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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삼릉(西三陵) 안내
   
 

서삼릉은 서오릉과 인접한 고양시 원당동에 위치한 3기(基)의 왕릉을 말한다. 한 이곳에 있던 중중의 정릉(정릉)을 중심으로희릉(희릉).효릉)이 있는데조선 고종 원년에 예릉(ㅇ)릉)이 들어서면서 희릉.효릉.예릉의 삼릉이 되어 이것을 일컬어 서삼릉이라 부른다.

   서삼릉(西三陵)의 능들은 많은 우여곡절(迂餘曲折)을 겪는데, 1537년[중종 32년]에 처음 조성된 중종(中宗) 계비 장경(章敬)왕후 윤씨의 무덤인  희릉(禧陵)도 본래는 태종(太宗)의 헌릉(獻陵) 옆으로 택지가 결정[1515년]되었다가 권력 다툼으로 인해 1537년[중종 32년]에 이곳으로 천장(遷葬)되었으며, 이 이후로 차츰 왕릉군(王陵群)의 시작을 이룬다.

                              정자각 뒤의 효릉
 

 중종(中宗)의 정릉(靖陵)도 처음에는 계비인 희릉(禧陵) 옆에 조성했다가 현 위치인 서울시 강남구의 선정릉(宣靖陵) 위치로 천장(遷葬)[명종 17년]을 하게된다.

  그 후 최단명(最短命) 임금인 12대 인종(仁宗)[1545년 조성]과 비 인성왕후 박씨(仁聖王后朴氏)[1555년 조성]를 모신 효릉(孝陵)이 자리잡고 고종(高宗)대[1865년]에 25대 철종(哲宗)과 비(妃) 철인(哲仁)왕후 김씨[1878년 조성]를 모신 예릉(睿陵)이 들어서면서 서삼릉(西三陵)의 명칭이 사용된다.
 또한 서삼릉(西三陵) 구역 내에는 왕릉뿐만 아니라 명종(明宗), 숙종(肅宗) 이후 조선조 말기(末期)까지 왕릉뿐만 아니라 많은 후궁(後宮)과 대군(大君), 군(君), 공주(公主), 옹주(翁主)의 원묘(園墓)가 만들어져 왕실 무덤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제11대 中宗의 계비(繼妃) 장경왕후(章敬王后) - 희릉(禧陵)
   
  희릉(禧陵)의 특징
 :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 윤씨(章敬王后 尹氏;1491-1515)의 희릉은 중종의 정릉(靖陵)처럼 천장(遷葬)되어 현재의 서삼릉(西三陵) 능역에 처음으로 조성된 능이다. 원자{인종(仁宗)}를 낳고 1515년 25세의 나이로 승하한 장경왕후는 처음 태종(太宗)의 헌릉(獻陵) 옆에 조성되었으나, 1537년(중종 32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역시 중종의 부마(駙馬)였던 김안로(金安老)의 권력 암투가 희릉 천장(遷葬)의 사단(事端)이었습니다.
 희릉은 봉분의 병풍석(屛風石) 없이 모든 양식을 조선 전기의 왕릉 양식에 따르는 전형적인 능역으로 조성되었다.
 

장경왕후 윤씨는 중종 10년(1515) 인종은 낳은뒤 산후가 좋지 않아 춘추 25세로 서거하자, 처음에 능터를 헌릉국내 에 택정하였다. 그후 20 여년이 지난 중종 32년 희릉 광저에 큰 돌이 깔린 채 그대로 공사를 했다는 설(說)을 들어 천장론을 의계(議啓)하였으나 왕이 움직이지 않자, 풍수설상에 "큰 돌이 광중 밑에 깔리면 불길하다"는 설을 들어, 드디어 왕의 뜻이 움직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풍수적 길지를 두루 찾다가 현재의 위치가 적지(適地)로 추천되어 천장(遷葬)하게 된 것이다.

중종 계비 장경왕후 - 희릉(禧陵)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 산 37-1 <西三陵 소재>. 사   적 : 제 200 호
   
  장경왕후 약사(略史)
  장경왕후는 1491년(성종 22년) 파평부원군(坡平府院君) 윤여필(尹汝弼)의 딸로 태어나 중종 원년(1506년)에 궁궐에 들어와 숙의(淑儀)에 봉해졌다가 단경왕후 신(愼)씨가 폐위(1506년)되자 다음해에 왕비에 책봉된다.
 슬하에 효혜공주와 인종(仁宗)을 두었는데, 바로 인종 출산후에 산후병으로 승하한 것이다.{중종 11년}
   

 

 

 

