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종(인조생부 추존왕:章陵), 16대 인조(長陵)        목록가기

 

추존 원종(元宗)과 인헌왕후(仁獻王后) - 장릉(章陵)
 
  장릉은 김포읍 풍무리에 있는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추존)과 인헌왕후(추존) 구씨의 능이다.

  장릉이 있는 장릉산은 원래 북성산(北城山)이라 불리어 왔는데 장릉을 이곳에 마련하면서부터 장릉산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소재지 : 경기도 김포시 김포읍 풍무리 산 141-1
  처음에 원종의 묘원은 양주 곡촌리(곡촌리)에 있던 것을  인조 5년 김포에 개장하여 흥경원(흥경원)이라 하였고, 인조 10년 봉릉(봉릉)하여 장릉(장릉)이라 하였다. 이어 상설제도(상설제도)가 원제(원제)임을 미안하게 여겨 왕릉제로 석물을 개비(개비)하였다.

  왕과 왕릉을 나란히 두어 쌍릉으로 조성했다.

 
  원종은 선조의 다섯째 아들 정원군(정원군)으로 인빈김씨(인빈김씨)의 소생이다. 광해군 즉위후 왕의 박해로 우울한 생활을 하다가  광해 11년 춘추 40세로 승하하였다.

  인헌왕후는 능성부원군 구사맹의 딸로 13세에 가례하여 군부인으로 봉해지고, 인조반정 후 부부인으로 진봉되고 원종과 함께 왕후로 추봉되었다. 인조 4년(1626) 46세로 승하했다.

 

 

제16대 인조(仁祖)와 인열(仁烈)왕후 한씨 - 장릉(長陵)
 
                               장릉(長陵):자좌오향                          장릉의 홍살문과 정자각
 
 장릉(長陵)의 특징
 인조(仁祖:1595-1649, 재위 27년)와 비 인열왕후 한씨(仁烈王后韓氏 ; 1594-1635)의 장릉(長陵)은 본래 인열왕후 한씨가 산후병으로 42세의 생을 마감하자 경기도 파주시 운천리에 인열왕후릉을 먼저 조성하였다. 그러다가 1731년 (영조 7) 에 사갈(뱀과 전갈)이 낭자하게 석물 틈에 집을 짓고 있어 현 위치인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갈현리 산 25-1번지로 옮겨 왕과 왕비를 합장으로 다시 조성하였다. 그러나 비공개 왕릉이라 주위엔 장릉을 안내하는 표지판이 없다.
 
  뒷 이야기
 선조대(宣祖代)의 국가적 치욕을 겪은 후에 또 다시 외적(外敵)으로 인해 몽진(蒙塵)과 치욕의 항복을 한 인조(仁祖)는 반정(反正)의 바탕으로 왕위에 오른 국왕이었기에 반정 세력들의 힘을 거부하기 곤란한 상황이 많았다.
 반정에 따른 논공행상(論功行賞)에 불만을 품은 평안병사(平安兵使) 이괄(李适)의 난으로 공주(公州)까지 피신을 했고, 친명배금(親明排金)의 정책으로 정묘(丁卯), 병자(丙子)호란(胡亂)의 치욕을 당하는 등 권력의 출발부터가 순탄하지 못함으로 인해 입은 폐해는 극도에 달했다.
 1627년 정묘년에 후금(後金)의 3만여 군사들에게 한양(漢陽)을 내주고 강화도로 피신한 인조는 자신들이 오랑캐라 지칭하며 업신여기던 그들에게 형제(兄弟)의 의(義)를 맺어 화의했고, 또 다시 1636년 병자년에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청의(淸衣)를 입고 치욕적인 군신(君臣)의 의를 맺는 관계로까지 변화되는 상황을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굴욕을 당했으니, 뛰어난 외교적 수단을 발휘한 광해군대(光海君代)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인열왕후 약사

인열왕후 한씨는 영돈녕부사 한준겸의 딸로 태어나, 1610년 인조가 능양군 시절에 혼례를 올렸다가 반정 후 왕비에 책봉된다. 슬하에 소현세자와 효종, 인평대군, 용성대군의 4남을 두었는데, 용성대군 생산 후에 일종의 산후병으로 1635년 42세의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풍수지리 답산안  목록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