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대정종(후릉),3대태종(헌릉),23대순조(인릉)           목록가기

 

제2대 정종(定宗)과 정안(定安)왕후 - 후릉(厚陵)
 
                    정종과 정안왕후 김씨의 후릉                              후릉에 배치된 문.무인석
소재지 : 경기도 개성시 판문군 령정리(북한 소재) 사 적 : 북한 소재로 사적 미지정
 
백룡산을 뒤로 하고 전면으로 탁 트인 평지를 건너 멀리 안산이 바라보이는 배산임수의 명당자리에 자리잡고 있는 후릉은 정종(定宗:방과:1357-1419,재위2년,상왕 20년)과 왕비 정안왕후 김씨(定安王后金氏:1355-1412)의 능으로 조선 최초로 왕과 왕비의 봉분(封墳)을 나란하게 난간석(欄干石)으로 연결한 쌍릉(雙陵)의 형식을 하고 있다. 

  역사는 흐르고 흘러 한 민족이 둘로 나뉜 현재, 정자각은 없어져 터만 황량하게 남고 곡장도 없이 산허리에 외로이 있다. 북한 지역에 소재하고 있어  우리의 문화 유산이 제대로 보존되지 못함을 느끼게 한다.

 
뒷 이야기

  정종은 1399년에 즉위하여 1400년 11월 11일에 동생 방원에게 왕위를 넘기고 물러나 상왕으로 태종의 우애를 받으며 개성 백룡산 기슭의 인덕궁에서 거주하면서 격구, 사냥, 온천, 연회 등으로 유유자적한 생활을 즐기다 1419년 9월 26일 63세로 천명을 다했다. 왕위에 있은지 2년, 상왕의 자리에 있은지 20년이 되었다.

  

  정종은 성품이 순진근실하고 지행이 단엄, 방정했다. 정안왕후 김씨와의 사이에서는 후사가 없으나 후궁들 사이에  15명의 군과 8명의 옹주를 낳았다. 조선 개국후, 1398년 8월 동생인 정안군 방원이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성공을 거두자 세자책봉 문제가 제기되었다. 정종은 당초부터 대의(大義)를 주장하고 개국후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업적은 모두 정안군의 공로인데 내가 어찌 세자가 될 수 있느냐? 며 완강하게 거절했으나 정안군의 양보로 결국은 세자가 되고 9월 5일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2년간의 왕위(王位) 시절도  실질적으로는 동생 방원{태종(太宗)}의 뜻에 따라 정치가 이루어졌으며, 결국 동생 바우언에게 왕위를 선위(禪位)하고 상왕(上王)으로 머물면서 말년을 지내게 된다.

  정종'이란 묘호도 사후에 바로 정해진 것이 아니라, 숙종 7년(1681년)에 묘호를 정종이라 사용하게 되었고, 그 이전에는 명나라 황제에게서 받은  시호(諡號) 공정(恭靖)을 칭호(稱號)로 삼아 '공정왕(恭靖王)'이라 칭했으므로 실록 역시 <공정왕실록(恭靖王實錄)>이라 했다.

 
안왕후 약사(略史)

  정안왕후는 고려말엽인  1355년 문하좌시중이었던 월성부원군 김천서의 딸로 태어나, 태조 7년에 덕빈에 책봉되고 정종 즉위로 왕비에 올라 정종의 내조로 일생을 마쳤다. 정안왕후는 정종이 실권자(實權者)인 이방원에게 왕위를 넘겨주자 편안한 말년을 보내며 천수를 다 했다. 하지만 슬하에 자식이 없었으며,  58세의 나이로 태종 12년에 승하하였다.

  야사에는 정종에게 왕좌를 내주라고 권고한 사람은 정안왕후 김씨라고 한다. 김씨는 정종이 왕위를 더 오래 유지하고 있다가는 방원에게 죽음을 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잠자리에서 정종에게 그만 물러날 것을 권고했고, 정종 역시 그녀의 생각과 같았기에 권고받은 바로 다음날 왕위에서 물러났다고 한다. 그만큼 정종과 정안왕후는 잠자리에서 조차 죽음을 걱정해야 할 정도로 동생 방원을 두려워했는데, 이는 실권없는 왕과 왕후의 처지가 얼마나 비참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라 하겟다.

