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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산서원(玉山書院)과 독락당(獨樂堂)
월성 손주사택
최치원선생 유거지(留居地)
경주 표암(瓢岩)과 표암재 
경주최씨가옥
경주시 강동면 양동 이희태 가옥
경주 양동 민속마을
옥산서원(玉山書院)-1 옥산서원(玉山書院)-2

옥산서원(玉山書院)

옥산서원(玉山書院)은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선생을 봉향하는 서원(書院)으로 1572년(선조 5년)에 창건되었다. 이언적(李彦迪) 선생은 조선조의 성리학자(性理學者)로 도학으로 이름이 드높았으며, 동방오현의 한 사람으로 추앙되었다.옥산서원(玉山書院) 태극문(太極門) 안에는 임금이 쓴 글씨와 편지, 회재선생(晦齋先生)의 글씨, 퇴계선생(退溪先生)의 글씨를 비롯해서 「삼국사기(三國史記)」 완전 1질이 보관되어 있어서 학술연구(學術硏究)에 좋은 자료(資料)가 되고 있다.

옥산서원을 둘러본 뒤에 자계천을 따라 500m 쯤 더 올라가면 독락당(獨樂堂)(보물(寶物) 제413호)이다. 이곳에는 사랑채인 독락당(獨樂堂)과 ㅁ자형의 안채, 노비들이 거처하던 행랑채와 공수간(供需間:음식을 장만하는 공간), 임금의 하사품 서책을 보관하던 어서각(御書閣)가 사당, 그리고 별당인 계정(溪亭)등이 합쳐 큰 살림집을 이루고 있다.

서원(書院) 내 독락당(獨樂堂)은 이언적이 낙향하여 학문에 몰입하던 곳으로, 주위에 수려한 정자와 계곡이 어울려 운치를 더해 주고 있다. 또 독락당(獨樂堂) 뒷편 정혜사지(淨惠寺地)에는 일반탑과 판이하게 다른 양식의 정혜사지13층석탑(淨惠寺地十三層石塔)이 세워져 눈길을 모으고 있다.

<자료출처 : 관광경주, 경주시, 1997>

다음은 「마이다스 동아일보 양영훈의 테마여행」에 소개된 글이다.

무릇 세상에는 끊임없이 변할 때 더 좋은 것이 있는가 하면, 변하지 않아서 더 좋은 것도 많다. 선인들의 자취가 서린 문화유적(文化遺蹟)은 오랜 풍상에도 변치 않았을 적에 더 큰 감동을 준다. 더욱이 그 유적(遺蹟)을 둘러싼 자연(自然)조차도 옛 모습 그대로라면 감동은 더욱 커진다. 경주(慶州) 안강(安康)의 자옥산 골짜기에 들어앉은 옥산서원(玉山書院)과 독락당(獨樂堂)이 바로 그런 곳이다.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과 관련된 이 유적지와 주변의 산수는 400년이 넘는 세월을 겪었으면서도 원래 모습이 오롯하게 살아 있다.

옥산서원(玉山書院) 주변의 자연은 경치 좋은 자옥산 골짜기에서도 가장 풍광명미(風光明媚)하다. 서원 앞을 흘러가는 자계천(紫溪川)에는 너럭바위들이 층을 이루며 시원스레 깔렸고, 쉼없이 흐르는 계류는 바위마다 아담한 소(沼)와 폭포를 빚어놓았다. 물가 양편에는 그늘을 드리웠다. 그늘 짙은 너럭바위 위에 드러누워 한나절쯤 쉬노라면 갖은 시름이 절로 씻겨질 법하다. 이곳에 옥산서원(玉山書院)이 들어 선 것은 회재가 죽은 지 20년 뒤였다. 회재의 죽음을 애도하던 영남(嶺南) 사림(士林)이 그의 학덕을 기려 묘우(廟宇)를 세운 것. 그리고 2년 뒤인 1574년에는 선조(宣祖)가 '옥산서원(玉山書院)'이라는 현액(懸額)을 하사해 사액서원(賜額書院)으로 승격됐다. 그 뒤로 크고 작은 화재로 소실된 몇몇 건물이 중건되기도 했지만, 전화(戰禍)를 입지 않아 오늘날에도 옛 모습 그대로다.

