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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궁의 역사

 

1.궁의 역사

경복궁   


복궁 창건(1395년),세종 대 (재위기간 1418~1450년)의 법궁 체제, 명종 대 (재위 기간1545~1567년)의 재건과 임진왜란으로 인한 소실(1592년),270여 년 동안의 공궐 이후 대원군의 중건(1865년), 민족 수난기(1910~1945년)의 파괴, 변형, 왜곡과 해방이후의 원형 복원 과정으로 나누어 경복궁의 역동적인 변화를 서술하고자 한다.


경복궁 안에는 정전, 편전, 침전을 중심으로 수많은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각 건물의 기능을 이해해야만 궁궐에 대한 종합적인 이해도 가능할 것이다.

궁궐 건축의 설계와 건물 이름에 담긴 유교 사상에 대한 이해를 통해 조선왕조의 궁정 문화와 양반 관료 문화의 성격을 이해하는 실마리를 제공하고자 한다.

 

창건 경복궁

 조실록4년(1395) 9월 29일의 기사를 보면 창건 당시의 규모를 알 수 있다.
연침. 동소침.서소침.보평청.등 내전 건물과 정전, 동서각루, 동서누고등이 행랑으로 둘러싸이거나 천랑으로 연결되어 배치되었고 무은 정전 앞 남행랑에 저문을 두고 다시 그 앞쪽에는 오문(남문,)을 배치 하였으며 그 양쪽에 월화문(서문)과 일화문(동문)을 배치하였다.

<근정전정지회백관지도>

조선 전기에 근정전에서 정월 초하루와 동짓날에 벼슬아치들이 임금께 하례를 올리려고 조회에 모일 때 설 자리를 표시한 그림이다. 임금이 정좌하는 어좌의 측근에는 보검을 받든 관리와 도총관이 자리잡고, 건물 내부 이상의 종친이, 서쪽에는 종 2품 이상의 종친이 서쪽에는 종2품 이상의 문무 양반 관료, 6명의 승지등이 늘어선다.

향안 곁에는 기록을 맡은 사관이 자리잡고 상층 월대 동쪽에는 정 3품 이하의 종친과 정 4품 이상의 시종 신하가 늘어선다. 하층 월대와 뜰에는 품계에 맞추어 차등 있게 문무 관리가 자리 잡되 정 3품 이하의 문반은 뜰 동쪽에 정3품 이하의 무반은 뜰 서쪽에 선다. 백관의 둘레에는 갑옷을 입고 창검을 지닌 궁궐 호위 군사가 빙 둘러서고 그 밖으로 여러 깃발을 둘러 세운다.

 

조선실록은 정확한 기록이 없다. 한편 정전, 편전, 침전으로 구성된 핵심 부분 외의 궐내 시설에 대해서는 규모, 위치, 기능에 대한 설명 없이 주방, 등촉인자방, 상의원, 양전 사옹방, 상서사, 승지방, 내시 다방 등 생활을 위한 최소한의 시설과 경흥부, 중추원, 삼군부 등중요 관청만을 나열하고 있다. 전체규모가 390여 칸이었다고 끝을 맺고 있다.그러나 그것보다는 훨씬 많았을 것이다.

배치의 원리와 사상새 궁전의 완공을 축하하기 위하여 궁궐 안에서 연회가 베풀어진 날(완공 한 달 뒤인 10월 5일)이었다. 정도전은 왕명을 받들어 궁, 전, 누, 문 등의 이름을 지어 올렸다.

"궁궐이란 임금이 정사를 다스리는 곳이요, 사방이 우러러보는 곳이요. 신민들이 다 나아가는 곳이므로 제도를 장엄하게 해서 위엄을 보이고 이름을 아름답게 지어 보고 듣는 자에게 감동을 주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궁은 경복, 연침은 강녕, 동소침은 연생, 서소침은 경성(천지운행과 만물생장의 순서를 뜻함),편전인 보평청은 사정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또 전정과 전문은 근정, 동서누고는 각각 융문과 융무(문무를 겸하여 관장한다는 뜻), 오문은 정문(천자는 남쪽을 향하여 바르고 큰 정치를 편다는 뜻)이라고 명명하였다.

