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대 세조(광릉:세조와 비 정희왕후 윤씨)         목록가기

 

 

  서울 동북쪽 28키로미터 지점, 남양주시 봉접읍 부평리에 있는 광릉은 조선 제7대 세조와 비 정희왕후 윤씨의 능이다. 능에 부속된 2천5백여 정보의 광대한 광릉 능역의 울창항 숲과 계곡은  서울 근교에서 보기 드문 명승지일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천년 기념물로 지정된  크낙새와 삼법조(三法鳥)의 서식지로 유명하다.

  방대한 조림 면적에 있는 40과(과) 139종에 달한다고 하며 광릉임업시험장이 있으며, 광릉의 능사(陵寺)로는 예종 1년(1469)에 창건된 봉선사(奉先寺)가 있다.

 

 

 

제7대 세조(世祖)와 정희(貞熹)왕후 윤씨- 광릉(光陵)
 
  세조의 능. 소재지 :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247     세조비 능 정희왕후 윤씨의 능.  < 사적: 제 197 호>
 

광릉(光陵)의 특징
  세조(1417-1468, 재위 14년)와 왕비 정희왕후 윤씨(貞熹王后 尹氏 : 1418-1483)의 광릉(光陵)은 가운데 정자각(丁字閣)을 중심으로 좌우 언덕에 세조의 능과 정희왕후의 능이 각각 단릉(單陵)의 형태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으로 조성했다. 왼쪽에는 세조의 능이 오른쪽에는 정희왕후의 능이 각각 자리잡고 있다.

  세조는 "내가 죽으면 속히 썩어야 하니 석실과 석곽을 사용하지 말 것이며 병풍석을 쓰지 말라" 는 유명을 내렸다"고 한다.

  광릉은 이 유명에 따라서 병풍석을 두르지 않고, 석실과 석곽은 회격으로 바꾸어 꾸몄으며, 병풍석에 새겼던 십이지신상은 난간 동자석주에 옮겨 새겼다. 이렇게 함으로써 산역에 동원된 인력을 줄일 수 있었으며, 비용을 절감하여 민폐를 덜 게 되었다고 한다.

              동원이강 형식으로 조성된 정자각(광릉)
  이후부터는 석실을 없애고 회격으로 꾸몄으며, 병풍석을 상설하지 않는 능이 많았다. 왕릉과 왕후릉 의 상설은 각각 곡장 3면, 난간석 12간, 상석 1, 장명석 1, 망주석 1쌍, 문.무인석 1쌍, 석마 2쌍, 양.호석 각 2쌍을 두었으며, 그 외에도 정자각, 수라청, 망료위, 표석1, 홍살문, 재실로 이루어져 있다.  정희왕후 승하 후 세조의 능과 다른 언덕에 왕후릉을 조성하면서 신하들의 의견이 능호(陵號)를 달리할 것인가, 정자각(丁字閣)을 새로 세울 것인가 등으로 분분했으나 성종(成宗)이 이미 건립되어 있는  세조릉의 정자각을 두 언덕 사이로 옮겨지어 함께 제사 지내도록 명함으로써  광릉(光陵)의 단독 능호(陵號)를 유지하게 되었다.
 광릉 근처 능안마을의 봉선사(奉先寺)는 정희왕후의 명으로 중건된 광릉의 원찰(願刹:왕의 명복을 빌었던 절)이었다.
 
 세조 약사(略史)
  세조는 1417년(태종 17년) 9월 29일,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타고난 자질이 영특하고 명민하여 학문이 높았을뿐 아니라 무예도 뛰어났다고 한다. 세조가 대군으로 있을때는 세종의 명을 받들어 불서를 번역하고 향악의 악보를 정리했으며, 1452년(문종 2년) 에는 관습도감 도제조에 임명되어 국가의 실무를 맡아 보았다.

 1452년 5월 문종이 죽고 조카 단종이 즉위하였으나 나이 겨우 12세ㅔ 불과하여 , 문종의 유명(유명)에 따라 영상 황보인.좌상 남지.우상 김종서 등이 그를 보필하고, 집현전 학자들이 협찬하여 왔다.

