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대단종(장릉), 단종비 송씨(사릉:정순왕후)            목록가기

 

제6대 단종(端宗) - 장릉(莊陵)
 
            단종이 유폐되었던 영월의 청냉포  청냉포 세워놓은 금표비          영흥리의 '자규루(子規樓)
 
 
            단종의 능(뒤에서 본 전면)             장릉의 홍살문과 정자각           앞에서 본 단종의 능(장릉)
 단종이 묻힌 장릉은 영월 읍내에서 제천으로 가는 쪽으로 약 1,5K쯤 떨어진 동을지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장릉(莊陵)의 특징
  단종(이홍위(李弘暐) : 1441-1457, 재위 3년)의 장릉은 비운의 소년 임금 능답게 많은 우여곡절 끝에 조성되었다. 영월로의 유배생활에서 서인(庶人)으로까지 강등되어 사약(賜藥)을 받고 생을 마감한 단종은 영월 야산에 암매장되었던 것을 중종(中宗) 11년[1516년]에 와서야 묘를 찾아 봉분(封墳)을 갖추게 된다. 그 뒤 240년이 지난 숙종(肅宗) 24년(1698년)에 복위(復位)되어 단종(端宗)으로 묘호(廟號)를 붙이고 종묘(宗廟)에 부묘하고 단릉(單陵)의 형식으로 능호를 장릉(莊陵)이라 했다.
 추봉된 능의 예를 따라 난간석(欄干石)과 무인석(武人石)은 설치하지 않았고 양식 또한 가장 간단하게 조성되었다.

  장릉은 사적 제 19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매년 한식날을 전후해 이곳 장릉일대에서는 영원의 가장 큰 문화행사인 단종제가 성대하게 열리고 있다. 노송이 우거진 장릉주변에는 단조의 복위를 모의하다 죽음을 당한 사육신과 대의에 따라 절개를 지킨 네충신등 10충신의 위패를 모신 창절사가 있으며 영흥리일대에는 단종이 승하하자 낙화암에서 몸을 던져 단종의 뒤를 따른 여섯 시녀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민충사와 영모전등 단종과 관련된 유적지가 많다.

 
 

단종을 복위사건에 연루된  많은 사람들은 사형을 받게 되고, 단종은 영월 청냉포로 유배되고, 청냉포에 유폐된 노산군으로 하여금 이 공간 안에서만 생활할 수 있도록 엄격하게 행동범위를 제한했던 금표비가 있다.

  동쪽과 서쪽으로는 3백척을 벗어날 수 없으며<동서삼백척),

  남쪽과 북쪽으로는 390척을 벗어나지 말라(남북삼백구십척)는 이른바 금지령 돌 팻말이다. 지리적으로 동.남.북 삼면이 강으로 막혔고, 배후에는 수십척 깎아지른 절벽이 막힌 청냉포 안에, 가두어 놓고도 이러한 금표비까지 세웠다니 그 옛날 비운의 주인공 단종의 애사를 귀뜀해 주는듯 하다.

  그러나 단종은 이곳 청냉포에 유배 생활을 하다가 그 해에 홍수가 져 청냉포가 물에 잠기게 되자 처소를 관풍헌으로 옯겼다. 관풍헌은 이 고을의 객사로 사용되던 건물로 영월읍 중심지인 영흥리에 위치한다.

 
  관풍헌 동족에는 "자규루"라는 누각이 있다. 본래의 누각 이름은 매죽루(매죽루)였으나 단종이 관풍헌에서 지내면서 이 누각에 자주 올라 자규시(자규시)를 읊었다고 하여 "자규루<자규루>"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달밝은 밤 두견새 울면은
시름 못 잊어 누(樓)에 오른다.
네 울음 슬프니 내 듣기 괴롭구나
 
네 소리 없었던들 내 시름 없을 것을
이 세상 괴로움 많은 사람들아
춘삼월 자규루엘랑 아예 오르지 마소.  이 시는 단종이 자규루에 올라 자신의 외로운 신세를
 
읆은 자규시의 전편이다.
 

 

또한 제왕의 자리에서 쫓겨난 어린 임금의 애처로움과 비통함이 절절이 묘사돼 있는 다음과 같은 시도 전한다.
 
