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연산군묘, 15대 광해군묘               목록가기

 

제10대 연산군(燕山君)과 부인신씨(夫人愼氏)- 연산군묘(燕山君墓)
 
   연산군과 부인 신씨(신승선<愼承善>의 딸)의 묘. 사 적: 제 362 호 소재지: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 산75
 

연산군묘(燕山君墓)의 특징

 조선조(朝鮮朝) 최초의 폐왕(廢王)인 연산군(1476-1506,재위12년)은 유배지인 강화 교동에서 3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그곳에 묻혔다가 1512년(중종7년) 12월 12일에 연산군 부인 폐비 신씨(愼氏;?-1537)가 상언하여, 오늘날의 도봉구 방학동인 양주군 해등면 원당리로 이장(移葬)하여 왕자군(王子君)의 예우로 개장(改葬)했다. 그 후 1537년(중종 32년)에 부인 신씨(愼承善의 딸)가 사망하자 쌍분(雙墳)의 형태를 이루게 되었다.

  왕자군의 예우로 조성되었기에 곡장(曲墻)과 상석(上石), 장명등(長明燈), 망주석(望柱石), 문인석(文人石) 만으로 조촐하게 설치하고,양주의 관원으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게 했다.

 이 묘역은 연산군의 사위인 능성 구씨의 선영으로서 연산군의 딸과 사위도 이곳에 묻혀 있다. 작고 야트막한 봉분 앞에는 대리석의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비명은 전면에는 연산군지묘 후면에는 정덕 8년(1513년;중종 8) 2월 22일 장이라 되어있다. 또한 부인의 비명은 전면에는 거창신씨지묘 후면에는 가정 16년(1537년;중종 32) 6월 26일 장이라 되어있다.

 
연산군 약사(略史)

  성종의 장남으로 태어나 1483년(성종 14) 세자로 책봉, 워낙 성품이 포악한데다가 즉위한 후 성종의 비(妃)였던 생모 폐비 윤씨가 후궁 정씨.엄씨의 모함으로 내쫓겨서 사사(賜死)된 사실을 알고, 정씨 소생인 안양군.봉안군을 살해하는 등 포악한 짓을 다했다.

  뿐만 아니라 각 도(道)에 채홍사(採紅使).채청사(採靑使)를 파견하여 미녀와 양마(良馬)를 징발, 성균관의 학생들을 쫓고 그곳을 유흥장으로 만들고 경연을 폐지하고 사간원도 없애 버렸다.

  연산군은 원래 학문을 싫어하는지라 조신(朝臣)들은 이를 악용하여 반대파를 사초(史草)문제로 모함하여 무오사화를 일으켜 사림(士林)을 살해하고, 윤씨 사사문제에 관련된 선비들을 대량학살 하였고, 원각사를 기생 양성소로 만들고 민간 여자들을 함부로 잡아들였다.

  연산군 시정을 공박하는 투서가 국문으로 되었다하여 국문을 아는 자를 모조리 잡아들이고 서적을 모두 태워버려 국문쇠퇴를 초래하는 등 악정이 심해가므로 성희안. 박원종 등이 주동이 되어 진성대군(성종의 차남, 즉 중종)을 추대하고 그를 내쫓으니 마침내 중종반정이 이루어졌다. 연산군은 교동에 추방되었다가 그해에 병으로 죽었다.

<폐비윤씨사건:성종의 왕비인 윤씨(尹起獻의딸)를 폐비하고, 다시 사약을 내려 죽인사건. 임금이 사사로운 가도(家道)를 잘못 다스린 데서 나온 궁중 내의 질투사건인데, 권숙의.인수대비. 윤필상 등의 모략으로 죽이게 한 것이다. 후일 연산군 때 갑자사화를 일으킨 직접 원인이 되었다.>

 
폐비 신씨 약사(略史)

  연산군 때의 영의정 신승선(愼承善)의 딸은 연산군비(燕山君妃)가 되고, 그의 손녀(愼守勤의 딸)가 또 중중비(中宗妃)가 되었는데, 둘 다 폐비의 신세를 면하지 못했다.