  그런데 세종에게는 왕자 18명이 있어 모두 위세 당당하였고, 그중에서도 수양대군은 야망과 수완이 비범한 인물이었다. 이때 모든 대군은 다투어 빈객을 맞아들여 세력확장을 도모하였는데, 수양에게는 무인들이 모였다.

  그는 모신(모신) 권남을 통하여 책략에 뛰어난 한명회를 얻고, 다시 홍달손.양정 등의 유능힌 무인 30여 명을 포섭하여 기회를 엿보다가 먼저 단종을 보필해 오던 3공 가운데서 가장 지용을 겸비한 김종서를 제거하고자 단종 1년(1453) 10월 무사를 이끌고 김종서의 집을 습격하여 그를 죽인 후, 김종서가 모반하여 죽였는데 시일이 절박하여 사전에 임금께 아뢸 여가가 없었다고 아뢰었다.

  곧 왕명을 빌어 신하들을 소집, 미리 계획했던 대로 영상 황보인.이판 조극관.찬성 이양 등 반대파 중신을 궐문에서 죽이고, 좌상 정분과 조극관의 동생 조수량 등을 귀양보냈다가 이어 죽였다.

  한편 김종서 등의 목을 베어 메달고 그 자손을 주살하였으며 이어서 안평대군이 김종서 등과 통했다고 하여 그를 강화로 귀양보냈다가 뒤에 사사(賜死)했다.

  이 정변(政變)으로 실권을 쥐게 된 수양대군은, 바로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이저.형조판서, 내외병마도통사 등을 겸직함으로써 정권과 병권을 장악하고, 정인지를 좌상에, 한확을 우상에 임명하는 한편, 집현전으로 하여금 수양대군을 찬양하는 교서(敎書)를 짓게하여 이것의 왕의 이름으로 받았다.

  수양대군의 위세와 권위로 인하여 사태가 어쩔 수 없는 처지에 달했음을 깨달은 단종은 단종 3년(1455) 윤 6월 수양대군에게 양위(讓位)할 뜻을 전하고 친히 대보(大寶)를 전수하니, 단종의 뒤를 이은 그가 곧 세조이다.

  이러한 처사에 대하여 반감을 일으켰던 몇몇 구신(舊臣)들과 집현전 학자들이 단종의 복위를 꾀하고자 그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들은 세조 2년(1456) 6월 명사(明使)를 향응하는 기회를 타서 거사하기로 하였으나 계획이 어긋나자 사태의 불리함을 느낀 김질.정창손 등이 밀고하여, 이에 연루된 70여 명이 함께 처벌되었다.

  이 일이 있은 뒤 세조는 이드의 밀모에 상왕 단종도 관계하였다 하여, 상왕을 노산군으로 강봉하여 군사 50명의 호송하에 영월로 귀양보냈으며, 세조의 아우 금성대군도 순흥으로 귀양보냈다. 그후 9월에 금성대군은 부사 이보흠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꾀하여 영남 인사에게 격문을 보내어 군사를 일으키려 하였으나  밀고되어 처벌되고, 노산군에 대하여는 군(君)을 폐하여 서인으로 하였으나 뒷날 신하들의 주청에 의해 금성대군과 노산군도 사사(賜死)되었다. 이때 단종의 나이 17세였으며, 이 단종 폐위사건은 뒤에도 사화(士禍)를 일으키는 짖접 원인이 되었으며 또 문인 학자간에도 많은 충격을 주어 대립 반목을 일으키는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비록 세조는 의롭지 못한 방법으로 왕위에 올랐으나 그후 스스로 뉘우치고 정사에 몰두하여 재위 14년간 만은 치적을 쌓았으며 조선 초기의 왕권확립에 공헌이 많았다.

  그 면면을 살펴보면, 세조 3년(1457) 국조보감을 찬술케 하고, 각 읍의 군사를 5위(衛)에 분속토록 하여 군제를 확정, 각 역로 소관(所管)을 개정하여 찰방을 신설, 예문관의 장서(藏書)를 간행했고, 각 도에 거진(巨鎭)을 설치했으며,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봉시켜 영월로 유배하였다.