 

 

 

 
제3대 태종(太宗)과 원경왕후(元敬王后) - 헌릉(獻陵)
 
                                헌 릉               헌릉의 신도비         헌릉의 문.무인석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남구 내곡동 산13 <獻仁陵 소재>  사 적 : 제 194 호
 
헌릉(獻陵)의 특징
  태종
(이방원:1367-1422:재위18년,상왕 4년)과 원경왕후 민씨(元敬王后 閔氏:1365-1420)의 능인 헌릉(獻陵)은 쌍릉(雙陵)형식으로 조성되었다. 헌릉은 원경왕후 승하 후 태종의 명으로 조성되었으며, 2년 뒤 태종이 승하하자 세종은 모후의 능 옆에 부왕의 자리를 마련, 나란히 봉분을 만든 뒤 난간을 연결하여 쌍릉으로 조성했으며,.건원릉과 같이 신도비(神道碑)를 세워놓고 있다.

  능 앞의 석물들은 망주석만 빼고는 모든 석물을 또 한 벌 갖춰 쌍으로 배치했다. 같은 경내(境內)에 23대 순조(純祖)의 인릉(仁陵)이 함께 모셔져 '헌인릉(獻仁陵)'의 명칭이 사용되고 있다.

 
태종 약사(略史)
  1367년 5월 16일 태조와 신의황후 한씨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난 태종 이방원은 태조의 개국에 큰 공을 세웠다. 1392년 3월 이성계가 해주에서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중상을 입자 정몽주는 공양왕에게 상소하여 정도전 등 이성계파의 핵심인물을 유배시키고, 이성계까지 제거하려고 했다. 이러한 낌새를 알아챈 이방원은 가신 조영무 등에게 명하여 정몽주를 제거하여 대세를 만회하고,  왕대비를 강압하여 공양왕을 폐위하게 한 뒤 이성계를 등극케 하는 등 아버지의 오른팔 역할을 했다. 하지만 조선이 개국하자 그는 세자의 자리를 이복동생 방석에게 빼앗기고 개국공신책록에서도 제외되었다.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와 정도전 등의 배척 때문이었다. 1398년 정도전에 의해 요동정벌계획이 적극 추진되면서 자신의 마지막 세력 기반인 사병마저 격파 당할 위기에 이르자 누적된 위기의식과 불만이 폭발했다. 방원은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이 밀모하여 신의왕후 소생의 왕자들을 일거에 살육할 계획을 하고 있다고 트집잡아 이를 미연에 방비한다는 명분을 세워 정도전 등을 습격하여 죽이고, 이 변란의 책임을 정도전에게 돌림으로써 숙원을 풀었다.

  방원은 이에 그치지 않고 세자 방석을 폐위하여 귀양보내는 도중에 제거했으며, 방석의 동복형 방번도 함께 죽였다. 왕위 계승권을 둘러싸고 일어난 완자간의 이 싸움을 일컬어 제 1차 왕자의 난이라고 부른다. 형제간의 왕위 다툼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1398년의 제1차 왕자의 난에 이어 1400년(정종 2)에는 제 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다.

  제1차 왕자의 난이 이복형제의 싸움인데 비하여 제2차 왕자의 난은 동복형제(同腹兄弟)의 싸움이었다. 태조의 4남 방간은 왕위계승에 대한 야심과 호기(豪氣)가 있었으나, 인격. 공훈. 위세가 방원에 미치지 못하여 항상 시의심(猜疑心)과 불안 속에 있었다.

  한편 지중추부사 박포(朴苞)는 방원의 난 때, 정도전 등이 방원을 제거하려 한다는 밀고하는 등 방원을 도와 난을 성공적으로 수습하는데 공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상작(상작)이 높지 못한데 불만을 품고 있었던 차에 방원이 장차 그를 죽이려 한다고 거짓 밀고로 충돌질 하여 방간이 군대를 동원하였다.