 

삼문 삼조

정 배치도와 건물 이름에 담긴 뜻을 알면 경복궁 배치의 원리를 해석할 수 있다.

궁전은 회랑으로 둘러싸인 3개의 중정으로 구성되었다.
남북 중심축 위에 정문, 금천교, 근정문, 근정전, 사정전, 강녕전 등이 앞뒤로 정연하게 배치되어 있다.
맨 앞 중정 안에는 금천교만 배치되고 가운데 중정에는 정전인 근정전만 배치되었다.
맨 뒤 중정에는 편전인 사정전과 침전인 강녕전, 연생전, 경성전 등이 배치되었다.

3개의 중정을 앞뒤로 연속시킨 복합 중정형 배치의 원형은 무엇인가 주례고공기의 궁실 제도에 관한 규정에서 '삼문 삼조'라는 조항을 관련 지을 수 있다.


삼조=맨 앞부터 외조,치조, 연조로 연속되는 3개의 중정을 궁실 제도의 원초적 형식으로 규정 한 것이다.
연조=왕과 왕비, 왕실 일족이 생활하는 거주 구역으로 침전이 있다.
치조=왕이 신하들과 정치를 행하는 공공 구역으로 정전과 편전이 자리한다. 정전은 조례를 거행하고 법령을 반포하며 조하를 받는 곳이고, 편전은 왕이 중신들과 국정을 의논하는 곳이다.
외조=조정의 관료들이 집무하는 관청이 있는 구역이다.

삼문은 외조의 정문인 고문(외문),외조와 치조 사이의 치문(중문), 치조와 연조 사이의 노문을 말한다.
그러나 경복궁은 삼문 삼조의 바탕을 하면서도 나름대로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정전의 좌우에 대칭으로 세워진 검물 이름에 문무, 일월, 생성의 의미를 부여함으로 자연의 질서와 법칙에 순응하여 문무를 모두 숭상하는 정치를 펴야 한다는 유교적 이상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정명에 담긴 이와 같은 유교적 명분은 한성의 4대문과 그 중앙에 위치한 종루의 이름짓기에도 반영되어 인의 예지신의 오상을 오행 방위에 해당하였다.


창건 경복궁는 왕권 강화 이전 유신들의 추구하던 재상 중심의 정치에 적합하도록 설계된 것 처럼 보인다.
궁궐의 전체 규모가 몇 백 칸에 불과하다.

왕실 가족의 전유 공간인 연조에 세채의 침전밖에 없다.

궁성 안의 일을 도맡을 관청으로 상의원, 사옹방, 상서사, 승지방, 내시 다방 등 최소한의 부서만을 두었다.
건국과 동시에 군사 기능을 담당하였던 중추원과 중앙군 소속의 무반을 통솔하던 삼군보(군령과 군정을 총괄하던 군사 기구) 등을 궁안에 둔 것은 왕조 초기의 상화을 반영한 것이다.


정도전의 말
"궁원의 제도가 사치하면 반드시 백성을 수고롭게 하고 재정을 손상시키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고, 누추하면 조정에 대한 위엄을 보여 줄 수 없게 될 것이다. 검소하면서도 누추한 지경에 이르지 않고, 화려하면서도 사치한 지경에 이르지 않도록 하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나 검소란 덕있는 것이고 사치란 커다란 악이니 사치스럽게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검소해야 할 것이다. 띠집과 흙 섬돌로 꾸민 경우에는 마침내 태평성대를 이룩할 수 있었고,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요대경실을 꾸민 경우에는 위망의 화란을 구제할 수 없었던 것이다.....................(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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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궁 체재의 완성

태종 대의 보완

종 4년에는 급기야 환도 준비의 일환으로 이궁인 창덕궁이 창건되면서 경복궁을 대신하게 되었다.
태종 11년에는 이른바 명당수를 금천으로 끌어들였다.
태종 12년에는 중국 사신을 영접하기 위하여 원래 있던 작은 누각을 헐고 그 서쪽에 새로 경회루를 세워, 그 둘레에 넓은 못을 파 아름다운 경관을 조성하였다. '경회'는 임금과 신하의 합일을 뜻하는 말로, 당시 세자였던 양녕대군이 현판 글씨를 쓴 일은 유명하다.

