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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구릉(東九陵) 안내  
 
청량리 역에서 약 10킬로미터 떨어진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仁倉洞), 남검산(南劍山)기슭에 아홉 개의 조선 역대의 왕릉이 있다. 이 아홉 개의 능을 동구릉이라 부른다.동구릉의 선정은 이성계 생전에 무학대사에게 길지를 택하라는 명에 의해 이 곳이 선정되었다는 일화도 전해오고 있으나 사실은 태종의 명에 의하여 의정부사(議政府事) 김인귀(金仁貴)가 도성 가까운 곳인 이곳에 길지를 물색하여 추천으로 결정된 것이다.

  동구릉은 여러 능이 집중되어 있어 경내가 넓고 규모가 크며, 우거진 숲과 맑은 물이 절경을 이루고 있다. 개울을 따라 능역의 첫 관문인 홍살문을 지나 울창한 소나무숲 사이를 가면 곧 정자각(丁字閣)에 이른다.이정자각에서 비탈길을 오르면 왕릉에 이르게 된다. 

                                                                    원릉(영조와 계비 정순왕후 김씨의 쌍릉). 구리시 인창동
   

  사적 제193호로 지정된 동구릉(東九陵)은 조선조(朝鮮朝) 초대(初代) 군왕인 태조(太祖) 이성계의 건원릉(健元陵)을  비롯하여 총 9개의 능역(陵域)에 17위의 왕과 왕비를 모신 곳으로 총 59만평에 이르는 광대한 동구릉의 경내(境內)는 명당론에 입각한 풍수학-적(風水學的) 관점에서 살펴보면 배산임수(背山臨水)한 지형에, 주산(主山)을 뒤로 업고, 그 중허리에 봉분을 이룩하며, 좌우는 청룡, 백호의 산세를 이루고, 남쪽으로는 멀리  안산(案山)을 바라보는 명당의  표준형적인 길지(吉地)라 할 수 있다.

  동구릉(東九陵)은 조선조(朝鮮朝) 초대(初代) 군왕인 태조(太祖) 이성계건원릉(健元陵)이 조성(造成)되면서 그 후 왕릉군(王陵群)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하는데, 이성계의 능은 단릉(單陵)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이곳은 이성계가 1408년(태종8년) 사망하자 태종의 명으로 파주, 고양 등지에서 좋은 길지를 물색하던 중 당시 검교참찬 의정부사를 지내던 김인귀가 도성에 까까운 이곳의 길지를 추천해 영의정부사 하륜 등에 의해 정해진 곳이다.


  두 번째로 조성된 능은 1452년에 문종(文宗:5대)과 비(妃) 현덕왕후 권씨(顯德王后權氏){
중종 때 복위됨}의 현릉(顯陵)으로 동원이강(同原異岡)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다음은 동구릉 중에서도 가장 안쪽에 위치한 선조(宣祖:14대)[1608년 조성]와 비(妃) 의인왕후 박씨(懿仁王后朴氏)[1600년 조성], 계비(繼妃) 인목왕후 김씨(仁穆王后金氏)[1632년,인조 10년]를 모신 목릉(穆陵)이 동원이강(同原異岡)의 변형으로 세 언덕에 조성되어 있다.


  그 뒤 동구릉 가장 남쪽에 현종(顯宗:18대)[1674년 조성]과 비(妃) 명성왕후 김씨(明聖王后金氏)[1683년, 숙종 9년 조성]의 숭릉(崇陵)이 쌍릉(雙陵)의 형식으로 조성되었고, 1688년에는 건원릉 서쪽에 인조(仁祖:16대 )의 계비(繼妃)인 장렬왕후 조씨(莊烈王后趙氏)의 휘릉(徽陵)이 자리잡게 되어 이때부터 동오릉(東五陵)의 명칭을 사용하게 된다.

  그 후 1718년에 세자빈(世子嬪) 때 승하(昇遐)한 후 추존(追尊)된 경종(景宗:20대)의 비(妃) 단의왕후 심씨(端懿王后沈氏)를 모신 혜릉(惠陵)이 자리잡고, 다음으로  영조(英祖:21대)[1776년 조성]와 계비(繼妃) 정순왕후 김씨(貞純王后金氏)[1805년, 순조 5년 조성]를 모신 쌍릉(雙陵) 형식의 원릉(元陵)이 조성됨으로써 이때부터는 동칠릉(東七陵)의 명칭도 사용하게 된다.


  다음으로 헌종(憲宗:24대)[1849년 조성]과 비(妃) 효현왕후 김씨(孝顯王后金氏)[1843년 조성], 계비(繼妃) 효정왕후 홍씨(孝定王后洪氏)[1904년, 광무 8년 조성]를 모신 경릉(景陵)이 삼연릉(三連陵)의 형식을 취하여 세 개의 봉분(封墳)이 나란하게 조성되어 있다.

  마지막 능은 순조(純祖:23대)의 아들이자 헌종(憲宗:24대)의 아버지로, 추존(追尊)된 익종(翼宗){고종대에 문조(文祖)로 다시 추존}을 모신 수릉(綏陵)이다. 이 마지막 능의 조성작업은 좀 복잡한데, 처음[ 1830년:순조 30년]에는 경종(景宗)의 의릉(懿陵) 옆에 조성되었다가, 다시 양주(楊洲) 용마봉(龍馬峰) 밑으로 이장하고, 또 다시 철종(哲宗) 6년인 1855년에 건원릉(健元陵) 왼쪽에 조성되므로써 이때부터 동구릉이 되었으며, 비(妃) 신정왕후 조씨(神貞王后趙氏)는 1878년 고종 15년에 합장릉(合葬陵)으로 조성되었다. 수릉의 조성 시기로는 동구릉의 마지막 능이지만, 익종(翼宗)이 헌종(憲宗:24대)의 친부(親父)로 헌종대에 추존(追尊)되었기 때문에 조선왕릉 순서로는 헌종 앞에 시기를 둔다. 어쨌든 동구릉(東九陵)의 명칭이 사용된 것은 익종(翼宗)의 수릉(綏陵)이 조성된 1855년부터이며, 아홉 개의 능역이 있는 연유로 동구릉이라고 부른다. 

 

 
  건원릉(健元陵)-초대 태조(太祖) - [단릉(單陵)]:구리시 인창동 <東九陵 소재>
    건원릉은 태조 이성계의 만년유택으로 이 능터는 태조 이성계가 1408년(태종8년) 사망하자 태종의 명으로 파주, 고양 등 서을 가까운 곳에서  길지를 물색하던 중 당시 검교참찬 의정부사를 지내던 김인귀의 추천으로 하륜(河崙)이 양주검엄(楊洲儉嚴:지금의 구리시 인창동)에 나아가 보고 능지로 택정하였다고 한다. 

 항간에 알려진  동구릉 상지전설(相地傳說)에 의하면 태조가 생전에 무학(無學)을 시켜 자기와 후손이 함께 묻힐 족분의 적지를 택정하게 하여 얻은 것이라고 전하고 있으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무학의 

   
  법술이 신통함을 빙자하여 만든 일화에 불과하다. 9개의 능역이 조성된 경위를 보면 일일이 여러 곳의 길지를 물색하다가 종당에는 이곳으로 귀착된 것으로 되어 있다.
   