이 서원(書院)은 출입구 강당 사당 등이 일적선상에 놓인 전형적인 전학후묘(前學後廟)형태. 정문인 역락문(亦樂門)을 들어서면 먼저 강당 영역에 이른다. 무변루(無邊樓)라는 2층 누각과 강당인 구인당(求仁堂)이 마주하고, 두 건물 사이의 중정(中庭)좌우에 동재와 서재가 있다. 그리고 강당 뒤편은 돌담으로 둘러싸인 사당 영역. 건물의 배치나 면적이 안동(安東)의 병산서원과 엇비슷해 보이는데도 병산서원 같은 상쾌함이나 호방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건물마다 기단(基壇)이 낮은 탓도 있거니와, 무엇보다 강당에서 마주보이는 무변루의 폐쇄성 때문이다. 즉 병산서원의 만대루는 사방이 시원하게 트여 바깥 풍경을 한껏 끌어안는 반면, 무변루는 마루 양쪽에 방이 있는데다 개울 쪽의 백체를 막아버려 시야가 차단되어 있다. 게다가 구인당 양쪽의 온돌방도 전면을 벽체로 마감함으로써 더욱 갑갑해 보인다. 밖에는 눈길도 주지 말고 오로지 학문에만 정진할 것을 강요하는 구조다.

찾아가는길: 경주 터미널에서 출발하여 경주 동국대가 위치한 석장동 앞길을 지나 925번 지방도를 따라 안강 방향으로 계속간다. 안강 읍내로 들어가면 925번 지방도로와 28번 국도가 만나는 사거리에서 좌회전해서 28번 국도를 따라 약 4km 가다가 두 번째 신호등에서 우회전하여 2km 가면 옥산모텔 표지판이 보인다. 그곳에 주차하고 옥산서원까지 걸어 들어가야 한다.
내부문화재: 삼국사기,  이언적수필고본일괄,

 

독락당(獨樂堂)

독락당(獨樂堂)

옥산서원(玉山書院) 서북쪽 700m 지점에 독락당(獨樂堂)이 있다. 독락당(獨樂堂)은 보물(寶物) 제41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516년(조선 중종 11년)에 건립(建立)되었다. 이 곳은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선생(先生)이 1532년에 조정에서 물러나 고향에 돌아와 지은 집의 사랑채이다. 처음에는 초려삼간(草廬三間)을 지어서 이 곳 산수(山水)와 자연(自然)을 사랑하며 공부하고 사색(思索)에 잠긴 곳이다. 정면에는 옥산정사(玉山精舍)란 현판이 걸려 있는데 '옥산정사(玉山精舍)' 현판은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친필이고, '독락당(獨樂堂)' 현판의 글씨는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선생이 썼다.

현재의 건물(建物)들은 후에 증축(增築)한 것이 많으며 이름모를 사람들이 많이 찾아와서 선생의 학덕을 사모(思慕)하고 사당에 참배한 이가 무수히 많았다고 한다. 선생이 심은 산수유와 천연기념물(天然記念物) 제11호로 지정된 중국 주엽나무(독락당의중국주엽나무) 및 죽림과 강계약숙이 지금도 있으며 독락당(獨樂堂) 내에는 보물(寶物) 제524호인 정덕계유사마방목(正德癸酉司馬謗目)과 보물 제526호인 해동명적(海東名蹟)과 보물(寶物) 제586호인 이언적수필교본(李彦迪手筆橋本)이 보관되어 있다.

