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순영(恭順永陵:8.9대 왕비와 영조의 장자)       목록가기

 

공순영(공순영릉)
   
    경기도 파주시 조리면 봉일천리 산15 번지에 소재한 공릉(恭陵).순릉(順陵).영릉(永陵)을 함께 일컬어 통칭 영순공릉이라고 한다.

  공릉은 1461년(세조 7)에 조성된 성종의 원비 장순왕후(章順王后) 한(韓)씨의 능이고, 순릉은 1474년(성종 5)에 조성된 공혜(恭惠)왕후 한(韓)씨의 능이며, 영릉은 1729년(영조 5)에 조성한 영조의 장자 효장세자(孝장世子) 진종(眞宗)과 진종비 효순(孝純)왕후 조(趙)씨의 능이다. 이 공순릉 주변에는 공릉호수가 있으며, 공릉호는 부근의 경치가 좋아 많은 소풍객들이 찾아들고 있는 곳이다.

   

 

 

  제8대 예종(睿宗)의 비(妃) 장순왕후(章順王后) - 공릉(恭陵)
   
 

공릉(恭陵)의 특징
   공릉은 제8대 예종(睿宗)의 원비(元妃) 장순왕후 한씨(章順王后 韓氏 :추존:1445-1461)의 능이다. 본관은 청주(淸州). 영의정 상당부언군 한명회(한명회)의 딸로 세조 6년(1460) 16세로 세자빈(世子嬪에 책봉되고 인성대군(仁城大君)을 낳았으나 이듬 해 17세로 승하하였다. 후에 성종 3년(1472)에 장순왕후ㄹ 추존되고, 공릉으로 명명(命名)되었다. 공릉은 처음에 왕후릉이 아닌 세자빈묘로 조영(造營)되어 난간석과 병풍석, 무인석 등이 생략되고, 봉분 앞에 유혼석석과 장명등이 놓이고, 능앞 좌우에 석마를 세우고, 석양.석호 각 2필이 능을 호위케 하여 간략하게 조영되었다.

  소재지 : 경기도 파주시 조리면 봉일천리 산15. <공순영릉(恭順永陵) 소재>. 사적 : 제 205 호
 


  주변에 장순왕후와 자매간인 제9대 성종(成宗)의 비(妃) 공혜왕후(恭惠王后) 순릉(順陵)과 21대 영조(英祖)의 장자 효장세자(孝章世子 : 추존-진종<眞宗>)와 진종비(眞宗妃) 효순왕후(孝純王后)의 영릉(永陵)이 있어 공순영릉(恭順永陵)이라고도 부른다.

장순왕후 약사(略史)
  예종의 비 장순왕후는 세조의 장자방으로 유명한 한명회(韓明澮)에 의해 16세에 세자빈으로 책봉(세조 6년, 1460년)되었으나 다음해에 인성대군(仁城大君)을 낳고 17살의 어린 나이에 산후병으로 승하해 장순(章順)의 시호(諡號)를 받았다. 또한 동생 공혜왕후(恭惠王后 : 성종의 비<妃>)도 역시 19살의 나이에 승하해 그만 비운(非運)의 딸 자매가 되
고 말았다.

   

 

  제9대 성종(成宗)의 비(妃) 공혜왕후(恭惠王后) - 순릉(純陵)
  순릉(純의 특징
  순릉은 제9대 성종의 비(妃) 공혜왕후 한씨(恭惠王后 韓氏 : 1456-1474)의 능이다. 공혜왕후 역시 한명회의 딸로  공릉의 예종 비 장순왕후와는 친 자매간이다. 세조 13년(1467)에 12세로 가례를 올리고, 성종 즉위년(1469)에 14세로 왕비에 책정되었으나 단명하여 성종 5년(1474) 4월에 후사없이 춘추 19세로 조서(早逝)하여
, 언니인 장순왕후(章順王后 - 예종의 비) 공릉(恭陵)과 나란하게 단릉(單陵)의 형식으로 자리잡게 되었고, 능호는 순릉(純陵)이라 명명되었다.

능의 상설양식(常設樣式)은 조선 초기 능제를 따르고 있다. 소담한 난간석주의 원수(圓首)와 동자석주는건원릉과 헌릉 등 초기 능 석물의 특징이 잘 나타나고 , 또 유혼석의 나어두문(羅魚頭紋)은 문종의 현릉과 흡사한 등 조선 초기 능석물 양식의 특징을 갖고 있다.

  소재지:경기도 파주시 조리면 봉일천리 산15. 순릉(純陵): <공순영릉(恭順永陵)소재> 사적: 제 205 호
 


공혜왕후 약사(略史)
  장순왕후와 공혜왕후는 아버지 한명회의 야심에 의해 두 딸이 모두 왕비에 책봉되었지만 두 자매왕비가 모두 단명하여 비운의 일생을 보내고 말았다.