    이곳은 1408년 태조의 건원릉(建元陵) 터로 쓰여지기 시작한 뒤 조선시대 일대를 통하여 9개의 능역에 17위의 왕과 왕비능을 안장한 왕릉군(王陵群)으로 족분(族墳)을 이루고 있다.  

 동구릉이라고 부른 것은 문조(文祖)의 능인 수릉(綏陵)이 아홉번째로 조성되던 1855년(철종 6년) 이후의 일이며, 그 이전에는 동오릉(東五陵)·동칠릉(東七陵)이라고 부르던 사실(史實)이 실록에 전하고 있다. 동구릉의 지세가 풍수지리이론에 합당한 유수한 지세임은 감여가(堪輿家)들이 여러 대를 걸쳐 여러 곳으로 능터를 물색했으나 종당에는 이 곳에서 무려 9개의 능터를 찾아낸 것을 미루어 보아도 알 수 있으며, 또한 태종 때 명나라 사신들이 건원릉을 둘러보고 그 산세의 묘함에 감탄하여 "어떻게 이와같은 천작지구(天作地區)가 있는가? 필시 인간이 만든 조산(造山)일 것이다." 라고 찬탄하였다

   
    건원릉의 홍살문 안쪽에는 정자각이 있고, 정자각 남쪽에 있는 것은 비각과 수복방이다. 비각 안에는 태조의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죽은 사람의 업적을 기록하여 세우는 신도비는 중국 진송때 비롯된 것으로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것들을 살펴보면 사대부가의 것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으나 왕릉의 신도비는 건원릉에 있는 태조 신도비와 헌릉에 있는 태종 신도비 뿐이다.
   
    건원릉 입구의 홍살문 앞에 들어서면, 웅장한 금잔디 구릉(邱陵) 정중앙에 상투처럼 솟은 봉분 위의 억새풀이 먼저 눈길을 끈다. 쑥대머리처럼 솟아오른 억새풀을 벌초하지않은 까닭은 묘를 쓸 때 이성계의 고향인 함흥에서 옮겨 심은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따라서 이곳의 억새풀은 600년의 역사를 버텨온 유서 깊은 억세풀인 셈이다. 일화에 의하면 고향 함흥을 그리워하는 태조에게 함흥산 억세풀로 마지막 옷을 해드렸다는 전설이 전한다.
   
    태조는 유언으로 아들 태종에게 한양은 몸서리치는 기억뿐이니 고향 땅 함흥에 영면시켜 달라고 했으나 태종은 조선의 첫 왕릉을 한양과 천리나 동떨어진 먼 북녘 땅, 함흥에다 조성할 수는 없었다. 그 연유는 한양을 국도로 삼은 조선왕권의 누수 현상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죽은 아비의 유언을 완전히 묵살시킬 수만은 없어 태종은 태조를 함흥땅에 묻지는 못했지만, 함흥 억새풀로 떼를 입히는 것으로 유언을 져버리지는 않았다고 한다.
   
    건원릉 후미의 산마루에 올라서면 전.후.좌.우로 첩첩이 둘러쌓인 산줄기와 멀리 남쪽으로 구리시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수려한 주변의 경관과 산세를 둘러보면 일별지하에도 길지명당(吉地明堂)임을 스스로 느끼게 한다.
   
    건원릉은 고려왕릉 중 가장 잘 정비된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현정릉 제도를 기본으로 만들어 졌다. 태조는 생전에 계비 신덕왕후 강비(康妃)의 정릉(貞陵)을 고려 공민왕 능제(陵制)를 기본으로 만들었으며, 사후에 신덕왕후 강씨와 함께 묻히기를 바랬다. 공민왕과 노국공주처럼 쌍릉에 합장되기를 바라고 축조한 것이 신덕왕후의 정릉(貞陵)이다. 

  하지만 계모 강씨(康氏)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태종은 부왕의 유언을 따르지 않았다. 문무석과 석마, 병풍석의 문양 등의 양식에서는 고려 현정릉의 영향을 받았지만 , 석호.석양의 배치나 장명등, 곡장, 난간석주는 새로운 양식을 도입, 새왕조가 시작되었음을 시사했다. 

  어찌 되었든 간에 이 건원릉의 조성양식은 이후 조선왕조 능제(陵制)의 표본이 되었다.  북동서 방면 3면(面)의 곡장(曲墻) 안에 단릉(單陵)의 봉분(封墳) 형식으로 봉분 앞 중앙에 상석과 장명등(長明燈)을 설치하고 양 옆에는 한 쌍의 망주석(望柱石)을 두었다. 그리고 한 단 아래의 좌우로 문인석(文人石)이 석마(石馬)를 뒤에 대동하고 있고, 그 아래 단에 역시 좌우로 무인석(武人石)이 석마(石馬)를 뒤에 거느리고 있어 왕릉의 위엄을 갖추었다. 본래 이와 같은 능의 상설 제도는 고려(高麗) 왕릉 중에서 가장 웅장하고 화려한 공민왕(恭愍王)의 현릉(玄陵)을 기본으로 삼아 설치한 것이다.
 

   
    태종 방원은 건원릉을 조성하면서 원찰로 개경사를 축조했다고 문헌에 전하나 지금은 건물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건원릉 공사를 위해 모두 6000명의 군졸이 징발되었고 공사 기간도 2개월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태조생부 환조묘지설화(李太祖生父 桓祖墓地說話)
    이성계(李成桂)가 그 아버지 환조(桓祖)의 묘지를 택할 때에 있었던 이야기, 

  이성계가 27세 되던 해(1361년 공민왕 10) 4월에 함경남도 함흥에서 아버지의 상(喪)을 당했다. 그는 길지(吉地)를 구하여 장사하려고 남몰래 고민하고 있었다.

  때마침 그때 풍수지리에 능통한 사람처럼 보였던 두 사람의 행각승(行脚僧)이 함흥 땅을 지나갔다. 그들은 길가에 앉자 쉬면서 다음과 같은 대화를 했다.

  사승(師僧)이 동편쪽에 있는 산을 가르키며 "저 산에 장사지내면 제왕이 나올 터인데 너는 알겠느냐?"고 했다. 그러자 제자승(弟子僧)이 대답하기를 "세 개의 지맥(支脈) 가운데 중앙의 맥의 낙맥하여 짧은 기슭을 이루고 있으니 그 곳이 바로 정혈(正穴)인듯 합니다" 하였다. 

  다시 사승(師僧)이 말하기를 "너는 아직 자세히 모르는구나, 사람의 양손도 오른손이 중요하듯이 저 오른쪽 지맥(支脈)의 기슭이 진혈(眞穴)이다"라고 했다.

  때마침 그 곳을 지나던 이성계의 가복(家僕)이 이 문답을 몰래 듣고, 즉각 달려가 이 사실을 이성계에게 고하였다.        

  이성계는 즉시 말을 달려 두 승려의 뒤를 쫒아 함관령(咸關嶺) 기슭에서 겨우 만났다. 그는 그 승려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와서 후히 대접하고, 좋은 길지(吉地)의 땅을 가르쳐 달라고 애원하였다.

   마침내 그는 그 승려들을 모셔가서 노상에서 문답했던 제왕지지(帝王之地)의 땅을 점지(占指)받아 아버지를 장사지냈는데 그곳이 함흥군 북주 동면 경흥리에 있는 지금의 정릉(定陵)이다.

