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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대성종(선릉), 11대중종(정릉), 중종비 신씨(愼氏:온릉)              

 

 

 선정릉(宣靖陵) 안내  
 

 

  제199호로지정돼 있는 선종릉은 지하철 선릉역에서 5분 정도만 걸어가면 그 입구에 닿을 수 있는 삼릉공원 안에 자리잡고 있다. 

  성종과 그 계비 정현왕후를 모신 선릉과 그분들의 아들 중종의 무덤인 정릉을 합하여 선정릉이라고 한다. 입구쪽에 있는 것이 선릉이고,  동쪽 언덕에 있는 무덤이 성종 계비 정현왕후의 능이며, 홍살문과 정자각 너머로 멀리 보이는 무덤이 중종의 능이다. 

  성종과 정현왕후를 모신 선릉을 뒤로 하고 제법 동산의 모양새를 갖춘 언덕하나를 넘어야 정릉에 닿을 수 있다. 사람들의 출입이 빈번한 연유로 공원 분위기를 느꼈던 선릉과는 달리 고개하나 차이로 정릉은 고요함 속에 묻혀 있다.

 서편에 있는 성종의 능과 동편에 있는 계비 정현왕후의 능은 동원이강능의 형식이고, 동남편에 있는 중종의 능은 단릉 형식이다. 또한 중중비 단경(端敬)왕후 신(愼)씨의 온릉(溫陵)은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일영리 산 19번지에 소재하며, 사적 제210호로 지정되어 있으나, 현재 비공개 능이다.

 

 

 

  제9대 성종(成宗)과 계비(繼妃) 정현왕후(貞顯王后) - 선릉(宣陵)
   
 
                   계비 정현왕후(貞顯王后) 윤씨의 능.                         조선조 제 9 대 성종릉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 135-4 { 宣靖陵 소재 }
사 적 : 제 199 호
 

 

선릉(宣陵)의 특징
   세조의 손자요, 추존왕인 덕종의 차남인 성종( 1457-1494, 재위 25년)과 그의 계비 정현(貞顯)왕후 윤씨(1462-1530)의 선릉(宣陵)은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식으로 각각 서편과 동편에 조성
되었는데, "석실(石室)은 유해(有害)하여 무익(無益)하니 원,능은 석실과 병풍석을 쓰지 말라" 는 세조의 유언에 따라 석실을 만들지 않았으나 병풍석은 세조(世祖)의 명과 다르게 여전히 봉분 아랫부분에 둘려져 있다. 

  그러나 왕비릉은 병풍석 없이 난간석만 둘렀고 나머지 상설물은 왕릉과 비슷하다. 선릉은 이후 유난히 많은 변고를 겪었다. 임진왜란 때 왜병에 의해 왕릉이 파헤쳐지고 재궁이 불태워지는 수모를 겪었으며, 또한 1625년(인조 3년)에는 정자각에 불이 나 수리를 했고, 다음해에도 두 번이나 능에 화재가 발생했다고 <인조실록>에 전한다.


  후에 중종(中宗)의 정릉(靖陵)이 그의 두 번째 계비(繼妃)인 문정왕후(文定王后))에 의해 선릉의 경내로 옮겨지므로써 선정릉(宣靖陵)의 명칭으로 불리는데, 후에 중종의 정릉(靖陵)을 조성할 때 성종의 선릉이 그 모범이 되었다고 한다.

 

   

뒷 이야기
   성종은 아버지{추존왕 덕종(德宗)}가 생후 2달만에 승하하고, 예종 또한 1년만에 승하해 세조의 비(妃) 정희대비(貞熹大妃)의 명으로 13살의 나이[1469년]에 왕위에 오르게 된다. 이 때 예종의 아들인 제안대군(齊安大君)은 간난아이였고,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月山大君)은 병약해서 결국 성종이 왕위에 오르게 된것이다.