  방원도  병역을 동원하여 이에 맞서 개경에서 교전을 벌였다. 결과는 방원의 승리였다. 방간은 방원의 군사에 잡혀 거병작란(擧兵作亂)하여 형제를 모해했다는 죄명으로 유배되고 박포는 사형을 당했다.

  이 제2차 왕자의 난은 결국 방원의 왕위계승을 촉진시키는 경과를 가져왔다. 방원에 대한 반대세력은 거의 소멸되었고 그의 정치적 입지는 더욱 확고해졌다. 정종은 하륜(河崙) 등의 주청(주청)으로 상왕 태조의 허락을 얻어 그해 2월 방원을 세제로 삼고, 같은 해 11월에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어 방원이 즉위하하게되니 이가 곧 제3대 태종이다.

  왕위에 오른 태종은 철저한 배불숭유정책을 강행하고 관제개혁에 주력하여 새로운 왕조의 기틀을 잡기에 노력했다. 우선 공신과 외척을 제거하여 왕권을 튼튼히 했으며, 의정부 기능을 축소시키고 육조의 기능을 강화해 중앙집권제를 확립했다. 또한 지폐를 만들어 경제유통을 원활히 했고 신문고를 설치했으며, 호패법을 신설하는 등 제반제도를 정비했다. 특히 수리사업에 전념하여 벽골제의 부수를 대규모로 실시하는 등 많은 수리공사를 했다.

 

 수리사업에 대한 태종의 지대한 관심은 "태종우"에 얽힌 이야기를 낳았다. 이야기는 태종 말년에 계속된 심한 가뭄에서 비롯된다. 태종은 눈을 감으면서도 가뭄을 걱정하여 자신이 죽어 혼이 있다면, 이 날 비가 오게 하겠다고 유언을 남겼다. 그 이후 해마다 태종의 기일인 음력 5월 10일이 되면 비가 왔는데 이 비를 태종우라고 불렀다.

  태종은 1418년 무절제하고 방탕한 세자 제(양녕대군)를 폐하고 충령대군을 세자로 삼아 2개월 뒤에 선위했다. 선위한 뒤에도 군권에 참여하여 세종이 왕권을 튼튼히 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태종이 이룩한 강력한 중앙집권제도는 세종대의 태평성세를 떠받치는 기반이 되었다. 태종은 슬하에 12남 18녀를 두었으며, 특히 세종(世宗)에게 선위한 후에도 병권(兵權)은 장악하고 세종 원년의 대마도(對馬島) 정벌(征伐)을 주도했다.그 후 별궁(別宮)에서 여생(餘生)을 즐기다가 1422년 5월 10일 보령 56세로 승하했다.

 
원경왕후 약사(略史)

  태종의 정비 원경왕후 민씨는 본관은 여흥이며, 여흥부원군 민제의 딸로서 1365년 여흥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1382년(우왕 8년)에 방원에게 출가하였으며, 1392년 조선 개국 후에는 정녕옹주에 봉해졌다. 그녀는 1400년 2월 방원이 세제에 책봉되자 세제빈으로 정빈에 봉해졌으며, 이 해 11월에 방원이 조선 제3대 왕에 즉위하자 왕비에 책봉되어 정비의 칭호를 얻게 되었다.

 태종보다 두 살이 위였던 민씨는 태종의 집권에 여러 방면에서 도움을 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398년 8월, 그녀는 정도전 세력의 공격이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태조가 몸이 불편하여 여러 왕자와 함께 숙직하고 있던 방원을 몰래 불러내어 정도전 일파의 급습 가능성이 있다고 주의를 환기시켰다. 이 정보 덕분에 방원은 선수를 쳐서 정도전 일파를 제거할 수 있었다. 또한 왕자의 난 10일 전에 정도전 일파가 왕자들이 거느리고 있던 시위패를 혁파하고 그들의 군장비를 모두 불태울 때, 그녀는 몰래 무기를 숨겨두었다가 거사 직전에 방원의 군사에게 내어주어 선수를 치도록 했다.