  공혜왕후는 12살[세조13년,1467년]에 자산군(者山君-成宗)에게 출가하여 14살에 왕비로 책봉되었지만, 5년 뒤에 슬하에 소생없이 승하하게 된다. .
  생전에 정희왕후 윤씨{세조의 비(妃)}, 소혜왕후 한씨{추존 덕종의 비(妃)}, 안순왕후 한씨{예종의 계비:한백륜女}가 모두 생존해 있어서 공혜왕후는 효성을 다했다고 한다.

   

 

  추존(追尊) 진종(眞宗)과 비 효순왕후(孝純王后) - 영릉(永陵)
   
 

영릉(永陵)의 특징
   영릉은 영조(英祖)의 장자요 정조(正祖)의 생부(生父)인 사도세자(思悼世子)의 형인 추존왕 진종(眞宗:효명세자 1719 - 1728)과 비(妃) 효순왕후 조씨(孝純王后趙氏:1715 : 1751)의 능이다. 영릉은 본래 소생없이 세자로 책봉된지 3년만에 요절한 효장세자(孝章世子)를 세자와 세자빈의 예(禮)로 조성한 묘역이다.

  그 후에 다음 세자였던 사도세자(思悼世子)마저도 폐위되어 죽음을 당했다.

  소재지 : 경기도 파주시 조리면 봉일천리 산15-1 {공순영릉(恭順永陵) 소재} 사 적 : 제 205 호
 

 

  영조는 사도세자의 아들을 왕세손(王世孫)으로 책봉할 때, 왕세손을 효장세자의 양자(養子)로 입적시킴으로써 정조 즉위후 영조의 유교(遺敎)에 따라 효장세자(孝章世子)를 진종(眞宗)으로 추존하고, 능호(陵號)도 올려 영릉(永陵)으로 하였다

영릉(永陵)의 특징
   영릉은 영조(英祖)의 장자요 정조(正祖)의 생부(生父)인 사도세자(思悼世子)의 형인 추존왕 진종(眞宗:효명세자 1719 - 1728)과 비(妃) 효순왕후 조씨(孝純王后趙氏:1715 : 1751)의 능이다. 영릉은 본래 소생없이 세자로 책봉된지 3년만에 요절한 효장세자(孝章世子)를 세자와 세자빈의 예(禮)로 조성한 묘역이다.

  그 후에 다음 세자였던 사도세자(思悼世子)마저 폐위되어 죽음을 당하고, 사도세자의 아들을 왕세손(王世孫)으로 책봉할 때, 영조는 왕세손을 효장세자의 양자(養子)로 입적시킴으로써 정조 즉위후 영조의 유교(遺敎)에 따라 효장세자(孝章世子)를 진종(眞宗)으로 추존하고, 능호(陵號)도 올려 영릉(永陵)으로 하였다.

   왕릉과 비릉(妃陵)을 쌍릉(雙陵) 형식으로 배치하여, 병풍석(屛風石). 난간석(欄干石)은 생략하고, 석상은 각각 배치하고, 장명등은 그 중간에 배치하였으며, 석양.석호 한 쌍으로 무인석(武人石) 없이 문인석(文人石)만 간략하게 상설(常設)하였다.

  당초 효장세자의 장례에 있어, 영조가 정자각은 구제(舊制)대로 지을 것과 석물은 사가(私家)의 것에 비(比)해 좀 풍후할 정도로 할 것을 명하여 그대로 시행하였던 것이다.
 

추존(追尊)의 약사(略史)
  영조와 정빈이씨(靖嬪李氏) 사이에서 장자(長子)로 태어난 진종은 영조가 즉위하자 경의군(敬義君)에 봉해졌다가 다음해 왕세자(王世子)에 책봉되니 그때 나이가 7살이었다. 하지만 영조(英祖)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세자는 3년 뒤에 불과 10세의 나이로 승하한다.

  영조의 부정(父情)은 세자에게 효장(孝章)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고, 후에 왕세손{正祖}에게 유언처럼 남긴 것이 효장세자의 추존(追尊)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정조는 그 유지를 받들어 효장세자를 진종으로 추존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정조(正祖)에게는 진종보다 친부(親父)였던 장조(莊祖[사도세자])에 대한 정성이 더 지극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기에 다소 영릉(永陵)에 대한 호위(護衛 )가 소원(疎遠)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효순왕후 조씨(孝純王后 趙氏)는   풍릉부원군 조문명(趙文命)의 딸로 영조 3년(1727) 13세로 세자빈에 책봉되었으나 그만 그 다음 해에 세자의 서거로 춘추 14세로 홀로되었으며, 그녀 역시 24만인 영조 27년에 소생없이 37세의 나이로 승하하게 되어, 이 곳 남편 곁에 나란히 자리잡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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