원통한 새가 되어 제궁을 나오니
외로운 그림자 산주에 홀로섰네
밤마다 잠들려 해도 잠을 못 이루는데
어느 떄 되어야 이 한이 다할까
 
두견새 소리 그치고 조각달은 밝은데
피눈물 흘러서 골짜기에 지는 봄꽃이 붉구나
하늘도 저 슬픈 하소연을 듣지 못하는데
어찌하여 시름에 젖은 내 귀에는 잘 들리는가
 

  단종은 영월에서 유폐생활을 하는 동안 이처럼 시를 지어 울적한 회포를 달래기도 했다. 그런데 그해 9월에 경상도 순흥에 유배되었던 금성대군이 다시 단종 복위를  모의하다 밀고로 발각되자, 이에 자극을 받은 세조가 후환을 없애고자 단종에게 사약을 내렸다.

 왕명을 받들고 내려온 금부도사 왕방연은 사약을 가지고 관풍헌에 당도했으나,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때 공생복득이란 자가 단종의 뒤에서 활시위로 목을 졸라 비참한 최후를 맞게 하니 1457년 10월 24일의 일이다. 단종이 숨을 거두자 시신을 동강에 버렸다고 한다. 그러나 후환이 두려워 아무도 돌보지 않는 시신을 평소부터 충성심이 강한 영월 호장 엄홍도가 단종의 시신을 거둬 동을지산 기슭에 암매장하고는엄홍도 일가족이 자취를 감추었다. 

 

당시 영월 호장 엄흥도는 야음을 틈타시심을 관에 넣고 동을지산으로 내달렸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었다. 호장 엄흥도가 단종의 관을 업고 을지산 중턱께를 허우단신 올랐을 때였다.
 
  어둠 속에 웬 짐승 한 마리가 한 곳에 앉아 움직이지를 않는 것이었다. 엄호장은 순간 식은 땀이 등허리를 가득 채웠으나 불사이군의 충성된 단심은 그 까짓 짐승 한 마리에 놀라 꺾일 정도로 약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짐승이 한 마리의 유순한 산 노루임을 확인한 엄호장은  그 곳이 하늘이 점지한 단종의 묘터라 생각하고 그 자리에다 단종을 평장으로 모셨다는 일화가 전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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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대 단종(端宗)의 비(妃) 정순왕후(定順王后) - 사릉(思陵)
 
소재지 :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사릉리 산65
사 적 : 제 209 호
 

사릉(思陵)의 특징
  단종의 비 정순왕후 송씨
(定順王后 宋氏 : 1440-1521)의 사릉(思陵)은 한 많은 비운의 왕비 송씨의 불우한 일생을 대변하듯이 다소 초라하게 조성되어 있다. 단종의 장릉은 멀리 강원도 영월에 위치해 있지만, 사릉은 서울 근교인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사릉리에 자리 잡고 있다.

 정순왕후는 승하 당시(중종 16년) 부인의 신분으로 강등되어 궁궐에서 쫓겨난 상태에서 돌아 갔으므로 부인로 조성되었다가 숙종 24년(1698년) 단종 복위와 함께 정순왕후로 추복(追復)되어 단릉(單陵)의 형식으로 능호를 사릉(思陵)이라 명명하였다.
 역시 추봉된 능이었기에 병풍석(屛風石)과 난간석(欄干石) 없이 봉분만 조성하고 석양(石羊)과 석호(石虎)도 한 쌍씩만 주위에 설치되어 있다. 현재 비공개 능이다.

정순왕후의 약사(略史)
  여산송씨(礪山宋氏)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인 여량부원군(礪良府院君) 송현수(宋玹壽)의 딸로 태어나 1453년(단종 1년)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1457년(세조 3년) 사육신(死六臣) 사건으로 부인(夫人)으로 강등되어 열 여덟 어린 나이에 홀로되어 82세(1521년, 중종 16년)로 승하할 때까지 한 많은 일생을 보내야 했다.
 궁궐에서 추방된 후 여막에서 동냥으로 끼니를 이었고, 염색업으로 여생을 보내면서도 세조(世祖)의 도움을 끝까지 거부하는 청빈한 생활을 했다.
 * 21대 영조(英祖)의 계비(繼妃)도 정순왕후(貞純王后)이나 한자가 서로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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