세종 대의 완비

태종은 경복궁으로 거처를 옯기지 않았으나 세종은 재위 3년이 되던 해부터 자주 경복궁에 이어하여 궁전을 수리하고 세종 8년에는 집현전 문신들에게 문과 다리 이름을 명명하게 하였다. 이때 정해진 문의 이름은 홍례문,광화문, 일화문, 월화문, 건춘문, 영추문 ,등이며 금천에 걸쳐진 다리의 이름은 영제교로 하였다.이 일은 경북궁 창건후 30년후의 일이다. 정문의 명칭도 오문에서 홍례문으로 바뀌었다.
궁전과 행랑으로만 된 초기의 경복궁은 이때 비로소 궁성과 함께 궐문을 갖춘 명실상부한 궁궐이 되었다.

세종 8년에 근정전을 수리하고 ,9년에는 동궁인 자선당을 창건하였다. 10년에는 건춘문을 수리하고  11년에는 경회루와 사정전을 중수하였으며 15년에는 강녕전을 수리하고 아울러 북문을 신설하여 궁성 4문 체재를 완성하였다.
같은 해 천후 관측소인 간의대를 궁성 서북 모퉁이에 세우고 16년 4월에는 홍례문밖에 있는 동대를 궁성 서북 모퉁이에 세우고 16년 4월에는 호례문밖에 있는 동서랑을 의정부 육조와 여러 관청이 숙직하거나 대기하는 곳으로 삼았다.

같은 해  8월에는 시간을 측정하는 보루각을 세우는 한편 융문루와 융무루를 수리하였다.
17년 9월에는 주자소를 궁궐 안에 설치하였다.
20년에는 강녕전 서쪽에 천체 운행의 관측을 위하여 흠경각을 세움으로 과학 문명의 첨단 시설을 궐안에 모두 갖춘 셈이다.

25년에는 언문청을 설치하여 우리글을 완성시키는 산실로 삼았다.
후궁영역을 넓히기도 하였다. 세종 22년에는 왕과 왕비가 동궁으로 옮긴 뒤, 3년 만인 세종 25년에 처음으로 교태전을 후궁 영역에 건립하였다.
같은 해 4월에는 상서사와 춘추관을 궐안에 새로 지었고, 5월에는 여러 문의 이르믕 ㄹ새로이 명명하였다.
세종 말년인 31년(1449) 6월에는 이른바 정궁안에 강녕전, 연생전, 경성전, 사정전, 만춘전, 천추전 등이 갖추어졌다.

뒤쪽 후궁안에 소실로 함원전, 교태전, 자미당, 인지당, 종회당, 송백당, 청연루등이 건립되었다.
그리하여 세종 대에 침전 구역과 편전 구역이 분명하게 나누어지게 되었다.

법궁의 발전과 소실

법궁의 발전

조 때에는 수리도감을 설치하여 경복구을 수리하였고 예종 때에 숙직 군사를 위햐여 선공감에서 영추문 안에 가가(임시거처) 10칸을 지었다.
성종 때에는 제조와 낭청을 따로 임명하여 근정전을 새로 칠하고 경회루를 중수하는 등 크게 수리하였다.

후원은 정종 대에 상림원으로 불렸다. 세종이 후원의 새와 꽃을 모두 민간에 나누어 준 뒤로 버려졌다.
그러다가 새로 서현정(활쏘는 곳), 취로정(농사 관찰하는 곳, 세조 2년 3월 5일 준공), 관정전, 충순당(궁장밖에 위치)등이 지어지면서 다시 후원으로 가꾸어졌다.