  세조 5년(1459) 신숙주를 파견하여 야인을 초유(招諭)케 했고, 이듬해 경국대전을 간행,반포하였으며,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신설, 불경으 간행했다. 불교를숭상하여 원각경을 편찬케하고 원각사를 창건했으며, 고전(科田)을 폐지하고 직전제(職田制)를 실시토록 하였다.

  세조 6년(1460) 회령.고령(高嶺) 등지에 내둔(來屯)한 야인을 토벌하고 하삼도민(하삼도민) 중의 부실자(富實者) 4,500호를 평안.강원.황해도에 이사시켜 살게하고 전라도에 조선(漕船) 00척을 건조했다.

  특히 세조 13년(1467)에는  땅의 원근을 재는 규형(窺衡).인지의(印地儀)를 친히 제작하여 토지측량을 용이하게 하였으며, 함경도에서 이시애가 반란을 일으키자 귀성군을 보내어 평정케 하였으며, 강순을 파견하여 건주위建州衛) 야인들을 토벌하였다. 왕위의 찬탈로 인한 인간적인 고뇌에 싸여 중환을 잃다가  병세가 악화되자 세조 14년(1468) 9월왕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마침내 보령 52세로 승하했다.

 

 정희왕후 약사(略史)

   정희왕후는 판중추부사 윤번의 딸로 본관은 파평이다. 1455년(세조 1)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그녀는 계유정난 당시 정보 누설로 수양대군이 거사를 망설이자 손수 갑옷을 입혀 그에게 용병을 결행하게 할 만큼 결단력이 강한 여장부였다. 슬하에 덕종(德宗), 예종(睿宗)의 2남과 의숙공주를 두었다.

  장남 덕종이 요절(夭折)하고  1468년 차남 예종이 19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조선 최초로 수렴청정을 하였으며, 예종이 재위 13개월 만에 죽자, 요절한 덕종의 둘째아들 자을산군(성종)을 그날로 즉위시켜 섭정을 하기로 했다.

  예종이 죽었을 때 그의 아들 제안대군이 있긴 했으나 나이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그녀는 왕위를 넘겨주지 않았으며, 덕종에게도 큰아들 월산대군이 있었으나 자을산군을 즉위시킨 것은 정희왕후 개인의 결단에 의한 것이었다.

  13세의 어린 자을산군을 대신해 무려 7년 동안 정사를 이끈 정희왕후는 섭정기간 중에 과감하고 결단력 있는 성품을 마음껏 발휘하여 왕권을 안정시켰으며, 성종이 성년이 되자 섭정을 끝내고 1476년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다.

  계유정난 때 세조를 독려했던 일화나 두 차례의 섭정 등에서 보듯이 성종 14년(1483년) 66세로 승하할 때까지 정희왕후의 힘은 궁궐에 넘칠 정도였다.

 

  수렴청정(垂簾聽政)

  대리정치의 일종, 즉 섭정. 왕이 어려서 즉위할 때 여자 즉, 그의 어머니나 조모가 정치를 대신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 역사에서 제일 먼저 수렴청정을 한 것은 고구려의 제6대 태조왕(太祖王:일명 國祖王) 때였다.

  제5대 모본왕이 두로(杜魯)의 손에 죽고, 태조왕이 7세로 즉위하니 태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조선조에서는 세조 비 정희왕후가 최초로 수렴청정을 하였으며, 제11대 중종의 계비 역시 아들 명종이 어려서 즉위하자 8년간 수렴청정을 하였다. 조선 말기 순조 이후에는 대개 왕이 어려 대비나 대왕대비가 수렴청정을 하였고 이 때문에 외척들의 세도정치가 성하였다.

  남녀의 구별이 엄하던 시대인 만큼 임금을 대신하는 여성은 발(簾)을 내리고 그 뒤에 앉아서 신하들을 대하고 정치를 처리하였으므로 <수렴청정>이라는 말이 나왔다. 대개는 어린 임금과 동좌하는 일이 많았다.

 

 

풍수지리 답산안내  목록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