 7년간의 섭정을 지나 친정(親政)한 성종은 재위 25년간 조선왕조의 기반을 완성시킨<成> 국왕이 되었다.
 성종대의 치적으로 인해 조선조의 기틀이 완성된 것은 여러 가지 업적에서 나타난다. 홍문관(弘文館), 존경각(尊經閣), 독서당(讀書堂)을 창설해 어진 인재들을 등용했고, 세조 대부터 시작된 <경국대전(經國大典)>을 개정, 완성 반포하여 국가의 통치체제를 확립 시켰다. 또한 역사서인 <동국통감(東國通鑑)>과 지리서인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문학서인 <동문선(東文選)> 등의 편찬에서 보이듯이 왕성한 문화적 발전을 이루었고, 외적으로도 북방의 여진족(女眞族) 소탕이나 남방의 일본(日本)과의 무역 확대 등으로 조선조의 힘이 크게 진작된 전성기를 이룬다.

 정현왕후 윤씨는 파평윤씨(坡平尹氏) 영원부원군(鈴原府院君) 윤호(尹壕)의 딸로 태어나 숙의(淑儀)에 봉해졌다가, 왕비 공혜왕후(恭惠王后)가 승하(성종 5년, 1474년)하고 원자(元子-연산군(燕山君))를 낳은 숙의(淑儀) 윤씨(尹氏)가 계비(繼妃)가 되었으나 폐위되자 1480년(성종 11년)에 왕비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슬하에 중종(中宗)과 신숙공주(愼淑公主)를 낳고 중종 25년에 승하한다.

 

 

 

 

제11대 중종(中宗) - 정릉(靖陵)
 
 중종릉 전경  중중릉 전경
소재지 :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 135-4  { 宣靖陵 소재 } 사 적 : 제 199 호
 
정릉(靖陵)의 특징
  중종(1488-1544, 재위39년)의 정릉을  현 위치인 성종(成宗)의 선릉(宣陵) 경내로 옮기기 까지는 많은 우여곡절(迂餘曲折)이 있었다. 또한 왕비(王妃)가 3명씩이나 있었으면서도 같은 곳에 능이 조성되지 못했는데, 그 연유는 세 번째 왕비였던 계비(繼妃) 문정왕후(文定王后) 인 까닭으로 전한다.

  중종의 능은 처음 중종보다 먼저 죽은  제1계비 장경왕후 윤씨의  희릉(禧陵;서삼릉 소재) 옆에 동원이강 형식으로 조성되었으나, 1562년[명종 17년]에 당시 권력을 움직였던 문정왕후가 희릉과 한 능역인 중종릉을 따로 떼어놓고, 나중에 중중릉 근처에다 자신의 묘를 쓰고자, 그에 의해 선릉 근처인 현 위치로 옮겨진 것이다.

 

  겉으로는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에  따라 옮겼다고 하지만, 오히려 지대가 낮아 매년 비가 오면 한강 물이 능으로 들어가 재실이 반쯤 잠길 정도로 침수가 잦았다. 결국 중종의 옆에 같이 잠들고 싶었던 문정왕후는 자신의 능을 다른 곳{태릉}으로 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문정왕후가 별세했어도 그곳에 묘를 쓰지 않고 양주군 노해면 공덕리(노해면 공덕리)에 정하여 태릉(태릉)이라 했다. 당시 중중의 능인 정릉을 태릉으로 옮겨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으나 재차 이장하는 일은 어렵다고 하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중종의 정릉(靖陵)을 잘못 옮긴 까닭으로,  그 다음 해에 명종(明宗)의 세자인 순회세자(順懷世子)가 서거하고,  2년 뒤에는 문정왕후 자신, 또 2년 뒤에는 명종(明宗)이 승하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결국 임진왜란 당시에 왜적(倭賊)에게 도굴까지 당하게 되는 비운의 능이 되기도 하였다.