독락당(獨樂堂)의 오른쪽으로 돌아서 작은 일각문을 지나면 계정, 계곡 쪽으로 개방되어 있는 계정의 마루에 올라앉으면 계곡의 빼어난 풍치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이 정자는 개울 건너편에서 바라다볼 때 그 진면목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사산오대(四山五臺)의 하나인 관어대(觀魚臺)라는 암반 위에 올라앉아 있는데, 작고 아담한 정자(亭子)인데도 마치 2층 누마루처럼 당당하고도 의젓하다. 특히 인공을 초월해 주변의 바위, 나무, 물과 아주 조화롭게 어우러졌다는 점에서 한국 전통 정자의 전범(前範)으로 꼽힐 만하다.

독락당과 이웃하던 정혜사(淨惠寺)는 신라 때에 창건된 유서깊은 사찰이었다. 그러나 1834년의 큰 화재로 폐찰이 되어 과수원과 논밭으로 바뀐 절터를 통일신라 때의 석탑 하나만이 지키고 있다. 높이 5.9m의 정혜사터십삼층석탑(淨惠寺地十三層石塔)(국보(國寶) 제40호)은 불국사 다보탑(佛國寺多寶塔),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과 함께 우리나라 이형(異形) 석탑의 걸작이다.

부문화재:독락당의중국주엽나무,  해동명적(海東名蹟)

 

월성 손주사택

월성손주사택

  이 건물은 우재 손중돈의 11대 지손 손정호가 건립한 가옥이다. 원래 당호를 '교농암'이라 하였으나 손명호가 1866년(고종 3) 문과에 급제하여 궁내부 주사가 되자 이때부터 손주사택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나지막한 동산을 배경으로 남향하여 ㄱ자형 안채와 사랑채를 좌우로 나란히 배치하고 각각 맞담을 쌓아 별도의 앞마당과 출입문을 두어 남녀공간이 확연히 분리된 특색있는 배치를 이루고 있다. 안마당 중앙부에는 초가 방앗간, 외양간을 두고 사랑마당에는 동쪽으로 치우쳐 초당이 있다.

 

나지막한 동산을 배경으로 남향하여 ㄱ자형 안채와 사랑채를 좌우로 나란히 배치하고 각각 맞담을 쌓아 별도의 앞마당과 출입문을 두어 남녀공간이 확연히 분리된 특색있는 배치를 이루고 있다. 안마당 중앙부에는 초가 방앗간, 외양간을 두고 사랑마당에는 동쪽으로 치우쳐 초당이 있다.

안채는 전퇴칸을 둔 1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측에 2칸 온돌방과 부엌이 자리하고 우측에 1칸반 온돌방이 있다. 그리고 부엌과 연접하여 익사를 꾸몄다. 익사는 정침과 동일하게 중앙대청을 두고 좌우에 온돌방 1칸씩 두었으나 측면을 1칸으로 잡았다. 사랑채의 평면형상은 안채와 동일한 ㄱ자형이나 2칸마루에 2칸온돌방을 둔 구성은 정침과 방법을 달리하고 있다. 그리고 익사는 광을 두어 안채와 공간을 구획시켰으나 문을 전후에 두어 실질적으로는 안채에서 이용토록하였다.

  이 건물은 이 지방 주택의 규모가 큰 집들과 공통되는 격식을 갖추고 있으며, 안채와 사랑채의 앞면으로 튀어나온 부분에 널찍한 곳간과 고방을 둔, 조선후기 전통적인 부농의 살림집 모양을 두루 갖추고 있다.
주소 : 경북 경주시 강동면 단구127                       관리기관 : 손정호

 

최치원선생 유거지(留居地)-1 ♣최치원선생 유거지(留居地)-1

상서장(上書莊:최치원선생 유거지<留居地>)

  상서장은 신라말엽의 유명한 문필가 최치원이 태조 임금에게 글을 올린 곳이며, 또한 그가 머물며 공부하던 곳이라고 전해온다. 상서장이 허물어진 후 문창후 최치원 상서장유허비(文昌候崔致遠 上書莊遺虛碑)를 세웠다. 지금 건물은 근세에 후손들이 세운 것인데, 영정각에는 최치원의 초상화가 모셔져 있다.