 그러나 왕비가 된 후에는 태종과의 불화가 그치지 않았다. 불화는 우선 궁녀문제에서 출발하여 태종의 후궁 간택 문제로 이어졌다. 이 문제는 더욱 악화되어 결국 왕비의 동생 민무구 형제 사건으로 불화의 극치에 이르게 된다. 태종은 외척의 권력 분산과 왕권 강화를 목적으로 후궁을 늘려 나갔고, 민씨는 이를 노골적인 투기와 불평으로 태종의 비위를 건드렸다. 그것이 곧 그녀의 동생 민무구 형제에게 영향을 미쳐 태종과 틈이 더 벌어지는 결과를 낳았고, 급기야 민무구 형제가 죽게 되자 그녀는 그 일로 태종에게 불손한 행동을 계속해 왕비의 자리에서 쫓겨날 처지에 직면하기도 한다. 하지만 태종은 세자와 왕자들에게 끼칠 영향을 생각해 끝내 그녀를 폐비시키지 않았다. 원경왕후 민씨는 1420년 56세를 일기로 죽었다.

  원경왕후는 4남 4녀를 낳았으며 양녕, 효령, 충녕, 성녕 등의 왕자들과, 정순, 경정, 경안, 정선 등의 공주가 그녀의 소생이다.

 

 

 

 

 

 
제23대 순조(純祖)와  비(妃) 순원(純元)왕후 김씨 - 인릉(仁陵)
 
 
재지 : 서울시 강남구 내곡동 산 13-1 {獻仁陵 소재}  사 : 제 194 호  
 

인릉(仁陵)의 특징
  순조
(純祖:1790-1834,재위 34년)와 비 순원왕후 김씨(純元王后金氏:1789-1857)의 인릉은 본래 순조(純祖) 승하 후 경기도 파주에 있는 인조(仁祖)의 장릉(長陵) 옆에 조성했으나, 순조는 1835년 4월 19일 파주 장릉내에 초장되었으나, 풍수지리상 불길하다는 논의가 있어 1856년(철종 7) 10월 11일 현재의 헌릉 오른쪽 언덕에 이장했으며, 그 이듬해 12월 17일 순원왕후도 순조와 함께 합장되었다. 인릉은 헌인릉 입구로 들어가자마자 마주 보이는 능이다.

 난간석(欄干石)으로 둘러 쌓여 있는 봉분(封墳)에 상석(床石) 하나를 설치해 놓았으며 기타 석물(石物) 역시 정연하게 갖추어져 있다. 같은 강남 지역에 있는 선정릉(宣靖陵 :성종과 중종)이 도심의 빌딩 숲 속에 포위되어 있는 것과 비교하면 그나마 헌인릉(獻仁陵)은 자연(自然)과 어우러져 있어 다행이다.

 

순조 약사(略史)

  순조는 1790년(정조14) 6월 18일 정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수빈 박씨로 덕행이 근세 제1인자라는 박준원(朴準源)의 딸이다. 순조는 1800년(정조24년) 정월 비 효의왕후(孝懿王后)의 소생인 문효세자(文孝世子)가 요절하자 왕세자로 책봉되고 그해 6월 정조가 승하하자, 7월 4일 창덕궁 인정문에서 왕위에 올랐다.

  11세의 어린 임금이 즉위하니 대왕대비( 영조 계비 정순<貞純>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정순왕후의 친정인 경주 김씨의 손에 권력이 쥐어져, 이때부터 순조, 헌종, 철종대에 이르는 60여 년간, 외척(外戚)의 세도정치(勢道政治)가  시작된 것이다. 이로 인해 조선조(朝鮮朝) 후기(後期)에 마련되었던 영.정조대(英正祖代)의 문화적 황금기(黃金期)가 막을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대왕대비는 사도세자 사건을 악화시킨 김구주의 누이동생으로 벽파(僻派)를 옹호한 인물이다. 정조 집권으로 잠시 세력을 잃고 있다가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수렴청정을 하면서 정조때부터 집권해 오던 시파(時派)에게 정치적 보복을 가하기 시작했다.