                                  중종릉
보우선사(普雨禪師)와 문정왕후 윤씨
  보우선사는 묘승(妙僧)으로 유명한 자였다. 전국 선교(禪敎)를 통괄한 수선종 대본산(首禪宗大本山)인 봉은사에서 주지 겸 판 선종사(判禪宗事)로 오랫동안 있으면서 그의 세력은 대신들도 움직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야심을 가지고 불법을 확장하고자 풍수를 빌어 중중릉의 천릉을 꾀했덩 것이다. 그가 정릉을 옮기도록 문정왕후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 것은 미망인 문정왕후가 여자라는 점을 교묘히 이용했던 것이다. 그는 제1계비인 장경왕후의 능과 한 묘역에 있는 중종릉을 따로 떼어놓고 나중에 그 곁에다 문정왕후의 능을 쓸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하여 여자인 문정왕후의 마음을 교모하게 움직이게 한  것이다.

  문정왕후의 신임을 얻은 보우선사는 문정왕후를 꾀어서 정릉 터(靖陵基:증중릉)는 풍수상(風水上) 수파(水破:수구)가 불길(不吉)하니, 선릉 근처에 있는 길지(吉地)로 옮기자고 청원했다. 그리하여 문정왕후는 보우선사와 의논 끝에 중종릉을 옮기기로 했으며, 대신들 중에도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현재의 자리고 옮기게 되었다고 한다.[석표일기<石漂日記>]

 원찰은 보우선사가 주지로 있었던 봉은사로 결정하였는데, 보은사는 794년(신라 원성왕 10년)에 연회국사가 창건하여 견성사라 했는데, 1498년(연산 4년)에 중창하여 봉은사라 개칭한 것이다,

  중종이 병으로 승하한 것은 1544년 1월 15일 창경궁에서였다. 보령 57세, 왕위에 있은지 39년 만이다. 이듬해 2월 3일 중종은 현재 서삼릉 능역내에 있는 장경왕후 윤씨 능인 희릉 오른쪽 산줄기에 모셔졌다.

  그로부터 7년 뒤 1562년(명종17년) 9월4일 명종의 모후로 정권을 휘두르던 문정왕후는 봉은사 주지 보우와 의논하여 중종의 능을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풍수적으로 불길한 자리에 선왕을 모실 수는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하지만 이것은 후세 역사가들의 비판대로 문정왕후가 자신의 훗일을 위해서 한 일이었다.

  막상 중종의 능을 옮겨놓고 보니 지대가 낮아서 여름철에는 재실까지 강물이 들어 보토하는데  많은 비용을 낭비해야 했으며,매년 비가 오면 침수로 재실이 잠기는 현상이 잦았다. 남편 중종릉을 이장한지 2년만에  문정왕후 자신이 승하했는데, 부득불 문정왕후릉은 다른 곳을 택할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이 세 명의 왕후를 두고도 중종이 단릉으로 모셔진 까닭이다. 문정왕후의 집착으로 이곳에 옮겨진 중종릉은 임진왜란때 부친 선릉과 함께 왜병에게 파헤져지고 재궁이 불태워지는 변고를 당했으니 실로 해(害)만 크고 득(得)이 없는 이장이었다.

  자신의 득(득)을 꾀하고자 미망인 여인의 마음을 교묘하게 이용했던 묘승(묘승) 보우대사는 문정왕후가 죽은 후 역모를 꾀했다는 이유로 제주도로 유배되었는데,  목사 변협(牧使邊協)이 그를 죽였다고 한다.

 
뒷 이야기
  중종은 1488년(성종19년) 3월 5일 성종의 둘째아들로 태어나, 1494년 4월 6일 진성대군에 봉해졌다가 1506년 9월 2일 박원종, 성희안 등이 반정을 일으켜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왕으로 추대 조선 제11대 왕위에 올랐다. 중종은 즉위한 후 연산군때의 폐정을 개혁하기 위해 새로운 왕도정치를 실천하고자 노력했다. 신진사류인 조광조를 등을 등용하여 정치에 최선을 다하려 하였다. 그들은 철인군주정치(哲人君主政治)를 표방, 훈구파를 견제하는 동시에 신진사류를 중요직에 대거 등용하여, 이상주의에 치우친 정치를 실현하려 했다.
 
