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오릉(西五陵)        목록가기

 

서오릉(西五陵) 안내
 
서오릉(西五陵)은 조선조의 왕족무덤으로 동구릉(東九陵) 다음가는 조선왕실의 왕릉군(王陵群)이 집결된 곳이다.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에 위치한 서오릉(西五陵)은 주변 경관이 뛰어나 관람객의 발길이 빈번한 곳이기도 하다.
  서오능에 첫 능역이 조성된 시기는 조선조 세조(世祖) 3년
[1457년]이다. 당시 세조의 세자였던 원자(후에 덕종으로 추존됨)가 나이 20에 요절(夭折)하자, 여러 길지(吉地)를 물색하던 중 이곳이 풍수지리적(風水地理的) 측면에서 길지(吉地)로 추천되어 부왕(父王)인 세조가 직접 답사한 후 세자묘로 결정되었다.

  그후 덕종의 비 소혜왕후 한씨(昭惠王后 韓氏)가 연산군 10년에 67세의 나이로 승하하자, 동원이강(同原異岡)의 형식으로 경릉에 함께 조성했다.

                     서오릉 경내에 소재한 창릉(예종)
 

경릉(敬陵)이 조성된 뒤에, 

덕종(德宗)의 동생인 8대 예종(睿宗)의 능원(陵園)인 창릉(昌陵)이 1470년에 조성(계비(繼妃) 안순왕후 한씨(韓氏)와 동원이강 형식으로 창릉에 조성됨)되었고, 

또한 1680년(숙종 6년)에 숙종 비(妃) 인경(仁敬)왕후 김씨익릉(翼陵)에 이어, 

숙종과 계비 인현(仁顯)왕후 민씨, 인원(仁元)왕후 김씨를 모신 명릉(明陵)(인현왕후릉(1701년)과 숙종릉(1720년)은 쌍릉(雙陵)형식, 인원왕후릉(1757)은 단릉(單陵)형식)이 조성되었으며, 

마지막으로 1757년에 영조(英祖)의 비(妃) 정성(貞聖)왕후 서씨의 홍릉(弘陵)이 조성되어 서오릉(西五陵)의 명칭을 사용하게 된다.

   또한 서오릉에는 왕릉(王陵)뿐만 아니라 원(園)과 묘(墓)도 다수 있는데, 명종(明宗)의 장자(長子)인 순회세자(順懷世子)를 모신 순창원(順昌園)과 일제시대 때 숙종의 후궁(後宮)인 장희빈(張禧嬪)의 대빈묘(大嬪墓)도 옮겨져 경내(境內)에 조성되었다.

 

 

 

  추존 덕종(德宗)과 소혜왕후(昭惠王后) 한씨의 능 - 경릉(敬陵)
  경릉(敬陵)의 특징


  
아들 성종(成宗)이 왕위에 오르자, 세자로서 죽은 아버지 덕종을 왕으로 추존하여 능호를 경릉(敬陵)으로 명명했다. 왕비 소혜왕후 한씨가 연산군 10년, 67세로 승하하자 경릉(敬陵) 능역에 동원이강(同原異岡陵)의 형식으로 능묘를 조성했는데, 특이하게 일반적인 능 배치와 상반되게 오른쪽이 덕종의 능이고 왼쪽이 소혜왕후의 능이다.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 산30 <서오릉(西五陵) 소재>. 사적 : 제 198 호 
   
     덕종의 능은 세자(世子) 신분으로 승하했기 때문에 세조(世祖)의 평소 소신인 간략한 장례로 인해, 봉분에 병풍석, 난간석, 무인석(武人石) 등은 생략하고, 대군묘 형식으로 간략하게 조성되어 이후 추존(追尊)된 능의 전례를 삼게 된다. 그러나 소혜왕후의 능은 생전에 덕종 추존과 함께 왕비로 추숭(追崇)되었고, 예종(睿宗)보다 뒤에 승하했기 때문에 예종의 창릉(昌陵)을 모태로 조성되어 병풍석(屛風石)을 제외하고는 제대로 된 왕릉의 형식을 취했다.
   