궐내 관서는 승정원, 홍문관(승정원 서쪽의 옛 집현전), 상서원(보루각 남쪽), 춘추관(상서원 서쪽), 예문관(승정원 서쪽), 승문원(ㅎ롱례문 밖), 교서관(사옹원 남쪽의 내관), 사옹원(승정원 남쪽의 내사옹), 내의원(관상감 남쪽), 상의원(영추문 안), 사복시(영추문 안의 내사복), 사도시 (내의원 남쪽), 관상감 (상의원 남쪽), 세자시강원, 전설사(홍례문 종쪽), 전연사 (홍례문 서쪽), 내반원(경회루 남문 서쪽), 오위도총부(광화문 안)등으로 임진왜란 때까지 경복궁 안에 있었다.

명종 대의 소실과 중건

종 8년 (1553) 9월 14일에 일어난 불로 근정전만을 남긴 채 편전과 침전 구역으 건물이 모두 소실되는 창건 이래 최대의 참사가 일어났다.

중건할째 예조판서였던 홍섬(1504~1585년)왕명르 받들어 지은 '경복궁중신기'에는 중건 전후의 사실이 명종 실록 보다 상세하게 묘사되고 있다.

1. 중종 때 불탄 동궁을 짓기 위하여 공사를 하던 중 명종 8년9월 13일에 화재가 일어났는데 남으로는 사정전 남랑, 동으로는 강녕전외동랑, 북으로는 청연루 남월랑, 서북으로는 함원전 영태문 북으로는 교태전, 서남으로는 경회문 등이 불타고 오직 근정전, 경회루, 함원전, 청연루만이 남았다.

2. 경복궁 대내에 설치된 선수도감의 조직은 영의정을 도제조로 좌찬성, 이조판서, 공조판서를 제조로 삼아 동궁조성도감과하나로 합치되, 낭료 가운데 일을 잘 주곤할 사람을 뽑아 분조로 일을 맡기고 도청으로 삼았다. 작업장은 8소로 구성되었는데 동궁은 재료가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3월에 먼저 공사를 시작하여 9월에 마쳤다.

3. 공사 규모가 커서 대부분 부역에 의존하였으나 재료는 물길 가까운 곳에서 조달하고 모자란 것은 가원도와 함경도에서 샀다. 노동력은 동운된 군인과 승도가 2,200명이고 대가를 받고 일한 사람이 1,500명이었다.

4. 중건된 건물은 전이 강녕, 사정, 교태, 경성, 연생 다섯, 당이 자미, 양심 둘, 각이 흠경 하나, 합이 비현 하나 등 문랑청방을 모두 합하여 370여 칸이었다.


임진왜란에 의한 소실

복궁과 궁은 누가 없앴는가 우리는 우리 민중이 자신의 노비문서를 태우기 위해 여러 가지 약탈하기 위해 궁을 태웠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역사의 기록은 누가 만들었는가 일제제국주의 시대 사관이 아닌가 그 당시의 기록을 살펴보면 누구의 소행인지 알 수 있다.

유성룡이 불탄 궁궐을 직접 목격한 시점은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군이 한성을 탈환한 뒤인 계사년(1593) 4월 20일이있고 , 이대는 이미 종묘도 불타고 세 궁궐은 모두 무넌진 채였다.
왜군이 한성에 입성하였을 때인 1592년 5월 2일에 경복궁은 온전히 서서 주인 잃은 빈궁궐의 허허로움만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렇다면 평양성 전투에서 패하고 한성만저 탈환당하는 패전을 거듭하던 왜군들이 되각하면서 종표와 궁궐을 비롯한 도성 시설을 방황하고 약탈과 살육을 자행하였던 것은 아닐까?
왜군을 따라 전쟁에 참여한 종군승 석시탁의 '조선일기'에는 왜군이 한성에 입성한 직후에 경복궁을 직접 답사한 내용이 상세하게 적혀 있어온전하게 남아 있던 경복궁의 모습을 잘 말해 주고 있다.