  그후 참으로 놀랍게도 31년이 지난 1392년 7월 17일, 58세의 나이로 개경의 수창궁에서 왕위에 올랐다. 이때의 사승(師僧)이 나옹화상(懶翁和尙)이고 그 제자는 무학(無學)이었다고 한다.(북로능전지<北路陵殿志>에 의함).

  이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당시인들의 풍수지리설에 대한 신앙과 숙명론을 엿볼 수 있다. 

   
  이성계 증조부모 덕릉과 안릉의 이장
     이태조의 고조부모인 목조(穆祖)와 효공왕후(孝恭王后)의 능이 덕릉(德陵)과 안릉(安陵)이다. 이 두 능은 원래 두만강 밖, 향각봉(香角峰) 남쪽에 있었는데, 이 능을 만들 때 철룡(鐵龍)을 산등에 묻어서 지맥(地脈)을 보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후 천하의 명당인 길지를 만나 이 묘를 강내(江內)로 이장했다.

  그곳은 함경북도 경흥(慶興)부근의 적지평(赤池坪)이라는 곳이며, 사방이 습한 곳으로 가운데 둥그런  구릉(邱陵)이 솟아 있는 곳이다. 적지평의 중앙에 높이 33보(步)의 원봉(圓峰)이 있고, 그 사방은 사람이 건너지 못할 정도로 진창으로 둘러 싸여져 있다. 이 원봉 위에 이태조의 고조인 목조를 묻었다. 풍수지리학적 형국으로 금귀몰니형(<金龜沒泥형>)이라 하고, 제왕이 나올 대명당(大明堂)이라 해서 이장하였던 것이다. 풍수지리술에 정통한 백충신(白忠信)이란 지사(地師)가 이 능을 보고 자손 가운데 반드시 왕가(王家)를 일으킬 자가 나올 것이다 라고 했다고 전한다.

  그런데 후일 이성계가 왕가를 일으킨 뒤, 태종 때 다시 이 묘를 함흥부(咸興府)인 함경남도 신흥군 가평면 능리로 이장하여 덕릉(德陵)이라 했다. 까닭인즉 경흥이 여진(女眞)에 인접해 있어 어떤 일을 당하게 될지 두려웠기 때문이다. 즉 조묘(祖墓)가 여진에 인접한 까닭으로 유해(遺骸)가 파헤쳐져 지맥(地脈)이 끊기면 왕후(王侯)의 발응(發應)이 도리어 멸족의 발화(發禍)로 변할까 두려웠던 연유이다.

   
함흥차사(咸興差使)
  조선 초기 함흥으로 간 태조를 모셔오기 위하여 보낸 사신.

  태조의 여덟 왕자가 왕위 쟁탈문제로 1398년(태조7) 골육상쟁의 <왕자 난>을 일으켜 세자 방석이 죽으니, 태조는 정치에 뜻이 없어 왕위를 정종에게 물려주고 고향인 함흥으로 갔다. 태종이 즉위하자 성석린을 보내 서울로 모셔 왔다.

  그러나 1402년(태종2)에 다시 함경도 방면으로 간 채 돌아오지 않으므로 왕이 차사(差使)를 보내 돌아오기를 권유했으나 차사마져 돌려보내지 않으므로 함흥차사란 말이 생겨, 이때부터 갔다가 돌아오지 않는 사람을 <함흥차사>라 부르게 되었다.

  일설에는 차사를 모두 태조가 죽인 것이라 하나, 문헌에는 판승추부사 박순(朴淳)의 희생만이 알려져 있다. 그후 여러 차례의 간청에도 돌아올 생각을 않다가 사부(師父) 무학대사가 가서 겨우 서울로 오게 하였다.

 
   
  제릉(齊陵)-제1대 태조의 비 신의 왕후 한씨(韓氏)의 능. - [단릉(單陵)]:구리시 판문군 상도리
  (구<舊>주소는 경기도 개성군 상도면 풍천리<上道面楓川里>이다.)
   
    齊陵의 특징
  태조의 정비(正妃)인 신의왕후 한씨(神懿王后 韓氏:1337-1391)의 능인 제릉은 신의왕후가 조선 개국(開國) 이전에 승하(昇遐)한 연유로 개성 근처에 단릉(單陵)으로 조성했으며, 조선 개국 이후에 추존(追尊)하여 제릉(齊陵)으로 명명했다.

  신의황후 약사(略史)
  조선 태조의 비. 성은 한(한), 본관은 안변(安邊), 신의황후는 고려 말기 증 영문하 부사(贈領門下府事)인 안천부원군(安川府院君) 한경(韓卿)의 딸로 태어났다. 이성계와의 슬하에  방우(芳雨) .  방과(芳果:<定宗>) .  방의(芳毅) .  방간(芳幹) . 방원(芳遠:太宗>) .  방연(芳衍)의 6형제와 그리고  경신(慶愼) . 경선(慶善) 두 공주를 낳았으며,  55세(공양왕 3년)에 승하했다.
   처음 시호(諡號)는 태조  즉위  후 절비(節妃)란 시호를 올리고,  정종(定宗) 대에 신의왕후(神懿王后)로 추존되었고, 태종 8년에  승인순성(승인순성)이란 휘호(휘호)를 올렸으며, 태종 10년에 종묘(宗廟)에 신주를 부묘했다. 근세 대한제국 성립후 1899년(고종(高宗): 광무 3년)에 황후(皇后)로 추존되었다.

   
정릉(貞陵)-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康氏)능.-(神德王后) - [단릉(單陵)]:성북구 정릉2동 산 87
   
  貞陵의 특징
  태조 5년인 1396년에  계비 강씨(康氏)가 승하하자 원래는 서대문구 정동에 능묘를 조성하고,  원찰(願刹)로 흥천사(興天寺)를 세웠으며, 1397년(태조 6)에 태조가 능호를 정릉으로 정했다.
 

  그러나 1408년(태종8년)태조 승하 후, 그 다음해인 1409(태종9)년에 태종은 지금의 위치인 성북구 정릉동으로 옮겼다.

  태종 이방원은 태조가 계비 강씨의 소생인 방석을 세자로 책봉했던 일{1차 왕자의 난<1398년>}로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었기에 도성 안에 있던 강비의 능을 도성 밖인 양주군  즉, 현재의 정릉 자리로  옮겼다. 또한 종묘(宗廟)에 부묘되지 못했고, 세종 즉위년에는 전세(田稅) 5결(結)을 주고 족친(族親)들에게 제사를 맡기기까지 했다

 

 

  그 후 300년 가까이 방치되다가 현종(顯宗) 10년[1669년]에 종묘(宗廟)에 배향되면서 복구되었다.
다소 초라한 모습으로, 병풍석(屛風石) .  난간석(欄干石) . 무인석(武人石) 등은 없고,  다른 왕릉에 비해 규모가 작은 것으로 보아  정릉의 수난사를 엿볼 수 있다.

神德王后 약사(略史)
 : 태조의 계비. 성은 강(강), 본관은 곡산(곡산),고려말 권문세가인 판삼사사(判三司事)를 지낸 상산부원군(象山府院君) 강윤성(康允成)의 딸로 태어난 신덕왕후는 이성계와 처녀시절의  일화로 유명하다. 이성계가 호랑이 사냥에 목이 말라 우물을 찾았는데, 우물가의 한 여인에게 서 받은 바가지에 버들잎이 들어있는 것을 보고 화를 냈다가, 그  연유를 알고는 여인의 지혜에 감탄했다는 이야기는 모를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이야기이다. 