  추존(追尊) 약사(略史)
   수양대군{세조}의 장남으로 태어난 덕종은 총명하게 자라  의경세자(懿敬世子)가 되었으나 병약하여 슬하에 월산대군(月山大君)과 성종(成宗)을 두고 20세의 나이에 요절했다. 이에 성종 2년[1471년]에 의경왕(懿敬王)으로 추존되고, 성종 7년[1476년]에 묘호를 덕종(德宗)으로 능호를 경릉(敬陵)으로 명명했다.

  소혜왕후 한씨는 1437년[세종 19년]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 한확(韓確)의 딸로 태어나 세자빈(世子嬪)에 간택된다. 덕종 승하 후 예종(睿宗)을 지나 아들 성종(成宗)대에 덕종의 추존과 함께 왕후에 책봉되었고, 손자 연산군대(燕山君代)까지 살다가 승하[연산군 10년]했다. 특히 소혜왕후는 불경(佛經)에 조예가 깊었으며, 부녀자들을 위한 <여훈(女訓)>을 편찬하기도 했다.

   

 

   

제8대 예종(睿宗)과 계비(繼妃) 안순왕후(安順王后) - 창릉(昌陵)
 
 
                                 예종릉                              안순왕후릉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 산30 <서오릉(西五陵) 소재>. 사 적 : 제 197 호
 
창릉(昌陵)의 특징
   일반인에게 비공개 능인 창릉(昌陵)은 단명 임금 예종(1450-1469, 재위 14개월)과 계비(繼妃)인 안순왕후 한씨(安順王后 韓氏 :? -1498)의 능으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식을 취하고, 석물(石物)의 배치는 {국조오례의(國祖五禮儀)}의 전통적인 예를 따르고 있다.
 
창릉의장자각 서오릉은 세조의 맏아들이자 왕세자였던 의경세자가 20세의 나이로 요절하자 풍수지리설에 따라 길지로 추천된 이곳을 부왕 세조가 친히 거둥하여 능지로 정하면서부터 비롯되었다.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의 능인 창릉은 서오릉의 다섯 능 가운데 가장 외진 곳에 있을 뿐만 아니라 현재 일반인에게는 공개되지 않고 있다. 창릉을 찾아가자면 오륙교라고 이름이 새겨져 있는 금천교를 건너가게 된다.

이 오륙교를 건너서면 오른쪽 너머로 정자각이 보인다. 서오릉의 첫번째 능인 창릉은 왕릉과 왕비릉이 동원이강형식을 이루고 있으며, 석물의 배치는 <국조오례의>의 예를 따랐다. 다만, 특이하게도 상석을 받치고 있는 고석에 귀면을 조각하지 않고 문고리를 새겨 넣어서 그 생김새가 진짜 북과 같다. 또한 대석주의 주두(柱頭)는 둥그런 원수(圓首) 아래 환상 받침을 마련하고 사각 석주 형식을 이루고 있다.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의 동원이강식 능묘(昌陵)

뒷 이야기
  세조의 차남으로 태어난 예종은 세조가 즉위하자 해양대군(海陽大君)에 책봉되었다가, 세자였던 형 의경세자(懿敬世子 : 덕종<德宗
>))가 요절[세조 3년, 1457년]하자 세자로 책봉되어, 1468년 세조 승하 하루 전에 선위(禪位)받아 왕위에 올랐으나, 역시 1469년 11월 20세의 나이로 그만 요절하고 말았다.

  예종 세자 시절 한명회의 딸{장순왕후}이 세자빈에 책봉되었으나 다음해에 요절하자, 세조 8년[1462년]에 두 번째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왕비에 오른 분이 한백륜(韓伯倫)의 딸인 안순왕후이다.   예종 승하 후 성종 2년에 인혜대비(仁惠大妃)로 봉해지고, 연산군 3년(1497년)에 다시 명의대비(明懿大妃)에 봉해진다. 슬하에 제안대군(齊安大君)과 현숙공주(顯肅公主)를 두었고 연산군 4년(1498년)에 승하했다.

