이 초헌을 탄채로 대문을 드나들려면 대문의 지붕을 주변 행랑채보다 한층 높일 수밖에 없었고 또 문지방의 중앙은 홈을 파서 외바퀴가 지나가도록 한 것이다.

  솟을 대문이 지체 높은 양반집에 세워지게 되자 점차 종2품 아래쪽의 양반집에서도 솟을 대문을 달기 시작 하였는데 이들은 대개 문지방의 홈이 없이 지붕만을 한층 높인 솟을 대문이었다.

 

결국 솟을대문은 양반집임을 말해 주는 대문이 되었고, 자연히 '솟을대문집'하면 그 집은 곧 양반집이 되었다.

  조선시대 오백여 년을 이렇게 내려오다 보니 신분제가 유명무실하게 된 갑오개혁뒤에 중인집에서 선망의 대상이 었던 솟을대문을 달자, 양반 계층에서는 오히려 양반집 체모를 손상하였다 하여 솟을대문을 헐고 평대문으로 고친 사례들이 생기게 되었다.

 

   목록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