  태조의 총애를 받아 조선 건국 후 현비(顯妃)로 책봉되어 조선 최초의 국모(國母)가 되었다.  방번(방번) . 방석(방석)의 두 왕자와  경순공주(경순공주)를 낳았고, 능은 정릉(정릉)이다.
  하지만 태종(太宗)의 핍박으로 사후에 무덤이 옮겨져 방치되다가 현종대(顯宗代)에 종묘에 배향되었는데, 제사를 지내는 날 한(恨)을 풀어주는 많은 비가 내려, 이 비를 가르켜 신덕왕후의 원한을 씻어주는 비라는 뜻으로 세칭, '세원지우(洗寃之雨)'라고 합니다.

 

   

 
 
  현릉(顯陵)-5대 문종(文宗)과 비 현덕왕후 권씨[同原異岡陵]. 구리시 인창동 62 <東九陵 소재>
 
 

顯陵의 특징
 문종
(이향(李珦):1414-1452, 재위 2년)과 현덕왕후 권씨(顯德王后 權氏:1418-1441)의 현릉은 좌우 언덕에 왕과 왕비의 봉분(封墳)을 따로 조성한 동원이강형식(同原異岡形式)으로 배치하였다. 

 동구릉 경내의 넓은 길을 따라 들어가다 보면 건원릉 동쪽으로 보이는 능묘가 현릉이다.   조선 제5대 문종과 현덕왕후의 능이라고 씌어 있는 안내문과 홍살문이 나타난다.   왕이 제사를 지내러 올 때 연(임금이 타는 가마의 하나)에서 내려 혼자 걸어들어갔다는 문이 홍살문이다. 

 

  이 홍살문은 능역에 들어가는 첫 관문으로 임금은 홍살문에서 내려 홍살문 바로 오른편에 있는 돌바닥 판위에 올라가 절을 하고 능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홍살문.정자각.비각 등 부속시설은 하나만 만들되, 정자각 뒤 좌우의 언덕에 왕과 왕비의 무덤을 단릉처럼 따로따로 조성한 능을 동원이강 형식이라 한다

  문종은 세종의 맏아들로 8세에 왕세자로 책봉되어 37세로 왕위에 오를때까지 20여년간 세종을 도왔다. 일찍부터 몸이 불편했던 세종은 세자의 나이 29세때부터 섭정을 하는데 필요한 기관인 첨사원을 설치하고, 세자로 하여금 왕처럼 남쪽을 향해 앉아서 조회를 받게 하는 등 제반준비를 서둘렀다. 수조당을 지어 섭정 준비를 마무리한 세종은 세자나이 32세때부터 본격적으로 세자로 하여금 섭정케 했다. 

  6년간의 대리청정으로 정치경험을 쌓은 세자는 세종 승하후 37세에 왕위를 계승하였다.

  이렇듯 세자 시절부터 정치경험을 쌓았기 때문에 문종시대의 정치 분위기는 세종 후반기와 거의 유사했다. 문종은 즉위한 후 언로를 열어 민의를 파악했으며, 문무(文武)를 아울러 중용했으므로 신민(臣民)의 신망이 컸다.

  또한 학문을 사랑했던 군주답게 <동국병감>을 찬술하게 하고, <진법구편>을 친히 저술하기도 했다. 세자로 있을 때부터 진법을 편찬하는 등 군정에 관심이 많았던 문종은 즉위 후에 군사제도를 개편하는 등 군제상의 개혁도 단행했다. 그러나 몸이 허약했던 문종은 재위 2년만에 어린 세자(단종)를 남겨 놓고 보령 39세로 경복궁 정침에서 승하하고, 나이 어린 세자 단종이 즉위함으로써 계유정난, 세조의 찬위, 사육신 사건 등 정치적으로 불안한 사건을 초래하는 계기가 되었다. 

  현덕왕후 권씨는 권전(권전)의 딸로 빈으로 있다가, 나이 20세(1437;세종19)에 폐세자빈 봉씨(奉氏)에 이어 세자빈에 책봉되었으나 4년만인 세종23년에 단종을 낳고 산후병으로 돌아가 경기도 안산에 묻혓고, 문종(文宗) 즉위년[1450년]에 현덕왕후로 책봉되어 소릉(昭陵;추봉)으로 추봉되었다. 그후 단종 즉위년[1452년]에 다시 문종과 합장(合葬)되면서 합장릉으로 현릉(顯陵)이 조성되었다. 

  그러나 세조(世祖) 3년[1457년]에 현덕왕후의 친정이 단종 복위사건에 연루되어 현덕왕후의 능이 파헤쳐져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가, 중종(中宗) 8년[1513년]에 복위되어 또 다시 현재의 위치인 현릉좌강에 동원이강릉의 형태로조성되었다.

 

 

  문종의 능은 처음에 부왕인 영릉 우측 줄기에 모시려 하였으나 물이나고 돌이나와 현재위 위치인 건원릉 동강(東崗을 선정하게 되었다. 왕릉좌강(王陵左崗)의 현덕왕후는 중종 8년 안산에서 이곳으로 천장(遷葬)하였다.

  단종의 생모였던 현덕왕후의 소릉(昭陵)은 단종 폐위 후 여러 우여곡절을 많이 겪었다. 단종 복위운동으로 인해 친정동생 권자신(權自愼)과 어머니 최씨가 극형에 처해지고 왕비마져도 추 페되어 서인이 되고, 능은 파헤쳐 물가에 옮겨 놓았다. 

현릉 측면전경
  그리고 종묘에 부묘(附廟)한 것도 폐하여 신주의물(神主儀物)까지 철거하였다. 후세에 왕비복위의 명분 가운데 하나가 종묘의 문종 신위만이 홀로 제사받음이 민망하다는 것이었다.
   성종 때 남효온이 처음으로 소릉휘호(小陵徽號)의 추복(追復)을 상소하였고, 연산군 때에도 받아드려지지 않다가 60여년 뒤인 중종 8년에 이르러 우여곡절을 거친 후 복위되었고, 현재의 위치인 현릉좌강(顯陵左崗)에 옮겨 장례하였다. 능의 석물제도와 양식은 우강의 문종왕 능제를 본따서 만들었다.
 
  뒷 이야기
 일화(逸話)에 의하면, 수양대군이 왕권을 찬탈한 후에 현덕왕후의 원혼이 궁중에 나타나 그의 가족들을 괴롭혔다는 얘기가 전한다. 그래서 세조의 큰아들 덕종이 그녀의 원혼에 시달려 죽었으며, 세조 역시 꿈에서 그녀가 뱉은 침 때문에 피부병에 걸려 고생했다고 전한다.
 

 

 
   
  목릉(穆陵)-14대 선조와 비 현덕왕후 박씨, 계비 인목왕후 김씨 [同原異岡陵]
   
    동구릉 초입에서 유릉(순종), 현릉(문종), 건원릉(태조)을 지나 계속 들어가다 보면 동구릉의 가장 안쪽인  건원릉 동쪽언덕에  목릉이 보인다. 대개의 능은  홍살문 안쪽으로 바로 정자각이 들여다보이는데, 목릉은 홍살문을 지나 서쪽으로 꺾여진 참도를 따라 들어가야 비로소 장자각에 이른다. 하지만 정자각에도 가기 전에  정자각 뒤로 바로 보이는 무덤이 선조의 능이고, 가운데가 의인왕후 박씨, 오른쪽이 계비 인목왕후 김씨의 능이다. 3능이 동역이강형식(同域異崗形式)으로 배치되어 있다.