  그러나 이들 신진 사림 세력의 과격하고 지나친 개혁정치는 기성 훈구파의 반발을 일으켰고, 중종 자신도 이들의 생각에 회의를 느끼지 시작했다. 이러한 중종의 심중을 읽은 남곤, 심정 등이 반정공신의 위훈삭제 문제를 계기로 훈구파들로부터오히려 숙청당하고, 훈구파가 실권을 장악했다.

  이렇게 개혁 정치의 기운이 꺽인 중종시대는 훈구파간의 내부싸움이 시작되면서 정치적인 혼란이 계속돼 각종 옥사들이 줄이어 발생했다. 1521년(중종16년) 기묘사화의 여파로 신사무옥이 일어나 안처겸 등의 사림파가 다시 제거되고 윤세창의 모역 사건이 일어나는가 하면 1527년 김안로의 아들 화가 심정, 유자광을 제거하고자 일으킨 동궁의 작서의 변으로 경빈 박씨와 복성군이 서인이 되어 쫒겨가는 등 훈구파 상호간의 정권 쟁탈전이 극심해졌다.

 
  1531년 (중종26년) 김안로의 집권으로 정계는 더욱 혼란에 빠지고 이에 대립하여 윤원로 형제가 등장하여 정국은 훈신과 척신의 대립으로 치달았다. 이러한 불안은 국방정책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1510년 삼포왜란이 일어나 경상도 해안 일대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으며, 1522년 추자도 왜변. 동래염장의 왜변, 1525년 전라도 왜변 등 남부지방 해안에 끊임없이 일본이 침략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북방 국경지대 야인들도 빈번히 침략하여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나라 안팎으로 바람잘 날 없었던 세월이었다. 이러한 와중에서도 사회적으로는 유교주의적 도덕윤리가 정착되어 갔다.
 
  한 때 조광조 일파의 몰락으로 주춤하기는 했지만, 향약이 전국화되는 등 유교주의적 향촌질서가 자리잡혔던 것이다. 또 중종의 오랜 재위기간동안 인쇄술의 발달과 더불어 많은 편찬사업도 진행되었다. 1516년(중종 11년) 설치한 주자도감에서 많은 동활자를 주조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 <속 동문선>, <사성통해> 등의 문헌들을 편찬 간행했다.  경제적으로도 저화와 동전의 사용을 적극 장려하고 도량형의 일원화를 꾀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정치적 혼란과 잦은 외침으로 크게 실효를 거두지는 못했다.
 
 

 

제11대 中宗의 정비(正(妃) 단경왕후(端敬王后) - (溫陵)
 
온릉(溫陵)의 특징
  중종의 정비(正妃)인 단경왕후 신씨(端敬王后 愼氏:1487-1557)의 온릉은 왕비 책봉 1주일 만에 폐위되는 불우한 신씨의 일생을 대변하듯 조촐하게 조성되어, 현재 비공개 능으로 남아 있다.

  단경왕후는 중종반정(中宗反政)에 반대했던 아버지{신수근}로 인해 폐위되어 1557년[명종 12년] 71세의 나이로 사저에서 승하한 뒤 본가 선영에 묻혔다가 1739년[영조 15년]에 복위(復位)되어 단경(端敬)의 시호와 온릉(溫陵)의 능호를 받고, 뒤에 추복된 단종(端宗)의 장릉(莊陵) 양식을 따라 능역이 조성되었다.

 
단경왕후 약사(略史)
: 단경왕후 신씨는 연산군(燕山君)대 좌의정 신수근(愼守勤)의 딸로 태어나 1499년[연산군 5년] 13세 때에 당시 진성대군(晉城大君;中宗)과 혼인을 맺었으나, 몇 년 뒤 중종반정(中宗反政)은 온 집안의 몰락을 가져옵니다.
 아버지의 반정(反政) 반대로 인한 죽음, 고모였던 연산군 부인 신씨(愼氏) 등의 폐위와 함께 1506년 왕비 책봉 7일만에 반정세력에 의해 폐위되는 운명을 맞습니다. 결국 슬하에 자식도 없이 권력의 암투 속에 희생양(犧牲羊)이 되고 말았던 안타까운 비운의 여인이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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