"북산 아래 남향하여 자궁(경복궁)이 있는데 돌을 깎아서 사방벽을 둘렀다. 다섯 발자국마다 누가 있고 열 발작국마다 각이 있으며 행랑을 둘렀는데 처마가 높다. 전각의이름은 알 수 없다. 붉은 섬돌로 도랑을 냈는데 그 도랑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른다. 정면에는 돌다리가 있는데 연꽃 무늬를 새긴 돌난간으로 꾸며져 있다. 교각 좌우에는 돌사자 네 마리가 다리를 지키고 있다.

그 한가운데에는 돌을 다듭어 담을 쌓았는데 높이가 여덟 자이고 귀퉁이마다 방향에 맞추어 네 마리씩 전당이 있다. 돌로 된 기둥 아래위에 용을 조각하였다. 지붕에는 유리기와를 덮고 잇단 기와 줄마다 푸른 용 같다. 서까래는 매단 나무인데 서까래마다 1개씩 풍경이 달렸다.

채색한 들보와 븕은 발에는 금과 은을 돌렸고 구슬이 주렁주렁 달렸다. 천장 사방 벽에는 오색팔채로 기린, 봉황, 고아작, 난, 학, 용 호랑이 등이 그려져 있는데 계단 한가운데에는 봉황을 새긴 돌이 그 좌우에는 단학을 새갠 돌이 깔려 있다. 여기가 용의 세계인지 신선이 사는 선계_인지 보통 사람의 눈으로는 분간할 수 없을 정도이다.

왜군이 입성당시는 경복궁은 불에 타기는커녕 신선이 사는 곳으로 여겨질 만큼 아름다운 모습을 갖고 있어 종곤왜승의 놀라움과 탄성을 자아냈던 곳이다.
그리고 왜군이 입성하였을 때 돌로 쌓은 경복궁 안에 무수한 전각과 행랑이 있었으나 이름을 알 ㅅ 없도록 현판을 모조리 떼어낸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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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 건

고종 이전의 중건 논의


'복궁 중건'이라는 조선왕조 후반기 최대의 건축 과제는 이후 270여 년 동안인 실행에 옮겨지지 못하였다. 물론 경복궁은 중건을 가장 먼저 책임져야 할 왕인 선조는 중건 계획을 구체적인 단계까지 입안하였다.'선조실록'에 실린 여러 기사에 의하면 춘추관에서 중건에 필요한 자료, 곧 창건 때의 자료와 성종 때의 수리 기록인 '경복궁조성의궤'와 명종 때의 중건 기록을 한데 묶어 등서로 만들어 왕과 주무 관청인 공조에 바쳤다.

그러나 중건 계획은 전쟁의 피해 극심으로 중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풍수적으로 경복궁터가 깋지 못하다는 풍수적인 믿음도 한 몫했다. 결국 경복궁을 중건하기 위하여 준비한 재료로 창덕궁을 중건하였다.

광해군은 창덕궁, 창경궁을 중건하는 데 그치지 앟고 인경궁과 경덕궁(경희궁)을 창건하며 재위 말년까지도 경복궁 중건을 회피하였다. 그 결과 인조반정 이후 인경궁이 헐렸어도 도성 안에는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등이 동서로 있어 경복궁을 중건할 현실적인 필요가 없어지게 되었다.

고종 대의 중건

중건 과정

종 2년 (1865) 4월 2일의 전교 이후 중건 공사는 혹심한 재정적 궁핍을 겪으면서도 2년 7개월 만인 고종 4년 (1867)11월에 거의 완공되었다. 창덕궁에서 경복궁으로 270여년 만의 이어가 이루어진 것은 그로부터 8개월 후인 고종 5년 7월 2일이었다.