 

    이 3릉 중에 의인왕후 박씨의 능이 첫번째로 안장되었습니다. 소생이 없이 선조 33년(1600년) 46세의 나이로 승하하자, 처음에는 포천에 능지를 정하고 역사를 진행했으나 박자동이 그곳은 불길하다고 상소하여, 왕이 건원릉 내로 택지를 정하라고 명해 다시 능지를 잡은 것이 현재의 장소이다.

  이 3릉 중에 의인왕후 박씨의 능이 첫번째로 안장되었습니다. 소생이 없이 선조 33년(1600년) 46세의 나이로 승하하자, 처음에는 포천에 능지를 정하고 역사를 진행했으나 박자동이 그곳은 불길하다고 상소하여, 왕이 건원릉 내로 택지를 정하라고 명해 다시 능지를 잡은 것이 현재의 장소이다.

    조선 제14대 선조릉
   
  한편  선조의 목릉도  처음에는 건원릉 서쪽 산기슭에 있었는데, 불길(不吉)하고 물기가 있다는 원주목사 심명세(沈命世)의 상소에 따라 인조 8년( 1630  )에  현 위치로 이장해 의인왕후의 능 옆에 자리잡게 되었다. 구릉(구릉)을 파헤쳐 현실(현실)을 보니 물기가 전혀 없었다고 한다. 물기가 있다는 상소가 엉터리임을 알았으나 이미 천장(천장)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니, 그대로 실행하여 현재의 위치에 영면하게 되었던 것이다.  선조의 능을 이장항 2년 후에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가 1632년(인조 10년) 48세(1632년;인조 10년) 의 나이로 승하하자  목릉(穆陵)의 세 번째 능으로 안장되었다.
  선조 정비 의인왕후릉  
 

 

穆陵의 특징
  왕능의 봉분은 십이지신상과 운채가 조각된 전통적인 병풍석을 두른 양식이며,  두 왕비릉은 난간만 두른 양식이다. 문무석(文武石)은  3m내외의 장신으로 만들어져 장대(長大)하기만 할 뿐 말뚝 같고, 상체와 하체와의 비율도 맞지 않고, 무인석은 얼굴이 너무 크고 양쪽 귀가 코끼리처럼 앞을 보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전란과 관련이 깊다고 보겠다.  임진.정유의 양란을 겪으며, 인명피해가 커서 장인을 구하기 어려웠다는 기록이 전한다. 전후의 사정 때문인지 목릉의 석인(石人)은 열악(劣惡)하여 조선왕릉의 문무석(문무석) 중에서 가장 졸작(졸작)이라는 평이 있다.

   
 

두 번째 의인왕후릉은 병풍석(屛風石)은 없고, 난간석(欄干石)만  설치되어 있으나  특이한 점은 장명등(長明燈)과 망주석(望柱石) 등에 꽃무늬[화문(花紋)]가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이후 후대(後代)의 능까지 쓰여지며 병석문양(병석문양)으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세 번째 인목왕후능도 역시 병풍석(屛風石)은 생략되었고 난간석(欄干石)만 설치되어 있다. 문무석은 허리 윗부분과 아래가  2:1 정도로 상.하체의 불균형이 심하다. 석마(석마)는 건원릉의 석마양식의 영향인지 4족(족)을 투각(투각)해 낸 고식(고식)을 따르고 있다.

  선조 계비 인목왕후릉  
 

 

뒷 이야기
  선조(宣祖)는 중종(中宗)의 후궁 창빈(昌嬪) 안씨(安氏)의 아들인 덕흥부원군(德興大院君)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명종(明宗)의 사랑을 받다가 명종 승하후 후사(後嗣)가 없어 명종비(明宗妃)인 인순왕후(仁順王后)에 의해 1567년 조선(朝鮮) 제14대 왕으로 즉위(卽位)했다.


 즉위 초에 이황(李滉). 이이(李珥).백인걸(백인걸) 등 많은 인재를 등용, 정치에 힘쓰는 한편
<유선록>, <근사록>, <심경>, <삼강행실> 등의 책을 간행하여 널리 읽히도록 했다.

  그러나 계속되는  당쟁으로 신하들 사이에 싸움이 확대되어 동서분당이 생겼다. 이이(李珥)의 조정책도 실패로 돌아가고, 마침내 당쟁 속에 정치기강이 문란한 틈을 타서 왜인들이 침입하였다. 결국 전후 7년간이나 왜군에 국토가 유린되어 문화재는 타버리고 국운은 더욱 피폐하게 되었다. 전후에도 당쟁은 그치지 않아 복구작업에 많은 힘을 기울였지만 큰 성과를 얻지는 못했다.

   
<의인왕후 박씨 약사(略史)>
   성은 박(朴), 본관은 나주(羅州), 1555년
(명종 10년) 반성부원군(潘城府院君) 응순(應順)의 딸로 태어나 1569년(선조2) 15세에 왕비에 책봉되어 가례(嘉禮)를 행하였고 소생(所生)이 없다. 1600년(선조 33년) 46세의 나이로 승하(昇遐)해, 처음에는 포천에 능지를 정하여 역사를 추진했으나  그곳이 불길하다는고 박자동의 상소에 따라, 왕이 건원릉 내로 택지를 정하라고 명해, 다시 능지를 잡은 것이 현재의 장소이다.건원릉(健元陵) 동쪽 산 기슭의 세 능 가운데 첫 번째로 안장된 능묘이다.
 

<인목왕후 김씨 약사(略史)>

  인조대(仁祖代)까지 생존해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호칭이 친근한 인목왕후는 선조의 계비(繼妃)로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의 딸로 1584년(선조 17년)에 태어났다.

  선조가 보령 49세(1600년:선조33)에 정비 의인왕후가 승하하자 의인왕후 박씨에 이어, 1602년 19세의 나이로 선조 계비로 책봉되어 1606년 선조의 유일한 적통(嫡統)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낳았다.

 1608년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하자, 광해군을폐하고 영창대군을 추대하려던 소북(소북) 유영경(유영경) 일파가 몰락하고, 대북(대북)의 정인홍(정인홍) 등이 득세하여 1612년 윤인(윤인) 등에 의해 살해될뻔 했으나 박승종(박승종)의 저지로 겨우 목숨을 보전했다.

 1613(광해군5)년 대북파의 흉계로 친아들 영창대군이 강화로 쫒겨나고 친정 부친인 김제남이 사사(사사)된 뒤 1618년 인목대비 역시 서궁(西宮)에 유폐되었다가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을 계기로 복호(복호)되어 대왕대비가되어 인경궁 흠명전에서 기거했다.

 그후 1632년(인조 10년) 48세의 나이로 승하해 목릉(穆陵)의 세 번째 능으로 안장되었다.

  글씨에도 뛰어나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 인목왕후의 친필인 [보문경(普門經)] 일부가 전한다.  