  제12대 인종(仁宗)과 인성왕후(仁聖王后) - 효릉(孝陵)
  효릉(孝陵)의 특징
  조선조 최단명 왕위에 있었던 仁宗(이호; 1515-1545, 재위 8개월)과 인성왕후 박씨(仁聖王后 朴氏; 1514-1577)의 효릉은 31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夭折)한 인종(仁宗)의 능을 먼저 단촐하게 조성했다가, 인성왕후 승하[선조 10년] 후에 쌍릉(雙陵)의 형식으로 다시 조성되었습니다.
  재 조성할 때 인종(仁宗)의 능에는 봉분에 병풍석(屛風石)을 두르고 인성왕후 능에는 병풍석을 설치하지 않았지만, 난간석(欄干石)으로 두 능을 연결시켜 놓았다. 그리고 현재는 비공개 능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인종은 1544년 11월 20일 33세의 나이로 즉위했다. 불과 8개월이 지난 1545년 6월 29일 인종은 대신 윤인경 등을 불러 "내가 병이 걸려 정신을 차릴 수 없게 되었으므로 경원대군(명종)에게 전위하니 경들은 더욱 힘써 도와서 내 뜻에 부응토록 하라 "고 분부했다. 그리고 다시 "내가 죽거든 반드시 부모의 능 곁에 묻고 모든 내 장사는 소박하게 하여 백성들의 힘을 펴게 하라"고 분부한 뒤, 이튿날인 7월 1일 경복궁의 정침에서 승하하니 보령 31세였다,

  서삼릉 능역에 있는 효릉으로 가는 길은 능 안내도가 있는 매표소 옆길로 들어가지 않는다. 서삼릉 매표소 옆에 있는 유우개량수 옆길로 약 10분 정도 걸어가면 가시철망으로 만든 담 가운데 낡은 철문이 나오면서 홍살문이 그 너머로 보이는데 그곳이 효릉이다. 일반인에게 공개하지 않는 비공개능이다. 바로 곁에서 돌배나무가 벗삼아 자라고 있는 홍살문을 넘어서면 정자각까지 박석 위로 흙이 덮인 참도가 이어지고 있다.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지 오래인지 틈새로 자라난 풀들이 무성하다.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 산 37-1 <西三陵 소재>.         사   적 : 제 200 호
   
    효릉은 간좌곤향(북동에서 남서방향)의 언덕 위에 있는 쌍릉으로, 인종(仁宗)의 능에는 봉분에 병풍석(屛風石)을 두르고 인성왕후 능에는 병풍석을 설치하지 않았지만, 난간석(欄干石)으로 두 능을 연결시켜 놓았다. 

  인종의 봉분을 두른 병풍석에는 돌이끼가 끼어 군데군데 붉은 빛이 돌고 면석에는 십이지신상이, 그 양쪽 우석에는 운채가 조각되어 있다. 능에는 이 밖에도 3면의 곡장과 상석 2, 장명등 1, 문.무인석 각 1쌍, 석마 2쌍, 석양 2쌍, 석호 2쌍 등이 있다. 기록에 따르면 선조 10년 인성왕후가 승하하자 인종 곁에 장사지내면서 왕릉의 개수를 명해서 병풍석을 두른 것이라고 한다. 인종 승하 당시의 봉분은 병풍석 등의 석물을 설치하지 않았다. 인종이 승하한 후 을사사화로 인종의 외가 처가 및 가까운 신하들이 큰 희생과 탄압을 겪여야 했던 시대적 상황으로 미루어 보아 왕에 대한 존숭관념도 크게 엷어져서 왕릉조성을 소홀히 했던 것으로 보인다

   
  뒷 이야기
    인종은 희릉에 안장된 장경왕후를 모후로 하여 1515년(중종10년) 2월 25일 중종의 첫째아들로 태어났다.  여섯 살때인 1520년(중종 15년)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는데 3세부터 글을 배워 익히고 8세때 성균관에 입학하여 학문하기를 즐겨했다. 효성이 지극하여 중종을 섬기는데에는 그 정성과 공경을 다했고, 태어난 지 엿새만에 잃은 모후 장경왕후를 섬기지 못한 일에 스스로 상심하여 대왕대비(성종의비 정현왕후)에게 더욱 그 효도를 다했다.

  또한 검약하고 욕심이 없어서 일찍이 시녀 가운데 고운 옷을 입은 자가 있는 것을 보면 곧 내보내게 했으므로 궁중안은 엄하게 단속하지 않아도 숙연했다고 한다. 인종은 성품이 착하여 효성과 우애가 깊었다. 누이 효혜공주가 일찍 죽었을때 매우 애석히 여겨 그로 인하여 병까지 얻었으며, 쥐를 잡아 동궁인 자신을 저주한 사건인 "작서의 변"에 복성군과 그의 어머니 경빈 박씨가 혐의를 쓰고 귀양가자 그 일을 알고는 직접 소를 지어 극진히 아뢰니 중종도 이에 감동하여 그들의 관작을 회복시켜 주었다고 한다. 중종의 병환이 위독하자 인종은 반드시 먼저 약의 맛을 보았으며, 겨울철인데도 목욕하고 분향하며 한데 서서 저녁부터 새벽까지 하늘에 빌었다. 그러다가 중종이 승하하자 식음을 전폐한 게 엿새이고 울음소리를 그치지 않는 것이 다섯달이나 되었다고 기록은 전한다.