  이 상서장은 왕정골의 남쪽 등성이가 동북쪽으로 뻗어내려 남천에 다다르는 곳에 기암절벽이 있고 이곳에 고운 최치원 선생이 사시던 상서장이 있다. 최치원은 12세에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 6년만인 18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선주표수현위'였고, 황소의 난 때에는 공을 세워 벼슬이 '한림학사승무랑시어사내공봉'에 이르렀다.

  신라 49대 헌강왕 11년에 그립던 고국에 돌아오니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고 사방에선 도적 떼가 일어나 극도로 불안한 때였다. 선생께서는 태산군, 부성군 등 태수로 계시면서 나라를 바로잡기 위한 의견을 글로 써서 올렸으나 그의 뜻이 나라에 반영되지 않았다.

  선생은 고려 태조 왕건이 임금이 되기전 그의 뛰어난 인격을 격려하여 "계림은 낙엽이 지고, 송악은 솔이 푸르다"라는 글을 올렸다. 고려 8대 현종은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문창후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 후로 선생이 살던 그 집을 상서장이라 하였다.

자료출처 : 신라의 얼(내고장 전통가꾸기) pp. 268∼269 - 월성군, 겨레의 땅, 부처님의 땅 경주, p. 39 - 불지사

 

찾아가는길: 경주 IC에서 포항, 보문방면의 도로를 따라가면 작은 다리를 건너기 전, 왼쪽에 기암절벽이 있고, 이곳에 고운 최치원 선생이 사시던 상서장이 있다.
주소 :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 산 37-2 외 11필 관리기관 : 최치원선생유적보존회

 

경주 표암(瓢岩)과 표암재
 표암(瓢岩)이 신라 왕경을 향하여 돌출하고 있어 반드시 무슨 부(富)가 있을 것이라 하여 표주박을 심었더니 그 잎이 부근 일대에 퍼지면서 바위를 덮었다고 전한다. 호공(瓠公)이 동해에서 건너 올 때 허리에 찬 표주박을 이곳에 풀었다고 하는데 그 후 호공은 박혁거세를 도와 나라 건립에 필요한 지혜와 용맹을 발휘하여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는 전설이 있다.

 이곳은 신라 6촌 가운데 근본이 되는 밑돌부라는 부명이 붙여진 알천양산촌(閼川楊山村)의 시조 이알평공이 하늘에서 내려온 곳이다. 서력 기원전 69년에 6촌장이 여기에 모여 화백회의를 열고 신라건국을 의결했으며, 그후 서력 기원전 57년에 신라가 건국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표암은 경주이씨 혈맥의 근원지인 동시에 신라건국의 산실로서 '광명이세'라는 백성을 다스리는 큰 뜻을 밝히고, 화백이라는 민주정치 제도의 발상을 보인 성스러운 곳이다. 이러한 뜻을 새긴 유허비가 조선 순조 6년(1806)에 세워졌고, 1925년에는 표암재가 건립된 뒤 전사청(典祀廳), 내외삼문(內外三門), 경모대비(景慕大碑), 천강지(天降地) 등이 건립되어 더욱 그 뜻을 기리며 매년 3월 중정(中丁)에 향사(享祀)를 봉행하고 있다.
찾아가는길:경주시 동천동에 있다. 백률사에서 보문단지쪽으로 1Km 정도 가면 좌측 편에 탈해왕릉 입구를 알리는 이정표가 있고 바로 이 길 옆에 있다. 이 도로는 포항 울산간 산업도로이기 때문에 교통량이 많아 특히 조심해야 한다.