 

 

 
  숭릉(崇陵)-18대 현종과 비 명성왕후 김씨 [雙陵]
 

숭릉(崇陵)의 특징

  현종(顯宗;1641-1674, 재위 15년)과 비(妃) 명성왕후 김씨(明聖王后金氏; 1642-1683)의 숭릉은 위치가 동구릉의 가장 남쪽으로 현재 경종(景宗) 비 단의왕후(端懿王后)의 혜릉(惠陵)아래쪽에 자리잡고 있는데,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왕릉제도에 따라 쌍릉(雙陵)의 형식으로 조성되었다. 두 봉분이 병풍석(屛風石) 없이 난간석(欄干石)으로 연결되어 있고, 각 봉분 앞에는 각각 상석(床石)이 설치되어 있다.

소재지 :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62번지 {東九陵 소재}   사 적 : 제 193 호
  특이한 점은 능원 아래 정자각(丁字閣)의 정면 지붕이 일반적인 여타 능의 지붕처럼 지붕의 양 옆면이 막 잘려진 '맞배지붕' 양식이 아니라, 위 절반은 박공지붕{건물의 두 옆쪽에 'ㅅ'꼴로 붙여 놓은 두꺼운 널빤지인 박공널을 대어 추녀가 없이 용마루까지 올라간 지붕}꼴이고 아래 절반은 네모꼴로 된 '합각지붕{혹은 팔작지붕}'의 양식으로 만들어져 있는 점이다.
합각지붕 정자각 맞배지붕 정자각

뒷 이야기
   이역(異域) 땅 청(淸)나라 심양(瀋陽)에서 볼모생활을 하던 봉림대군(鳳林大君; 孝宗)의 아들로 태어난 현종(顯宗)은 귀국{1645년} 후에 아버지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즉위하자 세자(世子)에 책봉되었고, 1659년에 효종을 이어 조선조 18대 왕위에 등극(登極)하게 된다. 그로 인해 현종은 아버지 효종의 유업(遺業)인 북벌(北伐) 계획을 성취하려 했으나 역시 이루지 못하고 대명숭향(大明崇向)의 경향만 현저하게 되었고, 34세{1674년}의 젊은 나이에 15년의 왕위와 생을 마감하게 된다.
  국내 정세에서도 즉위 초부터 조대비(趙大妃; 인조(仁祖)의 계비(繼妃) 자의대비(慈懿大妃), 장렬왕후 조씨(莊烈王后趙氏)) 복상문제(服喪問題)로 인해 남인(南人)과 서인(西人)의 2차에 걸친 당쟁(黨爭)의 결과 많은 유신(儒臣)들을 희생시키게 된다.
  재위 기간의 내치(內治)로는 호남지방에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했고, 1668년에 동철(銅鐵)활자 10만여자를 주조했으며, 송시열(宋時烈)의 건의로 동성통혼(同姓通婚)을 금지시켰다.
  아울러 현종의 뒤를 이었던 숙종대(肅宗代)에 편찬된 <현종실록(顯宗實錄)>은 남인(南人) 집권기의 1차 실록을 1683년 서인(西人) 집권기 때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으로 다시 편찬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사실은 불안한 당시의 정치 상황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사료(史料)이기도 합니다.

  명성왕후(明聖王后) 김씨(金氏)는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의 딸로 태어나 1651년{효종 2년}에 세자빈에 책봉되어 궁궐로 들어옵니다. 슬하에 숙종(肅宗)과 세 명의 공주(公主; 명선(明善), 명혜(明惠), 명안(明安))을 두었는데, 42세{1683년 숙종 9년)의 나이에 창경궁에서 승하했습니다. 

 

 
  휘릉(徽陵)-인조(16대)의 계비 장렬왕후 조씨 [單陵]
휘릉(徽陵)의 특징
  인조(仁祖)의 계비(繼妃) 장렬왕후 조씨(莊烈王后趙氏 ; 1624-1688)의 휘릉(徽陵)은 그녀가 4대의 왕대를 살아 숙종대(肅宗代)에 승하함으로 해서 현종(顯宗)의 숭릉(崇陵)에 이어 유사한 형식으로 조성되어 동구릉(東九陵) 소재 태조(太祖)의 건원릉(建元陵) 서쪽 언덕에 위치한다.
 봉분(封墳)에는 병풍석(屛風石)이 없이 난간석(欄干石)만 설치하였고, 상석(床石)의 받침 고석에는 악귀를 쫓는 귀신 얼굴을 조각해 놓았다.
휘릉 - 인조 계비 장렬왕후

莊烈王后 약사(略史)
  한원부원군(漢原府院君) 조창원(趙昌遠)의 딸로 인조 2년(1624년)에 태어난 장렬왕후(莊烈王后)는 열다섯 살의 나이{1638년, 인조 16년}로 인조의 정비(正妃) 인열왕후(仁烈王后)가 용성대군(龍成大君)을 낳은 후 승하하자 계비(繼妃)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26살의 나이에 인조가 승하해 대비(大妃)가 되었는데, 10년 후 다음 효종(孝宗)까지 승하하고, 그후 현종(顯宗)에 이어 숙종대(肅宗代) 까지 대왕대비로 지내는 기구한 인생을 보냈지만, 슬하에 소생(所生)은 없었다.
  생전에 특이한 점은 그녀로부터 야기된 사건인 관념적인 권력의 암투로 알려진 복상문제(服喪問題)에서 발단이 된 예송(禮訟)사건을 들 수 있습니다. 송시열 등의 서인(西人)과 윤휴 등의 남인(南人)의 대립이 표면화된 것은 바로 인조의 차남(次男)이었던 효종(孝宗)의 상(喪){1659년}에 장렬왕후가 몇 년의 상복(喪服)을 입어야 하는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서인(西人)의 기년설(朞年說-1년)과 남인(南人)의 삼년설(三年說-3년)의 1차 대립에 이어 효종의 비 인선왕후(仁宣王后) 상(喪){1674년, 현종15년}에 역시 서인(西人)의 대공설(大功說-8개월)과 남인(南人)의 기년설(朞年說) 2차 대립은 결국 서인(西人)에서 남인(南人)에게로 권력의 이동을 가져왔으나 다소 소모적인 논쟁으로 부정적인 평가도 내려지곤 합니다.
  하지만 송시열(宋時烈), 김집(金集) 등의 뛰어난 유학자들이 배출되어 후기 성리학(性理學)이 완숙한 경지에 이르는 시기이기도 했기에 단순하게 당쟁(黨爭)의 논리로만 평가해서는 당대의 흐름을 올바로 평가할 수 없을 것입니다.  

 
  혜릉(惠陵)-경종(20대)의 계비 단의왕후 심씨 [單陵]
惠陵의 특징
 경종(景宗) 즉위 후 추존(追尊)된 정비(正妃) 단의왕후 심씨(端懿王后沈氏; 1686-1718)의 혜릉은 소실되어 초석만 남아있던 정자각(丁字閣)과 홍살문(紅--門)을 근래에 다시 고증(考證)을 통해 복원해서 주변의 다른 능들과 보조를 맞추게 되어 그나마 다행입니다. 그리 높지 않은 언덕에 작은 석물(石物)들 등이 아담하게 조성되어 있고, 특이하게 능의 방향이 서쪽에서 동쪽을 바라보면서 자리잡고 있습니다.
소재지 :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62 <東九陵 소재>. 사 적 : 제 193 호


 봉분은 병풍석(屛風石) 없이 난간석(欄干石)만으로 호위하고 있으며, 난간석에는 12지수(十二支獸)가 새겨져 있습니다.