 

 

 

 

  제19대 숙종(肅宗)과 계비 인현(仁顯)왕후,인원(仁元)왕후의 명릉(明陵                     
  제19대 숙종의 정비 인경왕후 김씨(仁敬王后金氏)의 익릉(翼陵)
   
 
             숙종과 계비 인현왕후의 쌍릉(雙陵)                       인원왕후의 단릉(單陵)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 산 30-1 {西五陵 소재}. 사 적 : 제 198 호
   
 

명릉(明陵)의 특징
  숙종(肅宗; 1661-1720, 재위46년)과 계비(繼妃)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閔氏; 1667-1701), 제2계비 인원왕후 김씨(仁元王后 金氏; 1687-1757) 명릉은 동원이강(同原異岡)의 형식으로 정자각(丁字閣)에서 바라보면 왼쪽에 숙종과 인현왕후의 쌍릉(雙陵)이 있고, 오른쪽에 인원왕후의 단릉(單陵)이 조성되어 있다.


  조성된 순서는 인현왕후가 처음 이 위치에 조성되었고, 다음 숙종이 그 옆에 쌍릉(雙陵)으로 조성된 후 인원왕후릉이 오른쪽 언덕에 자리잡게 된다. 숙종 6년{1680년}에 승하(昇遐)한 숙종의 정비(正妃) 인경왕후 김씨(仁敬王后金氏)의 익릉(翼陵)이 또한 같은 서오릉(西五陵) 내에 조성되어 있는 것을 볼 때 숙종은 사후(死後)에도 자신의 세 왕비를 모두 가까이 두게 된 것이다. 11대 중종(中宗) 역시 세 명의 왕비를 두었지만 모두 다른 위치에 조성된 것과는 대조를 이루고 있
다고 하겠다.

   
  서오릉에 있는 명릉은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않는 비공개 왕릉이다. 관리사무소로 쓰고 있는 재실 오른쪽으로 난 작은 오솔길 숲으로 들어가 10여미터를 걸으면 바로 명릉의 홍살문이 나타나고, 홍살문 뒤로 참도가 반듯하게 나 있다.

 명릉은 조선 제19대 숙종과 계비 인현왕후 민씨의 쌍릉과 그 오른쪽 언덕에 있는 제2계비 인원왕후 김씨의 단릉을 함께 칭하는 말이다. 동원이강형식의 능이다. 비각 속에는 표석 두 개가 각각 문을 달리하여 나란히 서 있는데 왼쪽의 것은 숙종과 인현왕후 민씨의 비이고 오른쪽은 인원왕후 김씨의 비이다.

 숙종과 인현왕후 민씨의 쌍릉은 석물의 크기가 실물크기와 비슷하다. 척수를 줄여 왜소한 문,무인석 각 1쌍. 석마 2쌍과 봉분을 둘러싼 석양, 석호 각 2쌍 봉분 중앙의 사각 장명등이 이채롭다. 병풍석을 두르지 않고 난간석만 둘러 두 봉분을 연결했다.

                         명릉전경(明陵全景)  
 
  앞에서 보아 왼쪽이 숙종, 오른쪽이 인현왕후 민씨이다. 난간석에는 방위표시를 위한 문자를 음각으로 새겨넣었는데 풍화가 심하지 않아 문자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이다. 두 봉분 앞에는 상석이 각각 하나씩 있고, 망주석 1쌍이 좌우에 서 있으며, 3면의 곡장이 봉분을 에워싸고 있다.
 
  인원왕후의 능도 마찬가지로 석물의 크기가 작다. 난간석의 무늬가 숙종릉의 난간석 무늬와 조금 다르고 상석이 한 개라는 점이 다를 뿐 나머지 상설(常設)은 같다. 영릉의 정자각에서 보면 숙종과 인현왕후의 쌍릉이 왼쪽 갑좌경향(동쪽에서 서쪽방향)의 언덕에, 인헌왕후의 단릉이 오른쪽 을좌신향(동쪽에서 서쪽방향)의 언덕에 있다. 처음에 인현왕후가 승하하자 현 위치에 장사지내고 인조의 장릉의 예에 따라 우측을 비워 왕릉기(王陵基)로 표를 남겨두었다가, 이후 아들 경종이 즉위하여 숙종의 장례를 치루고 능호를 명릉으로 정했다고 한다. 그 뒤 영조 33년 인원왕후가 승하하자 그 오른쪽 언덕에 안장되어 숙종, 인현왕후의 쌍릉과 더불어 동원이강을 이루게 되었다.
 
