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건릉(隆健陵:사도세자의 융릉과 정조의 건릉)      목록가기

 

추존(追尊) 장조(莊祖:사도세자)와 비(妃) 경의(敬懿)왕후 - 융릉(隆陵)
 

융릉(隆陵)의 특징
   정조의 생부인 사도세자(思悼世子:추존 장조<莊祖>:1735 - 1761)와 비(妃) 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추존 경의왕후<敬懿王后>;1735 - 1815)의 융릉은 원래 양주(陽州) 배봉산(拜峰山)에 있던 영우원(永佑園)을 수원의 화산(花山)으로 옮겨 현융원이라 했다. 처음에 수은묘(垂恩墓)로 명명하였는데, 정조(正祖) 즉위 후 영우원(永佑園)으로 추상(推上)하고 1789년에 수원으로 천장(遷葬)하면서 현륭원(顯隆園)으로 개칭(改稱)하였다.
   현재의 융릉(隆陵)은 1899년[고종 36년, 광무 3년] 장조의 직계 4대 후손인 고종에 의해 융릉으로 추존된 것이고, 시호(諡號), 묘호(廟號) 역시 영조(英祖)가 내린 사도세자(思悼世子)에서 정조가 장헌세자(莊獻世子)로 추숭하고, 다시 고종(高宗)대에 장조(莊祖)로 추상되었다.

  소재지 : 경기도 화성군 태안면 안녕리 1-1 <花山>
 

  능역(陵域)의 상설(常設)은 세자묘(世子墓)로 조영(造營)함에도 불구하고 정조(正祖)의 의지에 의해 웅장하고 장엄하게 조성되었다. 화문(花紋)을 새긴 병풍석(屛風石)과 꽃부리 모양의 봉분인석(封墳引石), 문인석 외에 무인석(武人石)을추가로 세웠으며, 장명등은 8각장명등과 4각장명등의 양식을 합하여 운족(雲足)이 달린 새로운 양식으로 만들어 세웠다. 능의 석인(石人)은 사실적(寫實的)이며 가슴에 파묻혔던 종래의 목이 위로 나와 답답하지 않다. 정자각(丁字閣)에 이르는 넓은 박석(薄石)의 참도(參道) 등이 아주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다.

  추존(追尊)의 약사(略史)
{思悼世子 - 莊祖} : 영조와 영빈이씨(映嬪李氏) 슬하에서 태어난[영조 11년] 장조(莊祖)는 이복형 효장세자(孝章世子)가 요절하자 그 뒤를 이어 2세의 어린 나이로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영조 25년[1749년]에 는 부왕인 영조를 대신하여  대리청정(代理廳政)도 하였으나 당쟁(黨爭)의 와중에서 무고(誣告)로 인해 부왕의 진노(震怒)를 샀고 차츰 강박신경증으로 발작적 광행(狂行)을 하기에 이르러, 영조 36년 부왕이 자진(自盡)을 명했으나  듣지 않자 뒤주 속에 가두어 죽게 하였다.

  광행(狂行)과 광포한 행동으로 인해 참혹하게 뒤주안에서  비극의 죽음을 당하지만, 그 이면에는 왕권(王權)과 신권(臣權)의 알력 속에서 발생한 필연적 당파(黨派)의 희생물로 규정하는 논의가 많다.

  아들을 자신의 명으로 죽음에 이르게 한 영조(英祖)는  곧 이를 뉘우치고 후회의 회한(悔恨)으로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고, 생부(生父)의 애절한 죽음을 목격한 왕세손 정조(正祖)는 즉위후 장헌세자(莊獻世子)로 추숭하였으며.  장조의 직계 4대 후손인 고종대[고종 36년:1899:광무 3년]에는 장조(莊祖)로 추존하였다.
 

{경의왕후<敬懿王后> - 혜경궁홍씨<惠慶宮洪氏>}

  본관은 풍산 풍산(豊山),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딸로 영조 20년 세자빈(世子嬪)에 책봉되고, 사도세자 사후 혜빈(惠嬪)으로 있다가 정조(正祖)가 즉위한 후 혜경궁(惠慶宮)의 궁호(宮號)를 받았고, 고종 때에 장헌세자가  장조(莊祖)로 추존됨에 따라 경의(敬懿)왕후에 추존되어 여생을 보내다가 순조 15년 81세의 춘추로 승하해 현륭원(顯隆園)에 합장(合葬)되었다.

