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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녕릉(英寧陵:세종의 英릉과 효종의 寧릉) 

 

  제4대 세종(世宗)과 소헌왕후(昭憲王后) - 영릉(英陵)  
   

영릉(英陵)의 특징
  세종(1397-1450, 재위32년)과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 沈氏:1395-1446)의 영릉은 본래 소헌왕후 승하{세종 28년} 후 태종의 헌릉(獻陵) 경내의 서쪽 산록에 하나의 봉분(封墳)에 석실(石室)을 둘로 하는 합장(合葬) 형태의 동릉이실(同陵異室)로 조영(造營)하고 그 우실(右室)을 왕의 수릉(壽陵)으로 삼았다가 세종이 승하하자 합장하였다. 

  그러다가 세조(世祖) 때 영릉의 불길론(不吉論)이 일어났으나, 왕이 서거정(徐居正)을 불러 물은 즉 그가 대답하기를, 【천장(遷葬)을 함은 복(福)을 얻기 위함인데 왕(王)이 그 이상 무엇을 더 바라고 원하겠습니까?】라고 아룀에 따라, 세조는 【내 또한 천장(遷葬)할 의시가 없느니라】하고, 천장의사(遷葬意思)를 거두었다.

  소재지: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 산83.사적:제195호
 

그후 예종 원년에 다시 풍수의 관사(관사)인 일관)이 청오경 등의 풍수서를 전거(전거)로 해서  영릉의 불길론과 함께 영릉을 개천(개천)하여야 한다는 의견을 아뢰자, 예종은 이를 수긍하여 결국 천장(遷葬)의 논의를 하고, 결국 예종(睿宗) 1년(1469년)에 경기도 여주(驪州)로 천장(遷葬)하여 단릉(單陵)의 합장(合葬) 형태로 만들었는데, 세조(世祖)의 광릉(光陵) 제도를 따라 석실(石室)과 병풍석(屛風石)은 쓰지 않았다.

  초기 영릉의 석조물(石造物)들은 그대로 매장(埋葬)하였는데, 이 때 신도비(神道碑)도 함께 묻고는 여주의 새 능에는 신도비를 세우지 않았다. 그 이유는 임금의 자취는 국사(國事)에 실려 있기 때문이라 했고, 이는 5대 문종(文宗) 때부터 왕릉에 신도비를 세우지 않았던 일로 인한 것이다.
 

   영릉의 능원(陵原) 구조는 봉분에 병풍석을 두르지 않고 난간석(欄干石)만 두른 단릉(單陵)으로 상석(床石)이 두 개 놓여 합장릉(合葬陵)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정자각(丁字閣) 왼쪽에는 수라간(水刺間)이 있어 제사 때에 제물(祭物)을 준비하는 곳으로 활용되었다. 아울러 바로 인접한 곳에 17대 효종(孝宗)과 인선왕후 장씨(仁宣王后張氏)를 모신 영릉(寧陵)이 자리잡고 있다.

뒷 이야기
: 32년간 재위(在位)했던 세종의 업적에 대한 평가는 재론(再論)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역대 임금 가운데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자세하게 알려져 있다. 특히 <세종실록(世宗實錄)>에 수록된 방대한 치적을 살펴보면 다른 실록에서는 볼 수 없는 '지(志)'의 수록을 통해 당대의 완비된 문물(文物) 제도를 엿볼 수 있다. 의례(儀禮)에 관한 {오례(五禮)}, 아악(雅樂)에 관한 {악(樂)}, 역사 인문을 망라한 지리서인 {지리지(地理志)}, 천문(天文)에 관한 {칠정산(七政算)} 내외편 등 당시의 다양한 분야의 연구 업적이 얼마나 방대했던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세종과 소헌왕후의 슬하에는 문종(文宗), 수양(세조:世祖), 안평, 임영, 광평, 금성, 평원, 영응대군의 8남과 정소, 정의공주의 2녀를 두었다. 수많은 치적을 이룬 성군(聖君)으로 일컫는 세종과는 달리, 왕비 소헌왕후는 친정 부친 심온(沈溫;영의정,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이 태종에 의해 사사(賜死)되는 비운을 겪었고, 경빈(敬嬪).공빈(恭嬪) 등으로 봉해졌다가 세종 14년[1432년]에야 왕비로 개봉(改封)되었으며, 부친이 역적으로 몰려 한때 왕위의 지위가 위태로웠으나, 내조(內助)의 공이 컸으므로 무사할 수 있었다. 또한 자신의 두 아들이 먼저 세상을 떠나는 등 다소 불우한 일생을 마쳤다.[세종 28년]

  영릉의 원찰(願刹)인 신륵사(神勒寺)는 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창건했다고 전해오는데, 여주로 영릉을 옮긴 후에 원찰로 삼아 보은사(報恩寺)로 개칭했으나 성리학(性理學)의 영향으로 원찰(願刹)제도가 사라져 본래의 명칭인 신륵사로 돌아오게 되었다.