端懿王后 심씨(沈氏) 약사(略史)
 1686년{숙종 12년} 청송(靑松) 심씨 청은부원군(靑恩府院君) 심호(沈浩)의 딸로 태어난 단의왕후는 11세 때 세자빈(世子嬪)에 책봉되었는데, 왕비에 오르지 못하고 33세의 나이{숙종 44년}로 슬하에 소생없이 생을 마감합니다. 경종 즉위 후 왕후에 추봉(追封)되고 1726년{영조 2년}에 휘호(徽號) 공효정목(恭孝定穆)을 추상(追上)했습니다.  

 

 

 
  원릉(元陵)-영조(21대)와 계비 정순왕후 김씨 [雙陵]
 
전면모습 {東九陵 소재} 후면모습 {東九陵 소재}
 
원릉(元陵의 특징
 조선조 최장수(最長壽; 83세) 임금이자 최장 재위(在位) 국왕인 英祖{이금; 1694-1776, 재위 52년}와 그의 계비(繼妃) 정순왕후 김씨(貞純王后金氏; 1745-1805)의 원릉은 쌍릉(雙陵)으로 조성되었으며, 역시 봉분(封墳)은 병풍석(屛風石)을 생략하고 난간석(欄干石)만으로 호위하고 있습니다. 특히 원릉은 주변의 자연 경관과 능원의 조화가 잘 이루어져 있어 동구릉 내에서 아담하면서도 장엄함을 드러내고 있는 대표적인 능입니다.
 

뒷 이야기
 조선조 최장수 임금이자 조선 후기의 중흥기(中興期)를 이룬 영조(英祖)는 붕당(朋黨)의 폐해를 시정하는데 힘써, 공정한 인재 채용의 원칙을 지킨 "탕평지책(蕩平之策)"으로 유명합니다. 이는 숙종(肅宗)-경종(景宗)대를 지나면서 무수한 당쟁(黨爭)의 폐해를 직접 목격한 영조였기에 더욱 탕평(蕩平)에 매진하는 기반이 되었던 것입니다.
 영조의 치적(治績)은 사치를 금하고 농사를 장려하며, 균역법(均役法) 확립, 신문고(申聞鼓) 재설치 등 민생(民生)의 안정에 힘쓴 것에서 크게 부각됩니다. 또한 서적을 편찬하고 예의도덕(禮義道德) 권장하여 인륜(人倫)을 바로잡는 등 문화. 산업 분야도 크게 부흥시켰습니다.
 안타까운 점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아들{사도세자(思悼世子); 장헌세자(莊獻世子)}을 붕당(朋黨)의 폐해 속에서 희생시킬 수밖에 없었던 일입니다. 그 후 남인(南人)계통으로 사도세자 동정옹호 세력인 시파(時派)와 노론(老論)계통으로 사도세자 적대공격 세력인 벽파(僻派)의 싸움은 정조(正祖)-순조(純祖)대까지 이어져 조선조 말기의 혼탁한 정치적 기류의 단면을 보여주게 됩니다.

貞純王后 김씨(金氏) 약사(略史)
 1745년{영조 21년} 경주(慶州) 김씨 오흥부원군(鰲興府院君) 김한구(金漢耉)의 딸로 태어난 정순왕후는 정성왕후(貞聖王后)가 승하한 뒤, 1759년{영조 35년} 15살의 나이에 당시 66세였던 영조의 계비(繼妃)로 가례를 올립니다.
 정순왕후는 특히 사도세자(思悼세자)와 사이가 좋지 않아 사도세자의 폐위(廢位), 아사(餓死)에 적극 동조했으며, 시파(時派)-벽파(僻派)의 대립에서도 항상 벽파를 두둔해, 정조(正祖)를 이어 어린 순조(純祖)가 즉위하자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면서 남인계 시파와 종교상의 신서파(信西派)를 배격하는데 앞장을 섰습니다.
 특히 천주교도들의 대학살로 몰았던 신유옥사(辛酉獄事) 후에 사교(邪敎)의 뿌리가 뽑혔다고 축배까지 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역시 슬하에 소생은 없었고, 1805년{순조 5년} 6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합니다. 

 
  영조(英祖) 비 정성왕후 홍릉(弘陵)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 산 30-1 {西五陵 소재}

홍릉(弘陵)의 특징
 영조의 비 정성왕후 서씨(貞聖王后徐氏; 1692-1757)의 홍릉은 특이하게 쌍릉(雙陵)으로 조성하려다가 단릉(單陵)으로 남게 되어 곡장(曲墻) 안쪽의 반은 빈 공간으로 남아있습니다. 그 이유는 영조가 홍릉을 정하면서 후(後)에 함께 묻히고자 공간을 미리 조성했는데, 영조 승하 후에 대신들의 의견이 분분하여 정조(正祖)는 현재의 동구릉 소재 원릉(元陵)으로 영조의 능을 정하고 홍릉의 빈 공간은 그대로 남겨둔 것입니다.

貞聖王后 서씨(徐氏) 약사(略史)
 1692년{숙종 18년} 달성(達城) 서씨 달성부원군(達城府院君) 서종제(徐宗悌)의 딸로 태어난 정성왕후는 1704년 숙종(肅宗)의 네 번째 왕자였던 연잉군{영조}과 혼인하여 달성군부인(-夫人)에 봉해졌고, 세자빈(世子嬪)에 이어 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 왕비에 진봉(進封)됩니다.
 66세의 생을 살았지만 슬하(膝下)에 소생없이 1757년{영조 33년}에 승하합니다.

 

 

 
  경릉(景陵)-24대 헌종과 비  효현왕후 김씨, 계비 효정왕후 홍씨[三連陵]
 
  후면모습 전면모습
 

소재지 :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62 {東九陵 소재}

景陵의 특징
 : 憲宗(이환 : 1827 - 1849, 재위 15년)과 정비(正妃) 효현왕후 김씨(孝顯王后金氏: 1828 - 1843), 계비(繼妃) 효정왕후 홍씨(孝定王后洪氏 : 1831 - 1904)를 모신 경릉은 조선조의 왕릉 가운데 유일하게 세 개의 봉분(封墳)을 나란하게 배치한 쌍릉(雙陵) 형식의 변형인 삼연릉(三連陵)의 형식을 하고 있습니다. 왼쪽부터 왕과 정비, 계비의 순으로 배치된 경릉은 각 봉분 앞에 상석(床石)만 별도로 설치되어 있고 여타(餘他)의 석물(石物)들은 단릉(單陵)의 상설제도를 따르고 있습니다.
 동구릉(東九陵) 소재 9개의 능으로 논할 때 조성 시기로는 추존(追尊)된 익종(翼宗:[문조])의 유릉(綏陵)이 마지막이지만 세가(世家) 계통(繼統)으로는 익종의 아들인 헌종의 경릉이 마지막이 됩니다.