  효성이 지극해서 능호(陵號)까지 효릉(孝陵)으로 정해진 인종(仁宗)은 불과 8개월밖에 안되는 재위 기간의 운명이 생모(生母) 장경왕후(章敬王后;중종의 제1계비)의 삶과 유사하게 꽃을 펴보지도 못하고 요절(夭折)해 버린 비운의 왕이었다. 명종(明宗)이 즉위하고 명종의 생모 문정왕후(文定王后;중종의 제2계비)가 권력을 잡은 후 인종의 외척들을 제거하는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켜 더욱 사후(死後)까지 안타까운 결과를 낳는다.

   
  인성왕후 박씨(仁聖王后 朴氏)는 금성부원군(錦城府院君) 박용(朴墉)의 딸로 태어나 11세 때 세자빈에 책봉되지만 왕비 재위 8개월만에 인종(仁宗)을 떠나 보내고, 외롭게 여생을 보내다가 후사(後嗣)도 없이 64세의 나이[선조 10년]로 생을 마감한다.
   

 

 

제25대 철종(哲宗)과 비(妃) 철인왕후(哲仁王后) - 예릉(睿陵)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 산37-1 {西三陵 소재} 사 적 : 제 200 호.
  예릉(睿陵)의 특징
  조선조 제25대 철종(이변, 속명 이원범 : 1831 - 1863, 재위 14년)과 비 철인왕후 김씨(哲仁王后金氏 : 1837 - 1878)의 예릉은 서삼릉(西三陵)의 세 번째 능으로 쌍릉(雙陵) 형식으로 조성되어 있는데, 다음 대인 고종(高宗)과 순종(純宗)이 황제릉(皇帝凌)의 형식으로 조성되었기 때문에 예릉(睿陵)은 조선왕조의 상설제도를 따른 마지막 능이다.


  자좌오향(정북에서 정남향)의 언덕 위에 있는 봉분은 병풍석이 없이 난간석을 두르고 있는데, 왕과 왕비의 쌍릉이 난간석으로 연결되어 있다. 또한 장명등(長明燈)의 위치가 상석(床石)과 많이 떨어져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전형적인 왕릉(王陵)의 틀을 유지하고 있다. 

 
뒷 이야기

  헌종이 후사없이 승하하매 대왕대비 순원(純元)왕후 김씨(純祖妃)의 명으로 강화에 촌거하다가 승통을이어 19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철종은 나이가 어리고 촌에서 농사를 짓다가 왔으므로 대왕대비가 수렴정치를 하였으며, 1851년에 왕대비의 근친인 김문근(金汶根)의 딸을 왕비로 삼았다.

  김문근이 국구로서 왕을 돕게되니 순조 말부터 세도(勢道)의 폐해는 사라지지 않고 또다시 안동김씨의 손으로 들어가게 되니 재위3년부터는 친정은 하였으나  보잘것 없이 되었다. 정계는 김씨 일문의 독무대가 되고 백반(百般)을 전횡하니 정치는 어지러워지고, 기강은 문란하여졌으며, 수뢰는 공공연하게 행하여지는 상태가 되었다.

  따라서 삼정(三政:田賦.軍籍.還穀)은 어지러워지고 도처에 탐과오리는 늘고, 백성을 착취하니 인민은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이에 대한 백성들의 분노는 마침내 폭발하여 1862년(왕 13)에는 진주(晋州)에 민요(民搖)가 일어나  삼남 일대를 힙쓸었으며, 잇달아 함흥.제주에서도  민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와같은 사회현상에서 최제우의 동학은 시의에 맞는 사상운동으로 날로 커져갔다. 관에서는 겁을 내어 1863년에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속인다고 최재우를 잡아 대구에서 처형하였으나 그 운동은 그치지 않았다.

  재위 14년만인 1893년 병환으로 승하하였다. 철종은 정치를 모르는 농군의 아들로 즉위하여 세도의 농간으로 국정을 잡아보지도  못하고 후사도 없이 33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고종과 흥선대원군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哲仁王后 金氏 약사(略史) >
  철인왕후 김씨는 1837년 안동김씨 집안인 영은부원군(永恩府院君) 김문근(金汶根)의 딸로 태어나 철종 2년[18 년]에 왕비에 책봉된다. 하지만 그녀의 왕비 책봉은 안동 김씨 세도 정권의 권력(權力) 유지(維持)를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이루어진 것이었기에, 철인왕후는 철종 승하(昇遐)후 흥선대원군(興善大院君)의 집권(執權) 아래에서 대비(大妃)로 여생을 보내다가 고종(高宗) 15년[1878년] 42세의 나이로 승하해 서삼릉(西三陵) 내 철종의 예릉(睿陵)에 안장(安葬)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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