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둘러보기

01: 입구일곽(一廓: 하나의 담으로 막은 지역): 광화문      목록가기

 

 

 배치의 원리 삼문 삼조

정 배치도와 건물 이름에 담긴 뜻을 알면 경복궁 배치의 원리를 해석할 수 있다.

궁전은 회랑으로 둘러싸인 3개의 중정으로 구성되었다.
남북 중심축 위에 정문, 금천교, 근정문, 근정전, 사정전, 강녕전 등이 앞뒤로 정연하게 배치되어 있다.
맨 앞 중정 안에는 금천교만 배치되고, 

가운데 중정에는 정전인 근정전만 배치되었다.
맨 뒤 중정에는 편전인 사정전과 침전인 강녕전, 연생전, 경성전 등이 배치되었다.

3개의 중정을 앞뒤로 연속시킨 복합 중정형 배치의 원형은 무엇인가? 주례고공기의 궁실 제도에 관한 규정에서 '삼문 삼조'라는 조항을 관련 지을 수 있다.


삼조=맨 앞부터 외조, 치조, 연조로 연속되는 3개의 중정을 궁실 제도의 원초적 형식으로 규정 한 것이다.
외조=조정의 관료들이 집무하는 관청이 있는 구역이다.

치조=왕이 신하들과 정치를 행하는 공공 구역으로 정전과 편전이 자리한다. 정전은 조례를 거행하고 법령을 반포하며 조하를 받는 곳이고, 편전은 왕이 중신들과 국정을 의논하는 곳이다.

연조=왕과 왕비, 왕실 일족이 생활하는 거주 구역으로 침전이 있다.

 
입구일곽(入口一廓)-광화문 지역
                              광화문 옛모습

 

입구라하면 어디론가 들어가는 곳을 말하는 것이니 지금 경복궁의 입구는 동쪽 궁장의 주차장 구역이다. 또한 편리한대로 지하를 뚫고 들어온 3호선 경복궁 역으로도 진입이 가능하게 되있으니 경복궁역도 입구일곽에 포함시켜야 할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렇게 들어온 사람들은 주차장 옆 매표구에서 표를 사서는 동정문을 지나 융문루의 아래로 난 조그만 문을 통해 관람을 시작한다

하지만 본래의 경복궁의 입구구획은 광화문에서 시작하여 지금은 공사중인 흥례문영제교를 지나 정전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근정문에 이르는 구역이다. 경복궁이 제 모습 찾기사업으로 홍례문과 영제교가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지만 광화문이 정문으로서의 위신을 회복하기는 아직도 멀기만 한 것 같다.

올 12월 말(2002)로 공사일정이 완료되는 흥례문의 공사가 끝난다해도, 광화문 앞의 넓은 차로(세종로)가 길을 막고 서있고, 가까운 횡단보도도 생각하기 어려우니 광화문에서 관람을 시작하기는 어려울듯 싶다.

 
                           
광하문 좌우의 해치 광화문(光化門) : 가운데의 중앙문은 임금의 전용출입문이고, 우측은 문관, 좌측은 무관의 추입문이다. 광하문 좌우의 해치
   광화문으로 들어서기 전, 경복궁의 좌우 담벼락으로 바싹 붙어앉은 석수 두마리가 마주 앉아 세종로를 직시하고 있다.
이칭(이칭)으로는  해천, 신양, 식죄, 해타 등으로도 불리며, 우리에게는  '해태'라는 말이 더 익숙할 것이다. 고속도로를 따라 달리다보면 시군의 경계에 서서 사람들을 반기기도하고, 국회의사당이나 경찰청 등의 관공서에서도 심심찮게 보아왔을 것이다.

해치는 고대 중국에 있었다고 전해지는 상상 속의 영물이다. 이물지(異物誌)라는 옛 책에 소개된 해치는, 성품이 곧고 충직하며 머리에 뿔이 하나 달려있어, 사람들이 싸우면 잘못이 있는 이를 들이받고, 서로 시비를 다투면 거짓을 말하는 이를 물어뜯는다고 한다. 이런 성품으로 해치는 예로부터 정의를 상징하는 동물로 알려져 있다.

 
광화문 문전을 흐르는 개천에는 돌다리와 난간이 설치되어 있다. 개천에는 항상 북악산에서 맑은 물이 흘러 내려 인근 아낙네들이 빨래를 하는 곳이기도 하다.(지금은 도로자리.)
 
      
광화문을 옮기기 전의 원래 모습. 광화문 바로 앞에 커다란 다리가 있고, 왼쪽 육조거리 건물앞에 해태상이 보인다. 광화문을 건춘문 뒤로 옮긴 후 625때 불에 타고 남은 석축의 모습.
 
