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본관 건물    측면에서 바라본 청와대 본관 건물
고려때 이궁(離宮)을 세운 곳 경복궁의 후원터 천하제일복지(天下第一福地) 노대통령 당시 건물 신.개축)

3.명당과 개운       목록찿기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점(强占)했을 때 그들은 경복궁 뜰 안에 총독부(總督府) 건물을 세웠다. 주지(周知)하다시피 이는 왕조(王朝)통치의 상징인 경복궁을 위압(威壓)하여 왕(王)을 중심으로 한 한국인의 왕권정치(王權政治)를 누르고, 북한산과 남산을 잇는 지맥(地脈)을 끊어 이 나라의 정기(精氣)를 끊어 버리자는 의도였다.

  경복궁은 북거삼각(北據三角)이요 남림한수(南臨漢水)한 산하금대(山河襟帶)의 형승지(形勝地)요, 사세(四勢:靑龍.白虎.朱雀.玄武)를 구비한 지세(地勢)로서 한강의 흐름과는 역(逆)으로 되어 있다.  즉 산과 물이 잘 배합된 이 명당 중의 명당 자리에다 식민지 총독부를 세워 지세(地勢)의 이점(利點)까지 활용하면서 식민통치를 영구화하려 획책했던 것이다. 풍수술은 이와같이 지세의 이점을 활용하는 한 방편술(方便術)이요 개운술(開運술)의 한 방책(方策)이라 하겠다.

  멀리 삼국시대부터 조선왕조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의 국토관을 지배해 온 것은 풍수설이었다. 신라가 그러했고 고려와 조선도 그러했다. 신라 제4대 탈해왕이 아직 왕위에 오르기 전, 자기가 있을 만한 좋은 땅을 물색하던 중, 초월형(初月形)의 봉우리 밑이 길지(吉地)임을 알고 그 곳을 알아본 결과 호공(瓠公)의 저택이었다. 그는 탁월한 지략을 써서 마침내 이 저택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도선대사가 고려의 궁터를 개성의 송악산 밑에 잡은 것도 풍수설의 영향이요, 무학대사가 조선의 도읍지를 한양의 북한산 밑에 잡은 것도 풍수학의 영향이었다.

 이같이 풍수술에 의거한 왕도(王都)의 선정은, 왕도는 곧 국가의 상징이요, 국가는 곧 왕도의 지리쇠왕(地理衰旺)에 의해  흥망이 좌우된다는 풍수술의 이점(利點)을 지혜롭게 활용한 역사적 사실이라 하겠다. 풍수술을 이용한 것은 비록 왕가뿐만 아니라 사대부(士大夫)를 비롯한 일반 민가에까지 널리 퍼져, 지방의 읍기(邑基)를 비롯한 일반 민가의 집터나 묘터에서도 이용함으로써, 이 풍수학은 범국민적으로 활용하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 조상들은 국가 사직(社稷)의 천년대계(天年大計)는 물론, 한 가문(家門)의 천년대계에도 풍수학을 유용하게 활용했음을 알 수 있다. 우리의 선조들은 자신의 뒤를 이을 후손들이 가문의 대들보나 국가의 동량(棟樑)이 되길 기원했고, 그러한 꿈과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방편으로 산천정기(山川精氣)가 응결된 명당터를 골라 묘지를 쓰거나 가옥을 지었으니, 이는 우리 선조들께서 풍수학의 이점을 유용하게 활용한 생활지혜의 한 단면이라고 할 것이다.

  탈신공 개천명(奪神功 改天命)하는 학(學)과  술(術)과 도(道)가 즉 풍수학이요, 풍수술이요, 풍수도이니, 성쇠지도(盛衰之道)와 성패지수(成敗之數)가 모두 이 안에 있음을, 어느 누가 알리요!

  인류역사 이래 인간의 운명(運命)을 변화시켜 천명(天命)을 개조(改造)시킬 수 있는 학문이 풍수지리술 이외에 과연 또 있었던 적이 있는가?

  인간의 운명을 개조하고 개척시키는 이 풍수지리술은 한 가정이나 한 국가의 발복과 번영을 위한 천년대계의 학문(學文)이요, 술법(術法)이요, 도법(道法)인 동시에, 인간이 취하고 할용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개운술(開運述)임을 30년의 연구와 답산(踏山)을 통한 경험에 의거하여 감히 자신있게 말 할 수 있고 권고할 수 있음을 밝히는 바이니, 명당을 구하고져 하는 인사(人士)는 먼저 선행(善行)을 하여 적선(積善)을 할 것이며, 그 다음으로 풍수지리술에 밝은 유덕(有德)한 지사(地師)를 구해야, 비로서 적선(積善)한 덕기(德氣)가 통하여 길지(吉地)를 얻을 수 있음을 명심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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