  뒤주에 갇혀 죽은 남편의 처참한 운명을 겪었던 혜경궁홍씨는 남편의 참사를 중심으로 자신의 뼈저린 생애를 회고하는 한중록(恨中錄)】을 남겼는데, 오늘날에도  옛 궁중문학의 백미(白眉)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영조 38년(1762)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음을 당한 궁중참변이 일어나자, 조정은 격동을 치렀는데, 조정은 영조의 실덕(失德)을 책하는 시파(時派)와 세자의 실덕을 책하는 벽파(僻派)로 갈린다. 이 무렵 홍봉한은 시파로서 세손의 보호에 힘쓰나 반면에 그의 아우인 인한은 벽파에 가담, 세손의 즉위를 반대하는 입장에 서서 정조 즉위 직후에 정조를 헤치려는 역모사건에 연좌됨으로써 유배 사사(賜死)되었다.

 

 

 

제22대 정조(正祖)와 비(妃) 효의왕후(孝懿王后) - 건릉(健陵)
 
소재지 : 경기도 화성군 태안면 안녕리 1-1 {隆健陵 소재}사적: 제 206 호               건릉에 이르는 참도와 정자각
 
  건릉은 정조와 효의왕후 김씨를 합장한 동릉이실(同陵異室)이다. 원래 생부 장헌세자의 현릉원(顯陵園) 동쪽 언덕에 있었던 것을  순조 21년(1821) 효의왕후 김씨가 69세로 승하하자, 정조의 능역이 풍수지리상 불길하므로 길지를 찾아 천장해야한다는 논의에 따라 현재의 위치인 현릉원 서쪽 언덕에 이장하여 효의왕후와 합장한 것이다.
 
  홍살문에서 정자각에 이르는 참도가 다른 능에 비하여 넓게 박석을 깔아 놓은 것이 특이하다. 병풍석을 두르지 않고 난간석만 둘렀으며, 그 밖의 모든 상설은 융릉의 예를 따랐으며, 합장릉인데도 상석을 하나만 놓았고 장명등은 융릉의 것과 같이 화문이 새겨져 화려하다. 문무석의 조각이 극히 사실적(寫實的)이고 안정감이 있는 수작(秀作)이며, 문관은 금관조복(金冠朝服)을 입고 있다. 융건릉은 능석물 제도의 새로운 표본을 제시하였다.
 

뒷 이야기
  아버지 사도세자가 참화를 당한 후  왕세손에 책봉되어 25세 때, 영조의 뒤를 이어 즉위했으며 선왕의 뜻을 이어 탕평정치(蕩平政治)를 하고 왕의 거실을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이라고까지 하였으나 정치에 뜻이 없어 홍국영에게 정치를 맡기고 오직 학문에만 열중하였다. 왕실 연구기관인 규장각(奎章閣)을 두어 국내의 학자들을 모아 경사(經史)를 토론케 했으며, 활자(活字)를 개량하여 인쇄술을 발전시켜 많은 서적을 간행(刊行)한다. 특히 청(淸)나라 고증학(考證學)의 영향을 받은 실학(實學)을 크게 발전시켜 근대(近代) 문예부흥(文藝復興)을 이루었으나, 한때 천주교(天主敎)의 유입을 막기 위해 청으로부터 들어오는 서적 구입을 막은 일도 있었다.

  이와 같이 실학사상가(實學思想家)들이 어느 정도 권력에 접근할 수 있었고 왕조(王朝)의 지배 질서에 약간의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시기였으나 천주교(天主敎)가 전래됨으로 인해 변화를 두려워한 보수세력(保守勢力)의 반발을 야기(惹起)시키는데, 정조(正朝) 승하 후 순조(純祖)의 즉위와 함께 단행된 신유박해(辛酉迫害)로 커다란 반격을 가한 보수 세도(勢道) 정권이 이후 60여년을 이어가게 된다.