 

 

경주최씨가옥
  경주최씨가옥: 이곳 교동에 있는 옛 목조기와 건물들은 200여 년의 역사를 간직한 조선시대의 민가들이다. 경주시 양동리에 있는 조선 시대 민가나 안동의 하회 마을과 같이 큰 규모의 민속마을은 아니지만 부근에 신라시대의 김유신 장군의 생가가 있었다는 것과 지금도 남아 있는 재매정으로 보아 좋은 위치에 자리잡은 조선시대 민가들이다.

  지금 남아 있는 옛 건물들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이곳에 대대로 살아온 최씨의 종가택 건물로서  원래는 99칸의 집이었다고 하나 지금은 'ㅁ'자 모양으로 배치된 가옥만 남아 있다. 현재 이곳에서 중요 무형문화재 제86호인 경주교동법주를 생산하고 있다.

 

 

경주시 강동면 양동 이희태 가옥
  경주시 강동면 양동 이희태 가옥. 이 가옥은 남촌의 대표적 대가로서 두곡고택(杜谷古宅)으로 불리기도 한다. 전하여 오기를 1733년 경 회재 이언적의 6대손인 이식중의 분문가(分門家)로서 건축되었는데, 그 후 다른 분문(分門)인 이조원(李祖源)이 매가하여 천석(千石)에 이르는 부(富)를 누리게 되었다고 한다.

  
 
현 주인 이희태씨는 바로 그의 손자이다. 넓은 대지를 담장으로 둘러싸고 안채와 사랑채, 아랫채를 튼'口'자형으로 배치하고 뒤쪽으로 행랑채와 방앗간채 한채씩을 두었고, 앞쪽으로는 대문간채를 두고 이 대문간채 안쪽에 마굿간을 두었다. 안채만이 'ㄱ'자형 평면이고 나머지는 모두 '一'자형 평면이다

 

 

 

경주 양동 민속마을
 
경주 양동 민속마을
 
경주 양동(良洞)마을(중요민속자료 제 189호)은 선조들의 체취와 삶이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는 곳이다. 마을 뒤편 안강(安康)들의 생산력을 바탕으로 형성된 부촌의 영광이 5백년 묵은 기와집으로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경주에서 경주(慶州)~포항(浦項)간 산업도로를 16km 쯤 달려가면 안강 평야 끝자락에 1백50여 크고 작은 고가와 초가집이 펼쳐진 부채처럼 소담스럽게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조선 중, 후기에 걸치는 다양하고 특색있는 우리나라의 전통가옥 구조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고건축 전시장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강동면 설창산(雪倉山) 기슭에 터를 잡은 양동마을은 1467년 이시애(李施愛)의 난(亂)때 공을 세운 손소(孫昭/1433~1484)와 외손자인 유학자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1491~1553)의 후손들로 형성된 마을이다. 이곳은 민가로는 드물게 보물로 지정된 곳이 3곳이나 되며 중요민속자료 12곳, 향토문화재 11곳 등 문화재급 전통가옥이 즐비하다.

마을은 설창산을 주봉으로 하여 분통골, 안골, 장태골 등 네갈래로 뻗은 구릉에 골따라 자리를 잡아 명문대가의 대저택도 위압감을 느끼게 하기 보다는 몇 번 들른 듯한 정겨움으로 다가온다. 전통적인 마을가옥구조가 대부분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남향집인데 비해 이곳은 말 물(勿)자처럼 뻗어내린 네줄기의 산등성이에 터를 닦은 특이한 배치를 보여주고 있다.

마을 뒤편으로 대(竹)밭이 감싸고 경사지면을 자연스럽게 이용한 지혜가 엿보이는 것이다. 야트막한 뒷동산을 닮아 거북처럼 누운 초가, 하늘을 향해 날렵하게 처마가 들린 기와집들이 토담사이로 보이고 집사이로 골목길이 구불구불 정답게 이어진다.