        경복궁의 남문이며 정문이다. 경복궁의 창건시에는 특별한 이름없이 '정문'으로 부르다가 세종 대에 이르러 경복궁을 수리하면서 집현전의 학자들에 의해 성문과 다리 등에 이름을 붙이면서 비로서 '광화문' 이라 부르게 되었다.

광화문은 '나라의 위엄과 문화를 널리 보여주는 문'이라는 뜻의 '광피사표 화급만방(光被四表 化及萬方)'에서 유래된 것이다. 

조선 시대엔 백성들의 궁궐출입이 쉽지 않았을 터이니 광화문은 왕권의 존엄들 보여주는 궁궐의 얼굴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광화문 앞으로 '새종로'라고 하는 우리나라 최대(最大)의 도로가 그 앞을 가로막고 서 있고 세종로 양쪽으로 워낙 기세등등한 건물들이 많이 서 있어서 위축되어 보이지만 육조거리가 살아있던 조선대의 광화문은 지금은 생각할 수 없을만큼 위엄을 갖추고 서 있었을 것이다.

위 사진은 조선 말 광화문 앞 거리의 모습이다. 조선시대에도 광화문 앞은 6조를 비롯한 여러 주요 관청들이 모여있었다. 이를 궐 밖에 있다하여 궐외각사라 통칭한다

 
광화문을 들어서면 넓직한 마당이 펼쳐지고 정면으로는 흥례문과 회랑,그리고 금천과 영제교의 복원공사가 한창이다. 불과 몇년전 만해도 여기엔 조선총독부 청사가 있던 자리이다. 조선 총독부 청사는 일제 시대에 식민지 경영을 위하여 세운 일본의 총본거지로서 조선 민족의 정기를 말살하려는 목적하에 세워진 건물이다. 

  일제는 1911년 경복궁 부지의 소유권을 조선총독부 명의로 넘겨 그 기틀을 닦고, 1915년 일제는 홍례문 권역의 전각들을 모두 헐어내고 근정전의 정면을 가로막는  조선총독부 건립 공사에 착수하였다. 

 그렇게 공사에 착수한지 10년 만인 1926년 10월에 정면 71간 8분, 측면 39간, 건평 1,115평, 연건평 9,604평의 5층 르네상식 건물이 완공되었다.

이 조선 총독부 청사는 해방 후엔 미군정 청사로 사용되었다.

조선총독부 : 일본 제국주의는 왜 조선총독부를 조선왕조의 상징인 경복궁의 근정전 앞을 가로막으며 지었을까?        (광화문은 그 당시 헐어 버렸다)
  그후 1948년 5월 개헌국회를 통해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의 산실이 되기도 했다. 중앙청이라는 미국식 이름으로 개명한 이 건물에는 정부의 주요 부처가 들어 있다가 1983년 마지막 국무회의를 끝으로 국립박물관으로 사용되다가 1996년 11월 13일 오전 5시 완전히 철거되어 사라졌다.
  경복궁이 제모습을 찾아가는 것은 기쁜 일이지만 이곳에 우리의 아픈 과거마저 묻어버리는 것은 옳지 않다. 후대의 사람들이 경복궁을 찾아와 그런 과거가 있었음을 알리는 일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광화문 상식

  광화문은 원래 조선조의 태조 때(1395년)창건, 무사암을 사용하여, 석축 홍예문(무지개모양의 문)을 쌓고 그 위에 3간 2면의 중층 문루를 세운 궁문이다. 임진왜란 때 경복궁과 함께 왜병에 의해 소실되었던 것을 270여년 만인 대원군 때에 원래에 모습으로 중건했었다.

그러나 한일합방 후 일본 총독부가 경복궁 안에 총독부 청사를 지은 다음 해인 1927년에 총독부 청사가 가린다고 해서 이를 헐어냈다. 현재의 광화문은 1968년 현재의 위치에 다시 세운 콘크리트조 건물이다.

그래서 5대 궁궐의 문중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이 궁문은 목조 건물 흉내를 낸 철근 콘크리지트 건물로 국보도 보물도 아니고 지방문화재에도 들지 못하고 있다.(또한 13미터 가량 뒤쪽에 밀려나있고 방향도 관악산이 아닌 남산을 바라본 3.5도의 축이 벗어나 있다..)