중건공사는 궁성>내전>외전>외전>경회루>별전>행각>순으로 진행 되었다.
신무문 밖 후원에 새로운 건물인 융문당, 융무당, 비천당, 등을 창건한 것은 1868년(고종5)이었으며 ,정부 기관의 시무처인 궐내 각사를 계속 지어나갔다. 이듬해 궁성 북부에 다시 건청궁을 지었다.
1873년 12월에는 대비전인 자경전이 소실되어 1876년(고종13)4월에 자경전이 중건되고 교태전, 자미당, 인지당, 등의 개건이 완료되었다.
1873년 11월 불이 났다. 총 830여 칸이 소길되고 조선 후기 궁중 문화의 유산도 대부분 소실 되었다. 대보와 동궁의 옥인만을 겨우 건졌을 뿐 모든 보와 부신을 잃었다. 이 때 잃어 버린 건물은 1888년(고종25)에 가서야 복구되었다.


배치 계획과 원리

복궁 배치 계획상의 특징은 무엇일까?

경복궁창덕궁내상량문에 실린 중건 당시의 상량문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청나라 대동원의 저서인  '대씨유서고공기도'와 창덕궁과 경희궁의 궁실 제도를 참작하였다. 배치의 사상적 원리로서 역상(태극과 사상, 팔괘)을 취한 것은 물론 밤하늘의 별자리 가운데 제왕별자리(탬원과 자미원에 각각 소속되어 있음)의 배치를 본땄다.
천문학은 예로부터 제왕학이다. 궁정 예술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하늘에서 북극성을 중심으로 천체의 모든 별들이 운행하듯, 땅 인간 사회에서는 왕이 중심이라는 사고 때문에 왕은 북극성에 비유되었다. 궁궐의 정전을 자극전, 자신전등으로 명명한 것도 그 이유다.

중국을 비롯한 동양 사회에서는 별자리에 이름을 붙일 때 궁궐을 비롯한 사회 조직을 별자리에 투영시켰다. 강녕전 일곽의 다섯 채 건물이 별자리의 오제좌에 해당하는 것과 같다.
중창된 경복궁의 핵심부는 정전(북극성)>편전 세 채(삼광지정)>왕의 침전 다섯 채(오제좌)순으로 배치되어 천문도의 별자리를 모방하고 있다고 볼 수있다.
왕비의 침전(태극)>문(음양)>옹의 침전 다섯 채(오행)로 태극도설과 일치한다.

 

현재의 복원 계획과 시행

   

 

기간

복원구역

1단계

1990.1~1995.12.

침전 지역

2단계

1994~1997

동궁 지역

3단계

1997~2000

진전(태원전)지역

4단계

2000~2004

홍례문 지역, 수정전 지역

5단계

2003~2009

광화문, 서십자각, 외곽 담장, 자경전, 집경당, 및 함화당 제수합 지역, 집옥재 지역, 흥복전 지역, 건청궁 지역, 복원하지 않은건물터 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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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궁 일곽

궁은 궁궐을 뜻하기도 하지만 좁게는 궁궐내에서 편전과 왕의 침전이 있는 구역을 가리킨다. 후궁은 정궁 뒤쪽에 있는 궁전을 가리킨다.왕비의 침전은 왕의 침전 뒤편에  따로 지어지면 (경복궁, 경희궁)후궁에 소속되나 왕과 왕비의 침실을 한 건물에 두면(창덕궁 대조전) 정궁으로 본다.그러나 후궁은 왕비의 침전을 제외한 내명부 소속 궁녀들의 생활 영역 전체를 뜻한다.

경복궁의 후궁지역은 북궐도형에서 보면 강녕전, 교태전, 자경전으로 이어지는 침전 구역의 동쪽과 동궁의 북쪽에 해당된다.
자경전 동쪽과 남쪽은 집희당, 춘소당(침방), 취운당(수방),응향당, 함정당, 계응당, 자운당, 보월당, 복회당(생물방), 난지당 등이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자경전 이북에 자리잡은 화락당, 벽혜당, 대향당, 정훈당, 건기합, 요광당, 벽월당, 영보당, 제수합, 등 수많은 건물은 여러 직능을 맡은 궁녀들의 거처와 일터였다. 그러나 지금은 제수합 한 채만 남아있다.