  순조의 즉위는 천주교(天主敎) 서학(西學)의 탄압으로 시작된다. 바로 벽파계(僻派系)의 대표였던 정순왕후(貞純王后)는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면서 시파계(時派系) 남인(南人)과 남인 중심의 실학사상가(實學思想家)들을 제거하기 위한 일대 숙청으로 신유박해(辛酉迫害)를 일으킨다.

사교를 금한다는 명분으로 200여 명의 천주교 신자들을 학살하여 시파를 모두 숙청한 것이다. 신유박해로 목숨을 잃은 사람은 중국인 주문모 신부, 이승훈, 정약종, 종친 은언군 등이고 정약전 정약용 형제는 귀양을 갔다. 1804년(순조 4:왕15세) 수렴정치를 폫하고 왕의 친정이 시작된 뒤에도 천주교에 대한 탄압은 계속되어, 1815년(순조 15년)에 경상, 충청, 강원도의 천주교 신자들을 처벌했으며, 1827년(순조27)에는 충청 전라도의 교인들에게 극심한 탄압을 가했다.

  1802년(순조2) 10월 13세가 되던 해에 왕은 안동 김씨인 김조순의 딸을 왕비로 맞고, 2년 뒤에는  대왕대비가 세상을 떠나자 정권은 안동김씨에게 넘어갔다. 국구 김조순을 비롯하여 김이익, 김이도, 김달순, 김희순, 김명순 등 안동 김씨 일문이 조정의 요직을 모두 차지하는 전례 없는 친족 일색의 인사조치가 취해졌다. 또 순조의 생모되는 반남 박씨들도 세도의 한 귀퉁이를 파고들어 경주 김씨, 안동김씨, 반남 박씨 등 씨족중심의 정치가 시작되었다.

  사교를 금한다는 명분으로 200여 명의 천주교 신자들을 학살하여 시파를 모두 숙청한 것이다. 신유박해로 목숨을 잃은 사람은 중국인 주문모 신부, 이승훈, 정약종, 종친 은언군 등이고 정약전 정약용형제는 귀양을 갔다. 왕의 친정뒤에도 천주교에 대한 탄압은 계속되어, 1815년(순조 15년)에 경상, 충청, 강원도의 천주교 신자들을 처벌했으며, 1827년(순조27)에는 충청 전라도의 교인들에게 극심한 탄압을 가했다. 1802년(순조2) 10월 안동 김씨인 김조순의 딸을 왕비로 맞고 3년 뒤 대왕대비가 세상을 떠나자 정권은 안동김씨에게 넘어갔다. 국구 김조순을 비롯하여 김이익, 김이도, 김달순, 김희순, 김명순 등 안동 김씨 일문이 조정의 요직을 모두 차지하는 전례 없는 친족 일색의 인사조치가 취해졌다. 또 순조의 생모되는 반남 박씨들도 세도의 한 귀퉁이를 파고들어 경주 김씨, 안동김씨, 반남 박씨 등 씨족중심의 정치가 엉키어져 나갔다.

  권문세가의 줄 없이는 누구나 벼슬자리 하나 얻어보지 못할 지경이었다. 이렇게 되고 보니 서로 뒷줄을 얻고자 김씨나 박씨의 문전으로 모여들었다. 많은 뇌물을 바치고 벼슬자리를 얻은 사람들은 본전 생각에 재임기간 동안 최대한 백성들을 갈취하기 마련이다. 여기에 재위기간 34년 중 19년 동안은 수재(水災)가 일어나고 서부지방에 전염병이 크게 번져 10만여 명이 목숨을 잃는 등 천재지변까지 겹쳐 백성들의 고생은 이루말 할 수가 없었다.