화문 가는 길에는 백악과 인왕산 그리고 문화 답사가 있으며 경복궁에는 정치,행정,외교,언론,문화,산업,종교가 있다

광화문은 출입로가 셋 뚫려 있는 높은 석축 위에 2층 우진각 지붕을 한 문루가 높이 앉아 있다. 문루는 너무 높아 그 앞 인도에서는 전체 모습을 한꺼번에 볼 수 없다.

1910년 통감부를 총독부로 개편하면서부터 남산에 있던 통감부 청사가 비좁아 옮길 계획을 세웠으나 바로 착수하지는 못하다가 1912년에 조선 신궁 조영에 관한 조사와 함께 총독부 청사를 지을 준비를 진행하였다. (당시 총독부는 남산에 있었다.)

1915년 8개년 사업으로 확정짓고 '시가 중요 위치에 있는 광대한 면적'을 찾아 경복궁 근정전 앞 약 3만 평을 부지로 결정하고, 공진회가 끝나자 바로 공사에 착수한 것이었다.

경복궁의 주요 건물들, 곧 광화문 - 근정전 - 사정전 -강녕전 - 교태전은 일직선상에 놓여 한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렇게 해서 공사에 착수한 지 10년 만인 1926년 정면 71간 8분, 측면 39간, 건평 2,115평 연건평 9,604평의 5층 르네상스식 석조 건물이 완공되었다. 당시 총독부를 짓기 위하여 흥례문, 영제교등 수 많은 건물을 헐어 버렸다.

광화문은 1926년 7월 22일 해체되기 시작하여 1927년 9월 15일 경복궁 궁장의 동북쪽, 지금의 국립민속박물관 입구 자리로 옮겨졌다.

광화문은 1865년에 중건된 지 60년 만에 경복궁의 정문도 아니요, 동문도 아닌 그저 유배당한 문, 죽은 문이 된 것이다. 1592년 임진왜란 이후 330여 년이 지나 일본인이 광화문에 가한 두번째 학살이었다.

그나마 문루는 6,25 당시 그나마 형체마저 잃어버렸다. 석축만 남게 된 것이다.

것이 1968년 대통령의 명령으로 철근으로 다시 돌아왔다. 광화문과 함께 꼭 보아야 할 것이 있다. 동십자각이다.

궁장의 동남쪽 모서리에 있던 망루에 해당하는 건조물이다.

동십자각만 아니라 서십자각도 있었는데 그것은 없어지고 동십자각만 남게 되었다. 동십자각은 궁장이 축소되면서 혼자 길 한가운데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광화문도 물러 앉고(13미터정도) 경복궁도 물러 안게 되었다. 역사의 질곡을 한 번 안으니 문화 유산마저 뒤로 물러서게 된다.

이제 우리는 주어진 것을 새롭게 고치고 다듬어야 하고 올바른 역사를 알고 가야 할 것이다

 

 
                                  동십자각                                  서십자각
                      

  성벽

 동십자각의 성벽 역시 일제가 총독부 청사를 신축하면서 헐고 시원스런 울타리로 바꿨다.

이 울타리는 대한민국이 율곡로 길을 넓히면서 다시 뒤로 10미터 물렸다. 그 결과 동십자각은 성벽을 잃고 길 한가운데 나앉은 망루가 되어 이상한 건축물이 되어 버렸다.

 

 서십자각

동십자각 맞은 편에 서십자각이 있었다. 동십자각과 똑같은 각루 였던 서십자각은 아예 없어져 버렸다.

일제가 낸 전차길이 총독부 관저(지금 청와대 자리)에서 시작하여 이곳을 지나 종로로 갔기 때문이다.

 

 동십자각은 궁궐을 지키는 보초가 서있던 망루이다. 그래서 궁궐의 부속건물답게 지붕에 잡상이 얹혀 있고, 단청이 되어 있는 것이다. 내부에 방을 둔 구조나 성가퀴도 만약에 있을지 모를 전투를 위하여 설치해 놓은 것이다. 성가퀴란 여장(女墻),성첩(城堞)이라고도 하는데, 성 위에 담장을 덧 쌓고 아(亞)자로 구멍을 여러 개 내어서 성을 지키는 쪽이 몸을 숨기고 적을 공격할 수 있게 한 시설이다.

동십자각은 방어 시설이니까 출입구는 당연히 성 안쪽에서 드나들게 되어 있어야 하는데, 그 출입구의 흔적이 서쪽 성가퀴에 남아 있다. 궁궐에 가까운 쪽 여장 끝에 문이 나 있는 것이 보인다. 여기에는 성벽 안쪽에서 걸어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 이어져 있었다.