외 조

조는 궁궐의 정문에서는 가장 가깝지만 연조로부터는 가장 바깥쪽이므로 외조라고 한다. 정치를 보관하는 관청이 자리잡고 있는데 동궁에 딸린 관청 가운데도 외조에 속하는 것이 있다. 이 관청을 궐내 각사라 한다.
이것은 문직 공서, 무직 공서, 잡직 공서로 나뉜다.

 
 궁의 제도

전조후침의 원칙보다 실제로 조선왕조 궁궐에서 중요시한 것은 오례의 각종 의식을 어느 장소에서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 하는 기능적인 문제였다.
궁궐은 종묘와 사직 다음으로 예의 질서를 실천하는 상징적인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가례와 관련한 행사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중국 황제에 대한 망궐례나 중국 사신이 가져온 칙서를 받는 의식, 그리고 왕이 문무백관으로 부터 조하를 받는 의식이었다. 이 행사는 모두 궁궐의 정전에서 치러졌다.

이 밖에 왕세자의 관례나, 왕비를 맞는 의식 또는 왕세자빈을 맞는 의식들이 정전에서 치러졌다. 또한 정전에서는 종묘대제 같은 큰 제사를 치르거나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치르는 하례를 거행하고, 교서를 반포하거나 문무과의 전시를 치르고 문과의 과거 급제자 명단을 게시하는 의식도 거행했다.

빈례의 경우 중국 황제의 사신을 영접하는 행사는 태평관에서 치르지만, 일본, 유구 등 이웃나라 사신은 정전에서 맞이한다.

내정전 즉 내전 정전에서는 왕비가 정2품 이상 대신의 부인으로부터 하례를 받는 의식이 치러진다.

문무백관이 왕세자에게 조하를 올리는 의식은 동궁 정당에서 치러졌다.

신하들이 정사를 논의하기 앞서 옹에게 예를 표하는 의식 중에는 특별히 한 달에 네 번 치르는 조참과 매일 예를 올리는 상참이 있다.

조참은 정전의 문에서 치르고 상참은 편전에서 치른다.

사열의식
군례의 하나인 큰 사열 의식과 섣달 그믐 전날밤에 악귀를 쫓는 뜻으로 치르는 대나 의식은 광화문에 어좌를 설치하고 거행한다.

왕실 상
왕실에 상을 당하여 흉례를 치를 때에는 보통 편전을 혼전으로 삼아 의식을 치른다.

왕의 즉위식
일반적인 선왕사망에 따른 왕위 즉위는 대개 근정문에서 치렀다. 먼저 선왕의 빈전에서 왕권을 상징하는 대보를 전달하는 의식이 치러지고 이어서 새 왕이 근정문에서 하례를 받고 나서 즉위교서를 반포하게 되는 것이다.

조참
조참이 있을 때, 왕의 위치는 근정문의 한가운데였다고 한다.
따라서 근정문은 단순한 통과를 위한 건물이 아니고 문에서 일정한 의식을 치르는 장소였다.

조참이 있을 때는 사정전에서 근정전 동쪽 처마 밑을 지나 근정전 마당을 거쳐 근정문에 이르게 된다.
후대에 중건된 근정문은 정면 3간에 측면 2간으로 충분한 공간을 확보하고 있다. 어좌를 설치하기에 필요한 공간을 확보한 결과이다.

조하의식
보통 왕은 침전에서 사정전으로 나왔다가 가마를 타고 사정문을 거쳐 근정전 어좌로 오른다.
이 때 왕은 근정전의 뒤편문을 통해 정전에 들어가 어좌에 올랐던 것으로 보인다.