  그 까닭인즉, 신승선의 아들 수근(守勤)의 딸이 진성대군(中宗)의 부인이 되었으므로 신수근으로서는 연산군은 그의 매부요 진성대군은 그의 사위가 된다.

  그런데 신수근은 사위 진성대군을 왕으로 옹립하는 중종반정(中宗反正)에 응하지 않아, 그는 반정(反正)에 성공한 그들에게 죽음을 당했다.

  진성대군(중종)은 성종의 차남으로 연산군의 이복형제이다. 연산군의 폭정이 심해지자 박원종. 성희안 등 반정세력들은 연산군을 내몰고 진성대군을 추대하는 반정(反正)을 일으킬 계획을 세웠다. 연산군은 매부요 진성대군은 사위인 신수근으로서는 그 틈바구니에서 많은 고민이 있었을 것이다.

  신수근이 좌의정으로 있을 때 하루는 우의정 강귀손(姜龜孫)이 넌지시,

  <매부가 중하냐, 사위가 중하냐?> 하고 떠보았더니, 말뜻을 알아차린 그는 <세자가 영특한데 어찌 그런 말을 하는가?> 고 나무랐다고 한다.

  또 반정이 일어나기 며칠 전 주동자의 한 사람인 박원종이 그를 찾아와 장기를 두다가 일부러 두 궁(將)을 바꿔 보였다. 반정의 뜻을 넌지시 떠봄이다.

  그러자 그는 장기판을 밀치며 <차라리 내 머리를 베라>하고 크게 노했다.

  마침내 반정은 일어나고, 그는 반정에 성공한 세력들에게 죽음을 당했다.

  연산군의 비(妃)인 그의 누이는 연산군이 폐군이 되었으니 자연 그의 누이도 폐비가 되고, 그의 딸은 진성대군의 부인이니 남편이 왕(중종)이 된 마당에는 응당 왕비가 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그녀의 아비인 신수근이 중종반정 계획에 반대했다 하여 반정이 있은지 7일만에 폐비되어 친정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그 뒤 영조 15년에 유생들의 상소로 비로소 왕위로 복위, 신씨를 단경왕후에 봉하고 그의 묘소도 능으로 봉했으니 2백여년 만에야 한을 풀게 된 것이다.

 

 

 

 

 

 

제15대 광해군(光海君)과 부인 유씨(柳氏) - 광해군묘(光海君墓)
 
  광해군묘. 소재지 :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송승리 산59      뒤에서 전면을 바라 본 광해군묘. 사 적 : 제 363 호
 

光海君墓의 특징
  조선조의 두 번째 폐위(廢位) 임금 광해군
(1575-1641, 재위14년)과 문성군부인 유씨(文城郡夫人 柳氏 ; ?-1623)의 광해군묘는 연산군묘(燕山君墓)와 동일하게 군묘(君墓)의 형식으로 간촐하게 조성되어 있으며, 근방에 단종(端宗)의 비(妃) 정순왕후(定順王后)의 사릉(思陵)이 있으나 찾아가는 길에 표지판이 없어 일반인은 찾아가기가 어렵게 되어 있으며, 다른 왕릉을 찾아가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사릉을 조금 지나면 조그만 개울 위를 지나는 다리가 하나 나오는데 그 다리 옆에서야 안내판이 하나 붙어있다. 그 중에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바로 영락동산 영락교회 공원묘지이다. 그 방향으로 계속 올라가다 보면 돌문처럼 생긴 곳에 영락동산 안내문이 또 보인다. 그곳으로 들어가서 산길을 좀 더 올라가면 교회묘지 못가서 산중턱쯤에 있는 것이 광해군과 부인 유씨의 묘역이다.

  광해군묘는 군묘 형식에 따라 간소하게 만들어졌다. 3면의 곡장 안에 광해군과 부인 유씨의 봉분이 나란히 있고 그 앞에 상석이 각각 놓여 있다. 석수는 없고 비석 두 개와 사각장명등 양 옆으로 망주석과 문인석이 한쌍씩 설치되어 있을 뿐이다.