.원래는 경복궁의 앞쪽 성벽과 동쪽 성벽이 동십자각에 잇닿아 있었다. 동쪽 성벽은 일제 시대에 헐려서 길이 되었다

헌병대가 삼청동에 있어서 그 길을 낸다면서 동쪽 성벽을 안쪽으로 밀어 넣게 했다. 동쪽 성벽을 따라 약 350미터쯤 걸어가면 건춘문을 지나 민속 박물과 정문에 이르는데, 그곳 담장이 꺾인 걸 볼 수 있다. 성벽이 밀려 들어간 흔적이다.

 
 흥례문의 처마 선과 산줄기를 보면 흥례문이 자연 친화적인 아름다움을 더욱 만끽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산줄기와 이어진 흥례문은 마치 산줄기의 한 능선 같습니다. 산과 처마의 만남 참으로 대단한 작품이다.

흥례문 지붕의 두 이어진 산줄기가 지붕으로 가려도, 그 사이가 흥례문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복원 공사중인 흥례문. 2000년 12월 말까지 공사기간이 잡혀있다.

그 규모가 광화문 못지 않다. 정전 앞 제 2문에 해당하며 우진각 지붕의 중층구조이다. 유화문과 기별청도 복원되고 있으며 긴회랑도 거의 마무리 상태이다.

불과 몇년 만 거슬러 올라가도 이곳에는 중앙청(조선 총독부)청사가 자리하고 있었다.

  일제가 이 청사를 세우기 위해 흥례문 구역을 철거한 것이 1916년 이었으니 84년 만에 흥례문이 다시 서게 되는 것이다. 대단히 기쁜 일이다. 하지만 조선 총독부 청사의 흔적조차 남기지 않은 것은 잘못된 일이라 생각된다. 치욕적인 역사이지만 우리들의 후세들을 위해서라도 조선총독부 역시 완전 철거가 아닌 이전의 형식으로 그 모습을 남겼어야 했다
 
 

금천(영제교): <홍례문안에는 금천(錦川)이란 내를 두었다. 금천에는 홍례문에서 근정문으로 가는 영제교가 있고, 동서 양쪽에는 수각(水閣)을 두었다. 금천과 영제교도 모두 1917년 일제가 없앤 것을 최근에 복원하고 있다.>

영제교의 길이 13.85m, 너비 9.8m
세 칸으로 나뉘어져 있고, 중앙이 3.4m, 양쪽이 3.2m이다.영제교 가운데는 임금만이 다니시는 어도이다. 임금님은 이 길을 어가를 타고 지나가셨다.

배산임수(背山臨水).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집 뒤에 산이 있고 앞에는 물이 흐른다. 산이 많은 우리나라에서는 집자리로서 가장 이상적인 공간 배치이다.

서울은 풍수 지리에서 빼어난 땅으로 알려져 있고, 그 가운데 가장 좋은 땅을 골라 지은 것이 경복궁이다.

그러나 경복궁도 모자란 점이 있었다. 바로 명당수가 모자란 점이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궁궐 서북쪽 물을 끌어들여 만든 것이 금천이다. 금천은 물만이 아니라 북악산 정기를 궁 안으로 끌어오는 구실도 하였다.

왼쪽으로 다리 앞에 서수가 보인다. (자세히 보면 보일 것이다.) 원래 영제교의 홍예(무지개)는 두 개이다. 위는 한 개.

금천은 명당에 들어오는 잡귀를 막는 구실도 하였다. 마치 적군을 막기 위해 성 주위에 목책을 두르거나 해자를 파듯이 말이다.

또한 이곳이 왕이 사는 성스러운 명당임을 알리는 구실도 하였다. 금천은 저 너머에는 신성한 궁궐이 있다는 것을 마지막으로 확인시키기 위한 상징이라고 하겠다.

 
  

영제교의 네 마리 석수

영제교를 건너다가 좌우를 살펴보면 4마리의 서수가 강바닥을 뚫어져라 감시하고 있다. 광화문 밖의 서수가 뿔이 보이지 않는 데 반해 영천교의 이 서수들은 옆 사진들처럼뿔들이 보인다.

정전의 앞이기에 더욱 삼엄한 경비를 서고 있는 듯 하다. 이처럼 중요한 다리나 건물 주위에는 잡귀와 사악한 것들의 근접을 막기 위해 이처럼 상상의 동물들을 설치하였다. 영제교의 이 네마리 서수는 조선 후기의 석조미술을 대표하는 조각 솜씨를 보여준다. 힘찬 발톱과 부릅뜬 눈, 억센 비늘 속에 생동하는 힘이 잘 표현되어져 있다.
<경복궁-설화당-,경복궁-빛깔있은 책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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