 
    명릉의 특이한 점은 석물(石物)들이 왜소하다는 것이다. 숙종이 재위(在位) 시절 복위된 단종(端宗)의 장릉(莊陵)과 단종비(妃)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의 능인  사릉(思陵)을 조성할 때, 검소하고 간촐하게 조성할 것을 명하였고, 자신도 역시 간소하게 조성하여 석물(石物)들도 크기도 거의 실물과 비슷하게 다소 작게 만들어진 것이다.  

  아울러 부장(副藏) 명물(明物)도 간촐하게 줄였다고 한다. 또한 새로운 양식으로는 능 앞의 장명등(長明燈)의 지붕이 팔각(八角)이 아닌 사각(四角)의 모양을 하게 된 것도 명릉부터 볼 수 있는 양식이다.

 
  명릉의 석물은 다른 능에 비해 작고 왜소하다. 숙종은 일찍이 단종과 그 비의 능인 장릉, 사릉을 조영할 때 간소하고 자그마한 후릉(정조릉)의 양식을 따를 것을 명했다. 그래서 인현왕후의 국상 때에도 석물제도 일체를 후릉을 쫒아 검소하게 할 것을 명하여 규범으로 삼게했다. 명릉도 이에 따라 모든 석물의 척수를 줄여 석인은 등신대, 석수는 실물대에 가깝게 왜소하게 했고 부장명기(무덤안에 넣는 기물)도 많이 감하고 있다.

  특히 건원릉 이후의 팔각 장명등을 대신한 사각옥형개석의 장명등은 특기할 만하다. 숙종 24년에 장릉, 사릉에 사각지붕의 장명등을 세운 바가 있으나, 명릉에서 이것을 제도화함으로써, 조선후기 석물의 한 양식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1757년(영조 33년)에 세워진 인원왕후의 능은 정성왕후(영조의 원비)의 홍릉과 거의 동시에 조영됨으로써 난간 이외의 모든 석물양식은 18세기의 것과 거의 같다.

 
뒷 이야기
 

   숙종은 현종((18대)의 원자로 태어나 7세에   왕세자에 책봉되어 열네 살에 왕위를 계승했다. 3취한 숙종은 인현왕후와 인원왕후에 앞서 원비로 영돈녕부사 김만기의 딸인 인경왕후를 맞이하였으나 20세의 나이로 천연두 증세로 요절하여 같은 능역 내인 서오릉의 익릉에 안장되어 있다. 숙종은 그 외에도 제20대 경종을 낳은 장희빈과 제21대 영조를 낳은 숙빈 최씨, 명빈 박씨 등을 후궁으로 두었다.

 재위 기간이 무려 46년(영조의 51년에 이어 두번째)이나 되는 숙종대는 당쟁(黨爭)이 가장 격심했으나, 한편으로 조선 후기의 중흥기를 맞이하는 초석(礎石)을 다진 시기이기도 하다. 즉 대동법(大同法)의 전국적 실시, 상평통보(常平通寶)를 주조하여 통용하도록 하는 등 경제시책의 결실을 보았다. 대흥산성(대흥산성)을 준공하고 북항산성을 수축하였으며 함경감사 이선부를 시켜 백두산에 정계비(정계비)를 세웠다. 종래 4영이던 군제에 금ㅇ뒤영(금위영)을 만들어 5영(영)을 완성하는 등, 군제 개편 등의 치적(治績)으로 왕권을 강화시키는 효과도 있었다.

  선원록(선원록), 대명집(대명집) 등이 간행되고, 대전속록(대전속록), 신증동국여지승람(신증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되었으며, 특5히 그의 재위기간 중 쟁쟁한 학자들이 배출되어조선 말기 성리학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1691년 사육신을 복관시키고 1698년 노산군의 묘호(묘호)를 단종으로 올렸으며 1718년 민희빈(민희빈: 소현세자빈) 강(강)씨를 복위시켰다.

  세 명의 왕비가 있었지만 슬하의 왕자(王子)가 모두 후궁에서 생산되었으니, 경종(景宗)은 희빈(禧嬪) 장씨(張氏)씨의 소생이고, 영조(英祖)는 숙빈(淑嬪) 최씨(崔氏)의 소생이다.