세종 실록의 그림을 보면 정월 초하루 경복궁 근정전에 문무백관이 조하를 드리는 모습에서 그 참가자의 숫자가 무려 3천명을 넘는다. 근정전 앞 넓은 마당은 이러한 행사를 대비한 공간으로 마련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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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궁의 제도

조선왕조의 궁궐기본적으로 내전과 외전 두부분으로 구성 되어있다.

내전- 침전을 비롯한 궁중의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곳
외전- 조하의식 등 공식적인 궁중 행사를 치르고 정치를 행하는 곳이다.

외전이 궁궐 앞에 놓이고 내전이 뒤에 위치하기에 그 위치 관계는 흔히 전조후침으로 부른다.

[주례]를 비롯한 고대 경전을 바탕으로 후대 경전 해석가들이 하나의 이상적인 궁궐 제도로 주장한 것은 천자는 5문3조 제후는 3문 3조로 이루어진다는 설이다.

3조 - 연조, 치조, 외조

천자의 궁은 5개의 문, 제후는 3개의 문을 둔다는 것이다.

문의 명칭은 노문과 치문으로 불린다.
치조의 밖에 있는 치문에는 좌우에 높은 대가 있어 양관이라 불린다. 노나라에서는 치문을 궐문이라고 불렀다.

궐이란 좌우에 높은 대를 갖춘 문을 의미하며, 이 곳에 새로운 정책을 걸어 백성들에게 알렸다고 한다.

궁궐의 궐은 이 궐대를 가리킨다. 치문 밖은 신하들이 나라 일을 보는 이조가 있으며 그 밖은 궁성의 문인 고문이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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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역대왕의 궁궐역사 (가로안은 재위기간)         

 

궁궐 연표

연대

연도

연혁

태조 3년 8월

1394

 왕이 남경 고려 옛궁궐터를 궁궐터로 정하였다.

태조 3년 10월

1394

 한양으로 도읍을 옮겼다.

태조 4년 9월

1395

 궁궐이 조성되었다.

태조 4년 10월

1395

 신궁의 명칭을 경복궁이라 하고 제전각 이름을  강녕전, 연생전, 경성전, 사정전, 근정전, 융문루,  융무루, 근정문이라 하였다.

태조 7년

1398

 궁성의 건축역사가 있었다.

태조 12년 5월

1412

 큰 누각을 짓고 이름을 경회루라 하였다.

세종 8년 10월

1426

 각 문과 다리 이름을 홍예문, 광화문, 일화문, 월화문, 건춘문, 영추문, 영제교라 하였다.

세종 13년 4월

1431

 광화문을 개축하였다.

세종 16년 3월

1434

 광화문에 새 종을 안치하였다.

세종 22년 5월

1440

 새 문의 명칭을 정하였다(보루문, 영의문, 동명문, 서명문).

세조 2년 3월

1456

 후원에 새 정자를 짓고 취로정이라 하였다

연산 12년

1506

 경회루 연지에 만세산을 만들어 놀이터로 하였다.

명종 8년 9월

1553

 큰 호재가 나서 강녕전, 사정전, 흠경각등이 화재.

명종 9년 9월

1553

 소실된 건물들을 재건하였다.

선조 25년 4월

1592

 임진란에 경복궁을 비롯한 모든 궁궐이 소실

고종 2년 4월

1865

 대왕대비로부터 경복궁 중건 하교가 있었다.

고종 2년 4월

1865

 중건공사가 시작되었다.

고종 4년 10월

1867

  중건이 완료되었다.

고종 4년 11월

1867

 고종이 근정전에 임하여 조회를 하였다.

고종 10년

1873

 건청궁의 역사가 있었다.

고종 10년 12월

1873

 자경전이 화재로 소실되었다..

고종 13년 11월

1876

 대화재가 발생하여 내전 830여칸이 소실 되었다.

1917년 11월

..

 창덕궁 내전이 불타 그 복구를 위해 경복궁의 교태전, 강녕전 등을 헐었다..

1918~1920년

..

 경복궁 내전의 재목으로 창덕궁 전각을 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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