 

 

광해군은 선조와 공빈 김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1575년(선조 8)에 태어났다. 공빈 김씨 소생의 맏아들 임해군이 있었으나 성질이 난폭하하다고 보류하고 ,그의 아우인 광해군을 임진왜란때 피난지에서  세자로 책봉했다. 1592년(선조 25) 4월 30일의 일이다.

  세자로 책봉된 광해군은 임진왜란, 정유왜란 중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을 조달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1594년 명나라에 세자 책봉을 주청했으나 장자인 임해군이 있음을 이유로 거절당하고, 1606년(선조 39)에는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 김씨가 영창대군을 출산함으로서 선조 유일의 적통인 영창대군을 후사로 삼으려는 소북파와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파가 나뉘어지는 등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는데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그러나 병이 위독해진 선조는 이제 두 살밖에 안된 영창대군 대신 광해군에게 왕위를 이어받게 하라는 교서를 내렸다. 이 교서가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파의 손에 들어가 소실될뻔 했으나 결국 발각되어 선조의 승하 바로 다음날인 1608년 2월 2일 광해군은 34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전란으로 입은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과단성 있는 정책을 폈다. 서적을 편찬 간행하여 임진 왜란 후의 사고(史庫)를 정비하고 성지와 병기를 수리, 호패(號牌)를 실시하는 등 내치에 힘썼고, 밖으로는 국경방비와 외교에 힘썼다.

  그 무렵 만주에서는 여진족의 세력이 커져서 후금을 건국하고 명나라와 전쟁을 시작했다. 임진왜란때 우리나라를 도운 바 있는 명나라는 원병을 요청했다. 명나라를 돕자니 후금의 힘이 너무 강해 어떻게 보복을 당할지 모르겠고 외면하자니 신의의 문제가 걸렸다. 명나라와는 오랫동안 군신의 예로 지내왔던 관계였으므로 당연히 원병을 보내야 할 입장이었다. 그러나 진퇴양란의 어려움 속에서 광해군은 기막힌 양면 외교정책을 실시했다. 도원수 강홍립.김경서 등과 함께 군사 1만명을 명나라로 보내 연합하게 하고 일부러 싸워 패한뒤 후금에 투항케 하여 후금의 침략을 모면케 하는 등, 명과 금 양나라에 미움을 사지 않는 양단정책으로 난처한 외교를 잘 처리하였다.

  광해군은 소실된 서적의 간행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용비어천가> 등을 다시 간행했고 <국조보감>, <선조실록>을 편찬했으며, 허균의 <홍길동전>, 허준의 <동의보감>도 광해군 당시에 나온 책이며, 적상산성에 사고를 창건하고, 창덕궁을  중수(重修)하였으며, 인경궁. 자수궁. 경희궁 등을 세웠다.

  이렇게 나름대로 전후 복구사업에 온 힘을 기울였으나, 즉위 무렵 대북파의 흉계에 빠져 형이었던 임해군(臨海君)과 이복(異腹)동생 영창대군을 유배후 살해하고, 5년 뒤에는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궁(西宮)에 유폐시키는 등의 실정으로 반정(反正)의  빌미를 제공하고 말았다.

  또한 당쟁의 폐해를 막기 위해 초당적인 정국을 운영하려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광해군 재위 15년 내내 정권을 독점한 대북파(大北派)에 대한 서인들의 불만도  간과 할 수 없는 반정의 원인이다 . 마침내 이귀. 김유. 최명길. 김자점 등에 의해 인조반정으로 폐위되어 인정전 후, 경원궁에 억류됐다가 광해군으로 강등되고 강화로 유배되었다. 그후 다시 제주도로 옮겨져 1641년(인조 19) 7월 1일 67세로 눈을 감았다.

  하지만 광해군은 제주까지 유배지가 옮겨졌지만 그곳에서 67세의 천수(天壽)를 다했다. 그것은 아마도 반정세력이 광해군을 살해할 명분이 없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부인 유씨(柳氏)도 역시 강화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목숨을 다하고 현재의 위치에 안장되었다.  

  광해군은 인조반정을 정당화하기 위해 오랫동안 패륜아로 혹은 폭군으로 기록되었으나, 그의 탁월한 외교능력과 정치 등 그의 업적이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 묻혀 정치적 희생양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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