월성손씨(月城孫氏) 종택은 위세높은 대종갓집답게 마을 뒤편 구릉정상부의 전망좋은 곳에 위치, 마을을 굽어본다. 안채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마루 시렁위에 쭉 줄지어 놓여있는 수십개의 상들이 눈길을 끈다. 찾아오는 객을 위해 마련되었을 많은 상들이 지난날 세도가의 권세와 영화를 말없이 반증하는 듯하다. 일(一)자형의 대문채안에 'ㅁ'자형의 안채가 있고 사랑채 후원 뒤쪽에는 신문(神門)과 사당(祠堂)이 배치되어 있다. 규모와 격식을 갖춘 종가의 대가옥으로 사랑대청에서 바라보는 후원의 경치가 일품이다.

당호는 서백당(書百堂)이며 과거에는 이 가옥 주위에 외거하인들이 거처하던 가람집이 있었다. 후원 한 모퉁이에는 이 집을 지을 때 함께 심었다는 수령 5백년이 넘은 향나무가 한껏 위엄을 부리며 기품있게 서 있다. 대문을 열며 집을 나오면 잘 다듬어진 향나무 가지가 대문짝을 누른다. 대문짝에다 나무가 닿도록 자연스럽게 배치할 줄 아는 선조들의 멋스러움에 취하게 된다.

 월성손씨 종택에서 등성이를 따라 동네입구쪽으로 나오면 이언적선생이 태어났다는 무첨당(無添堂)이 보인다. 둥근기둥과 네모기둥을 섞어 방과 마루를 배치했고 지붕이 하늘을 날듯 날렵하면서도 부드럽고 소박해 세련된 솜씨를 보여준다. 별당은 사랑채의 연장건물로 이곳에서 접객이나 독서 등으로 쓰여져 30여년 전만해도 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수졸당(守拙堂)은 회재 이언적 선생의 손자인 이의잠(李宜潛)이 1616년에 건립, 그의 호를 따 수졸당(守拙堂)이라 부르고 있다. 구조는 'ㄱ'자형의 안채와 일(一)자형의 사랑채, 아래채, 대문간채 등이 근접하여 배치되어 튼 'ㅁ'자형을 이루고 있다. 대문간채를 사랑채와 분리해서 사랑채보다 지붕의 높이를 약간 낮춰 격식(格式)의 차를 고려했다. 이곳은 동마을에서 사당(祠堂)을 지닌 4종가 중의 하나다.

 또다른 골에 위치한 이동기(李東琦)가옥의 전체배치는 일반적인 'ㅁ'자형 혹은 튼 'ㅁ'자형에 따르지 않고 주거공간 기능에 따라 안채, 사랑채, 대문간채를 분산배치한 별격(別格)의 특색있는 변화를 보여준다. 각 건물에 두리기둥을 전혀 쓰지 않고 있는 점 등은 소박하고 검소한 주거관을 엿보게 한다. 이밖에도 사랑채 대청앞에 2칸의 8짝문을 셋기둥없이 달아 4짝씩 들어 올리게 한 특이한 구조의 대성헌도 눈길을 끈다. 고가 사이로 향나무, 과실수 등 수목이 빽빽이 들어서 있고 낮은 토담사이로 실생활의 모습을 동네가까이서 접할 수 있어 사람사는 냄새가 생생하게 묻어난다.

참고문헌 : 96년 11월 15일자 매일신문

 

찾아 가는 길: 경주시내에서 안강(安康)행 버스를 탄다. 버스는 포항(浦項)방면으로 가는 산업도로를 이용한다. 이 버스는 형산강(兄山江)을 건너서 강동대교(江東大橋) 위를 지나게 되고, 다시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서 제1강동교로 향한다. 양동(良洞)마을을 가기 위해서는 제1강동교에서 내려야 한다. 하차 후 북쪽으로 난 길로 들어선다. 이 길은 철길을 따라 양동마을로 이어진다. 2km 정도 걸어가면 기와집과 초가집들이 산을 둘러싼 마을이 보이는데, 이곳이 바로 양동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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