 
 

 

 

 

 

 

 

 

 

 

 

 

 

 

 

 

 

 

 

 

 

 

 

 

 

 

 

 

 

 

 

 

 

 

 

 

 

 
제17대 효종(孝宗)과 인선왕후(仁宣王后) - 영릉(寧陵)
 
소재지 :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 산 83-1 사 적 : 제 195 호
             
                               영릉전경(寧陵全景)  인선왕후 장씨의 능. 뒤로 보이는 능이 효종왕릉이다.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영릉 근처에는 조선 제17대 효종과 인선왕후의 영릉(寧陵)이 있어서 여주를 찾아온 관광객은 두 왕릉을 한 곳에서 볼 수 있다. 세종대왕 영릉에서 불과 700여미터 떨어진 곳이다. 영릉은 세종대왕의 능에서 왼편, 즉 외청룡쪽으로 한 언덕 너머에 있다. 세종대왕릉을 먼저 다녀오는 사람들은 입장권을 지니고 있으면 그냥 들어갈 수 있으므로 또 다시 구입을 하지않아도 된다.
 
효종왕의 능 입구에 들어서면  재실로 이어지는 곧은 길이 나오며, 재실에서 홍살문까지의 길도 잘 정리되어 있다. 묘내수는 능을 감싸며, 유정하게 흘러 내려와 홍살문과 정자각 사이의 참도 중간을 가로질러 .금천교 밑으로 흐르고 있다.

  정자각 뒤의 두 봉분을 바라보면 장자각 가까이 바로 우측에 보이는 왕비릉은 곡장이 없고 그 뒤 왕릉에는 곡장이 있다. 쌍릉이면서도 서로 좌우로 이웃한 다른 능과는 달리 한 언덕위에 앞뒤로 엇비스듬하게 배치를 한 것이 특이 하다고 하겠다.

 
  영릉이 현재와 같은 모습을 하게 된 것은 다음과 같은 내력이 있다. 원래 효종의 능은 건원릉 서쪽 산록에 병풍석을 갖춘 왕릉으로 조영되었다. 그후 15년 후인 1673년(현종14)에 석물에 틈이 생겨 빗물이 스며들 염려가 있다 하여 천릉 계획을 짜고 여주 영릉곁에 천봉하기로 했다. 그러나 영릉을 열고 보니 깨끗하여 의론이 분분했고 이것이 당론으로까지 번져 시끄럽게 되어 전일의 영릉도감의 책임자들이 면직되었다. 현재의 자리로 천장한 다음해 왕비 인선왕후의 능이 동원에 택정되어, 왕릉 앞에 비릉을 써서 현재와 같이 앞뒤로 나란히 쌍릉을 이루게 되었다 한다.
 
  영릉(寧陵)이 자좌오향(정북에서 정남방향)의 언덕에 앞뒤로 놓여 쌍릉을 이룬 것은 풍수지리적인 이유에서 비롯된 것으로 두능을 좌우로 나란히 놓을 경우 생기가 왕성한 정혈을 비켜야 하기 때문에 두 능 모두 정혈에 두고자 한데서 연유한다. 광중에는 석실을 쓰지 않고 회격으로 하여 그 바닥에 처음으로 지회를 사용하여 조선능제상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는 기록이 있다.
 
 

 뒷 이야기
   인조(仁祖)의 둘째(봉림대군)로 태어나 청나라에서 8년간의 볼모생활을 보내고 효종은 귀국한 효종은 형 소현세자(昭顯世子)조졸(早卒)로 인해 세자에 책봉되고 인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효종은 청나라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으로 굴욕을 씻고자 북벌(北伐)의 계획을 세워 군비를 정비하고 군정(軍政)에 힘썼으나 끝내 북벌을 실현치 못하고 승하한 안타까운 인물이다.

  효종 재위 시절에는 전라도 지역에 대동법을 시행하여 성과를 올렸고, 청나라에서 들여온 역법(曆法)으로 새로운 시헌력(時憲曆)을 시행하는 등 많은 노력을 했으나, 숙원이었던 북벌의 한을 풀지 못한 안타까운 생을 보냈다.
 청나라의 힐책(詰責)으로 북벌 의지를 잠시 접어두면서도 러시아의 남하(南下)에 청(淸)의 요청을 받아들여 나선(羅禪)정벌에 참여한 것을 보면 북벌(北伐)의 의지는 효종의 지상목표이자 국가 숙원사업이었던 것이다.

인선왕후 장씨(張氏)는 우의정(右議政) 신풍부원군(新豊府院君) 장유(張維)의 딸로 광해군 10년(1618)에 태어나 14세에 봉림대군과 가례를 올렸고, 봉림대군과 함께 청나라 심양에 8년간 있으면서 아들 현종(顯宗)을 생산하고 내조를 하다가 효종 즉위와 함께 왕비에 책봉되었다. 효종 승하후 왕대비로 지내다가 57세의 나이로 현종(顯宗) 15년(1674)에 승하했다. 슬하에 현종과 다섯 공주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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