  이와 함께 조선조 후기의 문화적 황금기(黃金期)를 이룬 정조(正祖) 자신의 심정은 친부(親父) 사도세자(思悼世子[莊祖])의 참혹한 화난(禍難)에 대한 원한(怨恨)으로 인해 평생 우울한 마음을 감추지 못한다.
 하지만 사도세자(思悼世子)의 현륭원(顯隆園)을 수원부(水原府) 화산으로 옮기고 매년 배알(拜謁) 행차를 하며, 왕조 초기의 도성(都城) 축성, 흥선대원군 시절의 경복궁(景福宮) 재건(再建)과 함께 조선 3대 토목공사(土木工事)로 일컬어지는 수원성[화성(華城)]을 축조하고 소경(小京:제2도읍지)으로 승격시키는 등의 일들이 실제 생부(生父)에 대한 단순한 회한(悔恨)의 발로(發露)라기 보다는 개혁의지가 강했던 정조의 보수세력 견제와 실학적(實學的) 정치세력의 추구를 위해 행해진 것으로 봄이 마땅할 것이다.

  사도세자(思悼世子)와 혜경궁(惠慶宮) 홍씨(洪氏)의 둘째아들로 태어난 정조는 영조(英祖)의 명으로 후사(後嗣)가 없이 요절(夭折)한 백부(伯父) 효장세자(孝章世子: 사도세자의 형)의 계통을 이어 양자(養子)로 올려지게 되어 즉위 후에 효장세자를 추존(追尊)해 진종(眞宗)으로 올리게 되는데, 이로 인해 생부(生父)인 사도세자는 정조(正祖) 당대에는 추존이 되지 못하고 고종대(高宗代)에 가서야 장조(莊祖)로 추숭(追崇)된다.

  한편 생부인 사도세자가 당쟁에 희생되었듯이 정조 또한 세손시절에 갖은 위험속에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정조를 세손 때부토 보호해 온 사람이 홍국영(洪國榮)이었다. 홍국영이 영조 말년 세손의 승명대리를 반대하던 정후겸, 홍인한, 김구주 등을 탄핵하여 실각시키고 1776년에도 세손을 반대 모해하려는 홍상간, 홍인한, 윤양로 등의 모역을 적발하여 처형시켰기 때문이다.

  그 공으로 정조의 총애를 입어 정조가 즉위하면서 도승지 겸 숙위대장에 임명되어 왕의 신변을 보호케 하는 한편 모든 정사는 상주(上奏)와 결정이 그를 통하도록 하니 이때부토 홍국영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국가의 대신.원로 등이나 서료(庶僚)들까지도 대궐에 들어가면 국영의 숙위소(宿位所)에 들어가서 정치를 논의하였으며, 국영의 위세는 왕을 모욕할 정도였다. 그러나 뒤에 정조는 여론의 귀추와 승지 김종수(金宗秀)의 진언을 받아들여 국영의 벼슬을 빼앗고 강릉으로 추방, 거기서 34세의 나이로 병사하였으니 그의 세도는 불과 5년을 못 미쳐 막을 내리고 말았다. 실각할 때까지 도승지.대제학.대사헌 등을 역임했다.

 

효의(孝懿)왕후 김씨(金氏) 약사(略史)
  효의왕후(孝懿王后) 김씨(金氏)는 영조(英祖) 29년에 청풍김씨(淸風金氏) 청원부원군(淸原府院君) 김시묵(金時默)의 딸로 태어나 10세 때에 당시 왕세손(王世孫)이었던 정조(正祖)의 빈(嬪)으로 책봉되어 장조비(莊祖妃)인 혜경궁홍씨<惠慶宮洪氏>을 잘 섬겨 영조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 왕비(王妃)에 책봉되었으며, 성품이 온화(溫和)하고 겸손하여 영조가 죽은 뒤 60세가 넘어서도 영조의 계비(繼妃) 정순(貞純)대비 김씨와 혜경궁(惠慶宮) 혜빈홍씨(惠嬪洪氏)를 극진히 섬겨 궁궐내에 칭송이 자자했다.
 슬하(膝下)에 소생(蘇生)이 없어 안타까운 생을 보내지만 기꺼이 수빈박씨(綏嬪朴氏)의 소생을 원자(元子: 순조)로 삼게 된다.[정조 14년, 1790년] 그 후 순조(純祖) 21년까지 여생(餘生)을 보내다가 69세의 나이로 승하(昇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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