仁顯王后 민씨(閔氏) 약사(略史)
  1667년{현종 8년} 여흥(驪興) 민씨 양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閔維重)의 딸로 태어난 인현왕후는 1680년 숙종비 인경왕후(仁敬王后)가 승하한 뒤 그 다음해인 15세에 가례를 올리고 숙종의 계비(繼妃)가 되었다.
  궁중(宮中)의 염정애사(艶情哀史)로 알려진 내간체(內簡體) 소설(小說) <인현왕후전>으로 유명하듯이 희빈(禧嬪) 장씨(張氏)와의 애증(愛憎)이 교차하고, 기사환국(己巳換局)과 갑술옥사(甲戌獄事)의 와중에서 폐위(廢位)와 복위(復位)를 하는 등의 곡절을 겪고 35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夭折)한다. 예의가 바르고 언행이 청초(淸楚)했지만 슬하에 소생은 없었다.

仁元王后 김씨(金氏) 약사(略史)
  1687년{숙종 13년} 경주(慶州) 김씨 경은부원군(慶恩府院君) 김주신(金柱臣)의 딸로 태어난 인원왕후는 1701년 인현왕후 승하후 다음해{숙종 28년}에 16세의 나이로 왕비로 책봉되고, 1713년에 혜순(惠順)이란 존호를 받는다. 영조대(英祖代)까지 왕대비(王大妃)로 지내다가 1757년{영조 33년}에 71세의 나이로 슬하에 소생없이 승하한다. 생전에 숙종의 곁에 묻히기를 원해 명릉에 함께 조성되었다.

   
숙종의 정비 인경왕후 김씨(仁敬王后金氏)의 익릉(翼陵)
 

 

익릉(翼陵)의 특징
 숙종의 비(妃) 인경왕후 김씨
(仁敬王后金氏; 1661-1680)의 익릉은 숙종이 왕릉을 간소화하라는 명(命)을 내리기 이전에 조성된 능이었기에 웅장한 모습으로 서오릉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봉분(封墳)은 병풍석(屛風石)을 생략하고 난간석(欄干石)만으로 호위하고, 석물(石物)들의 크기도 명릉(明陵)에 비해 크고 장명등(長明燈)도 역시 팔각지붕을 하고 있다.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 산 30-1 {西五陵 소재}. 사 적 : 제 198 호 
 
인경왕후(仁敬王后) 김씨(金氏) 약사(略史)
  1661년{현종 2년} 광주(光州) 김씨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 김만기(金萬基)의 딸로 태어난 인경왕후는 11세 때 세자빈(世子嬪)에 책봉되었고, 1674년 숙종이 즉위하자 왕비로 진봉(進封)된다. 숙종과의 슬하에 두 공주(公主)를 두었으나 모두 일찍 죽었고, 왕비 역시 20세의 나이에 천연두(天然痘) 증세로 요절(夭折)하고 만다. 
 

 

 

  영조(英祖)의 비(妃) 정성왕후(貞聖王后) - 홍릉(弘陵)
   
  홍릉(弘陵)의 특징
  영조의 비 정성왕후 서씨(
貞聖王后徐氏; 1692-1757)의 홍릉은 특이하게 쌍릉(雙陵)으로 조성하려다가 단릉(單陵)으로 남게 되어 곡장(曲墻) 안쪽의 반은 빈 공간으로 남아 있다. 그 이유는 영조가 홍릉을 정하면서 후(後)에 함께 묻히고자 공간을 미리 조성했는데, 영조 승하 후에 대신들의 의견이 분분하여, 정조(正祖)는 현재의 동구릉 소재 원릉(元陵)으로 영조의 능을 정하고 홍릉의 빈 공간은 그대로 남겨둔 것이다.
  정성왕후 서씨(徐氏) 약사(略史)
  1692년{숙종 18년} 달성(達城) 서씨 달성부원군(達城府院君) 서종제(徐宗悌)의 딸로 태어난 정성왕후는 1704년 숙종(肅宗)의 네 번째 왕자였던 연잉군{영조}과 혼인하여 달성군부인(-夫人)에 봉해졌고, 세자빈(世子嬪)에 이어 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 왕비에 진봉(進封)된다.
  슬하(膝下)에 소생없이 66세를 일기로, 1757년{영조 33년}에 승하한다.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 산 30-1 {西五陵 소재}. 사적 : 제 198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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