  이와 같은 세도정치의 폐해(弊害)는 당연히 일반 농민들에게 돌아갔다. 국가 권력기관의   요직(要職)을 독차지하는 세도 권력의 전횡(專橫)으로 인해 진보적 학자들의 중앙 진출이 봉쇄되고 삼정(三政)의 문란으로 인한 농민들의 수탈(收奪)이 극에 달해 이에 저항하는 농민들의 반발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게 된다. 특히 관서(關西)농민전쟁으로까지 불리는 '홍경래(洪景來)의 난(亂)'은 부패한 권력 통치 체제에 대한 농민층의 저항 전쟁으로 인식할 수 있다. 정치기강이 무너져 민생은 도탄에 빠지고 각종 비리와 참설이 유행하는 등 사회혼란이 극도에 달해ㅛ다. 그 외에도 제주도의 토호 양제해와 용인의 이응길이 일으킨 민란, 유칠재, 홍찬모 등의 흉서사건, 청주의 괘서사건 등이 연이어 일어났다.

  안동김씨의 세도를 보다 못한 순조는 조만영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아 풍양조씨 일문을 중용하고 1827년(순조27) 세자에게 대리청정하게 함으로써 안동 김씨를 견제하려고 했으나, 불과 3년 뒤 세자가 일찍 세상을 떠남으로써 실패했다. 사실 초기의 세도청치는 외척의 위협으로부터 이권을 보호하기 위해 이루어졌던 정치형태다.

  정조가 세손으로 대리청정에 임하고 있을 때 세손을 반대 모해한 세력으로부터 정조를 보호한 공으로 홍국영이 막강한 권력을 누리면서부터 세도정치는 시작되었다. 이후 정조는 강력한 왕권을 확립했지만,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남아있는 경주 김씨들이 늘 불안했다. 어린 세자를 보호해달라는 유언을 김조순에게 남긴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김조순이 경주 김씨의 벽파에 대응할 수 있는 시파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세자를 보호하려면 왕실의 외척인 경주 김씨에 맞먹는 힘이 필요하다. 김조순은 경주 김씨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의 딸을 왕비의 자리에 앉혀 정순왕후의 힘에 맞섰다. 이렇게 왕권을 보호하기 위해 비롯된 세도 정치는 차츰 변질되어, 훗날 "외척정치=세도정치"가 되어 가문의 이익이 국가와 백성의 이익에 앞서는 우를 범하게 된 것이다.

  순조는 재위 34년 동안 세도정치의 바람에 휘말려 <양현전심록>, <동문휘고>, <사부수권>, <대학유의>, <정조어정흥재전서> 등의 서적을 간행하고, 일본에 통신사를 보내는 등의 치적만 기록되었을 뿐 이렇다할 정치적 야심을 펼치지도 못하고 1834년 11월 13일 경희궁에서 보령 45세로 승하했다.

 
순원왕후 김씨 약사(略史)
 안동 김씨(安東金氏) 집안인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김조순(金祖淳)의 딸, 순조위 비, 익종(추존)의 어머니, 헌종의 조모가 되며, 1802년(순조2년) 왕비로 책봉되고 난 후 철종(哲宗) 대까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면서 안동김씨  세도정권의 정상에서 막강한 권력을 누린다.  특히 순원왕후 김씨는 아버지 김조순과 오라비 김좌근으로 이어지는 안동김씨 일문의 집권에 지대한 공헌을 한다.

  헌종이 젋은 나이에 갑자기 죽자 자손이 없는 헌종의 왕통을 누가 이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나타났다. 이때 순원왕후 김씨는 조대비 일문이 미처 손을 쓰기 전에 재빨리 원상에 권돈인을 지명하고 사도세자의 증손자인 강화도령 원범(철종)을 지목하여 철종의 왕위 계승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철종의 왕비 간택(揀擇)에도 자신의 집안 사람인 김문근의 딸을 왕비에 책봉함으로써 그녀의 권력을 공고히 함은 물론 안동 김씨의 세도정권이 절정기를 맞게 한다. 슬하(膝下)에  2남(익종.차남은 조졸)과  3녀(명온, 복온, 덕온공주)를 두었고, 철종 8년(1857)에 춘추 69세로 창덕궁에서 승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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