 
 

뒷 이야기
 23대 순조(純祖)의 아들인 세명세자(世明世子:[추존 익종])의 아들로 태어난 憲宗은 세명세자가 요절(夭折)하자 조부(祖父)인 순조의 대를 이어 1834년에 조선조 24대 왕위에 올라 15년간의 재위(在位) 시절을 마치고 슬하(膝下)에 자식없이 1849년 23세의 젊은 나이로 승하(昇遐)합니다.
 헌종대의 시대적 배경은 조선조의 내적 모순(矛盾)이 가중되고 외세(外勢)의 힘이 뻗쳐오기 시작한 때입니다. 국내의 정치 권력은 순조대부터 확고한 권력을 점유한 세도정권(勢道政權)이 점차 가속화됩니다. 헌종이 8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순조의 비인 순원왕후 김씨(純元王后金氏)가 7년간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함으로 인해 안동 김씨(安東金氏)의 세도 정치가 지속되는데, 한 때 헌종의 외척(外戚)이었던 풍양 조씨(豊陽趙氏)인 외조부 풍은부원군(豊恩府院君) 조만영(趙萬永)의 문중(門中)이 권력의 틈새로 들어와 두 문중의 권력 분립이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헌종의 비(妃)로 안동 김씨 김조근(金祖根)의 딸이 책봉되면서 다시 안동 김시의 세도 권력이 독점을 하고 그들의 주도로 철종(哲宗)의 왕위 계승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이러한 권력의 정체(停滯)는 그 산물(産物)로 삼정(三政: 전부(田賦), 군정(軍政), 환곡(還穀))의 문란(紊亂)을 가속화시키고, 그로 인해 전국적인 민란(民亂)의 원인을 제공하게 됩니다. 또한 통치 체제에 위협을 느끼게 했던 천주교(天主敎)에 대한 탄압은 그 정도를 더해 '기해사옥(己亥邪獄)'과 '김대건(金大建) 신부 처형' 등으로 대처하는 등 국가의 내적 모순을 축적(蓄積)하게 된 것입니다.
 헌종대의 외세(外勢)에 접근은 조선의 문호(門戶) 개방을 적극적으로 요구하게 되는데, 조선의 권력층은 이에 대한 대응책을 적절하게 제시하지 못하고 쇄국(鎖國)의 길을 걷게 되는 한계에 부딪치게 됩니다.

< 효현왕후 김씨 약사 >
 효현왕후 김씨(孝顯王后金氏)는 안동 김씨(安東金氏) 영흥부원군(永興府院君) 김조근(金祖根)의 딸로 태어나[순조 28년], 1837년[헌종 3년]에 왕비(王妃)에 책봉(冊封)되고, 1841년에 가례(嘉禮)를 올려 왕후(王后)가 되었으나 2년만에 16세의 나이로 슬하에 후사(後嗣)없이 승하합니다.[헌종 9년]

< 효정왕후 홍씨 약사 >
 
  효정왕후 홍씨(孝定王后洪氏)는 본관(本貫)이 남양(南陽)인 익풍부원군(益豊府院君) 홍재룡(洪在龍)의 딸로 태어나 효현왕후(孝顯王后) 승하 후, 1844년 왕비에 책봉되었으나, 5년 뒤에 헌종이 승하하자 철종대(哲宗代)를 이어 고종대(高宗代)까지 왕대비(王大妃)로 지내면서 여생(餘生)을 보내다가 고종 41년[1904년]에 역시 슬하에 소생(所生)없이 승하한다.

   

 

 
   
  수릉(綏陵)- 추존 익종과 비  신정왕후 조씨[合葬陵]
   
 

수릉(綏陵)의 특징
  순조(純祖)의 아들이자 헌종(憲宗)의 아버지인 추존왕
(追尊王)익종(翼宗: 1809 - 1830)과 비 신정왕후 조씨(神貞王后趙氏: 1808 - 1890)의 수릉은 몇 차례 능지(陵地)가 옮겨지다가 현 동구릉(東九陵) 경내(境內)로 자리잡습니다. 

  세자(世子) 때 승하{헌종 즉위 후 익종으로 추존}한 익종(翼宗)은 경종(景宗:20대)과 계비(繼妃) 선의왕후(宣懿王后)를 모신 성북구의 의릉(懿陵) 옆에 자리잡았는데, 헌종 12년[1846년]에 길지(吉地)로 옮기자는 논의에 따라 양주군(陽州郡) 용마산(龍馬山) 기슭으로 천장(遷葬)을 하게된다.

익종과 신정왕후 - 綏陵
    소재지;구리시 인창동 62 {東九陵 소재}
   
 

  그 후 철종(哲宗) 6년[1855년]에 현 위치인 태조(太祖)의 건원릉(健元陵) 옆으로 다시 천장을 하면서 동구릉의 마지막 아홉 번째 능이 되었고, 이로 인해 동구릉(東九陵)이라는 명칭이 사용되게 된다. 문조(文祖)라는 시호로 많이 불린 것은 대한제국 성립 후 1899년에 황제(皇帝)로 추존(追尊)되면서 문조익황제(文祖翼皇帝)라 칭한 것에 연유한다.
   22세의 나이로 요절(夭折)한 익종(翼宗)과는 달리 83세의 장수(長壽)와 권력의 정상에 있었던 신정왕후(神貞王后)는 고종(高宗) 27년에 승하해 수릉(綏陵)에 합장(合葬)을 한다.

  추존(追尊)의 약사(略史)
{孝明世子 - 翼宗[文祖]} : 젊은 나이에 요절한 익종(翼宗)은 순조(純祖)와 순원왕후 김씨
(純元王后金氏)의 슬하에서 장자(長子)로 태어났다. 4세 때[순조 12년] 세자(世子)로 책봉되어 효명(孝明)의 시호(諡號)를 받고 1827년[순조 27년]에 왕명(王命)으로 대리청정(代理聽政)을 하는데, 민정(民政)에 힘써 어진 인재들을 등용하고 형벌(刑罰)을 삼가는 등 적극적인 왕권(王權)의 강화에 힘썼지만 안타깝게도 대리청정 4년만에 요절하고 만다. 결국 다시 세도정권(勢道政權)의 힘이 강해지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 것이다.

{神貞王后 趙氏} : 풍은부원군(豊恩府院郡) 조만영(趙萬永)의 딸로 태어난[순조 8년] 신정왕후(神貞王后趙氏)는 순조 19년[1819년]에 세자빈(世子嬪)에 책봉되어 슬하에 헌종(憲宗)을 생산한다.
  익종(翼宗)이 요절함으로 인해 외로운 일생을 보낸 반면에 국가 권력의 정상에 군림(君臨)하고 일생을 마친 점은 화려했다고 하겠다. 곧 안동김씨(安東金氏) 세도정권의 중심이었던 순조(純祖)의 비(妃) 순원왕후(純元王后)가 승하하자
[1857년, 철종 8년] 새로운 세도정권 세력으로 풍양조씨(豊壤趙氏)가 권력을 잡게 되는데, 결정적 요인은 헌종(憲宗)의 외척(外戚) 세력이 바로 풍양조씨였던 것이다.
  풍양조씨 세도정권의 중심이었던 신정왕후는 철종(哲宗)이 후사(後嗣)없이 승하하자 철종을 이을 후계자 결정권을 쥐고 평소 친분이 있었던 종친(宗親) 이하응(李昰應)을 권력의 내부로 끌어들여 고종(高宗) 승계를 주도한다. 결국 어린 고종(高宗)을 대신해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면서 권력을 흥선대원군(興善大院君)에게 인계하는 역할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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